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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김보경 여사와 자리를 함께 한 윤형주씨. 두 사람 다 그야말로 동안이다.
ⓒ 장 크리스토퍼
80년대에 일본이 잘 나갈 때, 일본사람들이 미국을 가마솥에 들어가 있는 개구리에 비유할 때가 있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가마솥에 들어앉아 있는 개구리. 밑에서는 저죽일려고 불을 때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따뜻하니까 그저 멋모르고 앉아있는 개구리가 미국이라는 얘기였다.

앉아 있다가 정작 서서히 뜨거워져서 근육이 익어서 움직이지 못할 때에야 사태를 깨닫는 멍청한 개구리. 그래서 삶아져 죽어버리는 불쌍한 개구리가 미국이라는 거였다. 그때 일본은 잘 나갔다. 외환보유고 세계 1위에 그저 물건 좋아서 사 보니 죄 '메이드 인 저팬'이었다.

그참에 일본사람들이 라커펠러센터도 사들였다. 미국의 자존심이 팔려나갔다고 조용하지를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미국 정말 당하는 줄 알았고, 아이고 미국 잘 못 왔나, 하는 이민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병을 얻음으로 해서 건강을 회복한다든가? 이에 미국은 80년대 후반 민간기업분야에서 죽어라 체질개선에 나섰었다. 70년대 도쿄에서 도로 죄 파헤쳐놓고 지하철 까느라고 난리법석을 피웠던 그 모양 그대로, 미국기업이란 기업들은 모두 나서서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 리스트럭쳐링(Re-structuring)을 외치고, 아주 입달린 사람들 요즘 M&A를 말하듯이 노래들을 부르고 입술에 달고 다닌 화두가 기업재편이었다.

그렇게 새순이 돋아오른 것이 공교롭게도 경제 싸이클하고 맞물린 대략 93년부터고, 이후 미국은 활황으로 접어들었다. 빌 클린턴이 마치 걸프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담박에 궤도에 올려놓은 것처럼 착각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자존심을 구입해 갔던 일본 사람들은 손해만 엄청보고 두 손들고 다시 미국사람들한테 라커펠러센터를 넘겼다. 개구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외국에서 누가 와서 미국 자존심을 건들었다 이렇게 되면, 미국사회, 어떤 의미에서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약간 다른 예이지만 미국사람들이 긴장할 또 한 가지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한국사람들이다. 미국자존심인 카네기홀을 이틀씩이나 대관해서 가족콘서트를 벌인다니,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가족콘서트를 카네기홀에서 벌인다는 것은 역사에도 없는 일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가령 안트리오라든가,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등 정상급 클래식 연주자 형제들의 공연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자. 그러나 이번에 카네기 홀에서 열릴 가족 콘서트는 순수클래식도 아니요, 말은 크로스 오버라지만 유행가, 그것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유행가가 카네기홀에 울려퍼지게 생겼다.

카네기 홀은 왠만한 공연일 경우 하루 대관이다. 그러나 그 하루 대관으로도 카네기 경력을 내세우는 판에 이번 가족 콘서트는 이틀 동안 대관을 했다.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라커펠러센터를 사들이는 것에 비할까마는 역시 묘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오는 7월 1, 2일 이틀 동안 카네기홀에서 가족콘서트 '사랑의 보금자리를 위한 Home to Home Family Concert를 갖는 윤형주씨. 라디오 방송의 황금시대인 1970년대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을 진행했던 사람이 바로 트윈폴리오의 윤형주씨다.

지금은 광고기획사의 사장이자 무역회사를 비롯한 기업체들을 이끌고 있는 중견사업가요, 교회에서는 장로로 사역하고 있다. 아마 1970년대를 서울에서 보낸 동포들이게는 너무나 정겹고 감미로운 예능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1970년대를 한국에서 보냈던 기자에게도 윤형주씨는 가수보다는 연예인의 느낌하고는 맞지 않는 단정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마치 청년들을 위한 동요연주자 같은.

1947년생이니까 한국나이로 쉬흔 일곱이 된다지만, 아직도 동안을 완전히 벗지 못한 얼굴에 눈이 하얗게 맑다. 인터뷰는 부인 김보경 여사와 함께 했다. 김보경 여사도 동안이긴 마찬가지.

