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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어떤 이념이냐 어떤 입장이냐 어떤 처지냐에 관계없이, 앞으로는 장 부장처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로 돌아왔다.'

이상 인용한 글은 신동아 이정훈 기자가 신동아 2월호에 발표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정훈 기자는 수지킴 간첩 조작 사건 당시 책임자로 있던 장세동 씨를 3시간 동안 인터뷰하고 나서 '장 부장처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보통 상식을 갖춘 사람들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힘든 말로 기사를 마무리 짓고 있다. 장세동 씨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 기사를 읽고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하나는 이정훈 기자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장세동 씨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기사가 이미 검찰 발표를 통해 수지김 간첩 조작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밝혀진 장세동 씨의 '자기 변명'을 교묘하게 합리화시켜주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장세동 씨는 이정훈 기자의 말처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일까? 우리 사회에 많아져야 할 사람일까? 나는 이정훈 기자의 장세동 씨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나서 장세동 씨가 책임질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책임회피에 급급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는데 이정훈 기자는 무엇을 보고 그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읽어본 다른 사람들도 기사를 통해 장세동 씨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뷰에서 장세동 씨는 1987년 당시 수지김 살해 용의자 윤태식 씨의 기자회견을 열라고 지시한 자신 명의의 전문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도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처음 봤다고 답했고 윤태식 씨가 수지김을 살해한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은폐한 사실에 대해서도 '은폐가 아니라 방치였다'며 그때 윤태식 씨를 검찰에 송치하지 않은 건 잘못된 일이고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87년 당시 살인자를 반공 투사로 둔갑시켜 온 국민을 우롱한 문제의 그 기자회견을 열라는 지시사항이 담긴 안기부장 명