윤형주씨하고 네 살 차이라는 데, 그렇다면 벌써 쉬흔 셋인데도 그야말로 주름살 하나가 없다. 하기야 곗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거고 어디 지각할 걱정에 맘조릴 이유도 없고 주름살 생길 일도 없겠다 싶긴 하다.

그저 어디를 가도 환영이고 제 곁에 앉으세요, 이거 잡숴보세요, 그저 환대만 받고 살아온 인생들일테니 두 사람 다 복잡한 얼굴이 생길리가 없을 법도 하다. 하여튼 둘 다 깨끗한 얼굴들이다.

▲ 윤형주씨의 일정수첩.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이번 카네기 홀 공연이 방송국 간에도 화제가 돼 있다고.
ⓒ 장 크리스토퍼
궁금한 것부터 물어봤다. 가수생활을 활발하게 해 온 것도 아니고 그동안 행적이 도대체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윤씨는 그동안 CM송을 비롯해서 광고음악을 제작하는 전문 업체를 만든 지 벌써 26년이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윤씨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CM송만 1400여곡이 된다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란-씨, 새우깡, 롯데껌, 한마음, 농심라면' 등 말하자면 끝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운 친구들~ 금강산엔 언제나 아름다운 만남들..."로 시작되는 우리 한인타운 금강산의 CM송도 윤형주씨의 작품이라는데, 그것도 본인의 육성이란다.

인터뷰 정리하면서 금강산에 전화해서 들어봤더니 감미로운 목소리, 그대로다. 키키보석, 서울식품의 CM송도 같은 경우라는 것. 현재 한국 CM송 탑 10을 고른다면 그중에 일곱은 자신이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는 한빛기획 작품이란다.

사업가가 다 된 윤씨는 현재 동진글로벌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해서 중동에 식품을 공급하고 있고, 주차용역업체로 (주)임파크에서는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윤씨는 그 중에서도 김도향씨와 같이 설립한 서울 오디오(비록 현재는 김도향씨와는 서로 독립했지만)를 기반으로 시작한 광고음악제작업체인 한빛기획에 가장 애착을 갖고 상근하고 있다.

사업경영에 몰두하면서도 틈틈히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근년에도 김세환씨와 함께 전국순회공연을 했는데, 감회도 새로웠고, 팬들도 너무 좋아했다고 전했다. 밝은 생활이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의예과를 다녔던 윤형주씨는 동아방송에 DJ로 활동하는 한편 통키타 가수로, 송창식씨와 트윈폴리오를 만들어서 인기를 누렸지만, 교육자요 학자였던 아버님 윤영춘 경희대학장의 서슬에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본과로 갔다. 신경정신과를 하고 싶었지만 한번 몸에 밴 '끼'는 윤씨가 알 수 없는 뼈 이름을 외우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본과 3학년 때 때려치우고 다시 기타를 메고 나섰다. 아주 가수로 나설 참이었는데, 1975년도에 불어닥쳤던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 여파로 이번에는 타의로 연예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때 광고음악회사를 만들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 복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부인 김보경씨가 그 부분을 들려준다.

"글쎄, 우린 몰랐어요. 그때 결혼한 지 얼마 안된 때였는데요. 후배들이 오면 우리집에서 파티를 하곤 했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그런 걸 피웠거나 했다가 서랍에다 넣어두고 잊어버린 채 가버렸나봐요. 그런데 그때 무슨 일제단속이니 뭐니 해 가지고 사람들이 찾아다니면서 조사하고 그랬다는데, 그때 우리집에서 놀았다, 뭐 이런 얘기가 나왔다는 거죠. 그래서 경찰들이 찾아왔는데, 우리는 몰랐으니까, 대접도 하고 차도 내 오고 했어요. 그랬더니 글쎄, 그 서랍에서 그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철커덕, 결국 대마초연예인가수 구속 1호가 됐다. 이후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되고 나흘 뒤인 10월 30일날 소위 대마초가수들이 풀릴 때까지, 한 4년 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 그러고는 조치가 풀리자마자 내놓은 곡들이 '바보'와 '사랑스런 그대'였는데, 차레로 '바보'가 5주 연속 MBC 가요 Top Ten 1등, 그 다음에는 '사랑스런 그대'가 3주 연속 1등, 이렇게 됐다.

윤씨는 다시 노래를 불렀고 팬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맞아준 것이다. 이후 윤형주씨는 노래와 비지니스를 병행한다. 하기는 노래가 비지니스요, 비지니스가 노래, 이렇게 되니까 일도 아니었던 셈이다. 사업도 순풍이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또 청소년선교활동에 교도소 선교, 장애인 선교 활동이었다.

대마초 사건 당시에는 건강이 별로 좋지 않던 아버님 윤영춘 박사가 모르게 하느라고 전가족이 총동원됐다. 신문이 배달돼 오면, 해당 기사 부분만 잘못 돼서 찢긴 것처럼 가장해서 올려놓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았단다. 북경대에서 중문학, 프린스턴대학에서 영문학, 그리고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했던 아버님 윤영춘박사는 아들 윤씨가 풀리기 전인 1978년 타계했다.

어머니는 살아계셔 가끔 미국 나들이를 하는 데, 누이동생 둘이 뉴저지에서 산다. 이번에 공연을 같이 하는 두 딸과 아들 모두 이탈리아, 미국 등지에 흩어져서 공부하고 있어, 윤씨 부부만 한국에 사는 꼴이 됐다. 그러니 1년이면 윤씨가 서너번, 부인 김보경씨가 두 번 정도 미국을 다녀간다고.

그런 윤씨가 한 6년 전에 엉뚱한 꿈을 꾸게 됐다. 과거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가수들이 비록 클래식연주자가 아니지만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종종 우리 가족들이 모두 함께 카네기홀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꿈을 이뤘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우선 대관료를 포함해서 이틀간 경비가 20만불이 넘는다. 총 2800석에 이틀 동안이니까 총 5600석이지만 프러덕션 스태프들 자리 빼고 5400여 석을 소화해야 하고, 만석이나 되어야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다. 장사로 따진다면 말이다. 그러니 이번 공연은 애초에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다.

국위선양같은 거야 부수적인 효과겠지만, 그러나 가장으로서, 자녀들한테는 여러 가지로 보람이 느껴지는 공연이다.

윤씨는 "연주자들은 단역으로라도 카네기홀에 한 번 올라서는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처럼 어떻게든 카네기홀에 서보고 싶어하는 게 연주자들의 마음이다"라며 말하며 자식들이 첫무대가 카네기 홀이 돼 버렸으니, 앞으로 서지 못할 무대가 어디 있겠느냐고 웃어 보인다. 덧붙여 "이제는 세계가 너희 무대다, 이런 얘기를 하지요"라는 윤씨의 말에 수긍이 간다.

'사랑의 보금자리'라는 공연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번 공연이 순전히 윤씨 가족만의 잔치는 아니다. 'Habitat for Humanity'의 주관으로 어려운 사람들 집짓기 운동에 이미 5만불을 주기로 돼 있다.

카아터 대통령이 망치들고 집짓는 운동과 같은 운동이요, 이미 작년까지 10년 동안 한국에서만 400채의 집을 지어줬고, 작년 여름 태풍을 당한 강원도 일대 수재민들에게 92채의 집을 지어주기로 돼 있다. 그중에 한 채분이 5만불이라는 얘기다.

윤씨가 주는 5만불은 사실은 5만불 한 채로 끝나지를 않는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해서 벌써 후원사인 알로에마임이 두 채, 이랜드가 두 채, 그리고 세이브 존이 한 채, 이렇게 매칭도네이션을 하게 돼 있어서, 총 여섯 채가 지어진다.

또한 이번 카네키 홀 공연은 이민 100주년을 맞은 미주동포들의 지친 이민생활에 위로를 하기 위한 의미도 갖고 있다. 다음해 윤씨는 트윈폴리오 해체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부터 카네기 홀에서 동포들과의 재회로 옮아가 있다.

이미 결혼한 첫 딸과 사위, 그리고 곧 결혼하는 둘째딸과 사위 그리고 막내 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손자들을 모두 데리고 다시 한번 카네기에 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쯤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데일리뉴스 커버에 '한국 3대, 카네기홀 점령!'이라는 대문짝만한 헤드가 주먹 활자로 박히는 것은 아닐까? 민간 외교사절이란 말을 하지만, 이런 멋진 외교사절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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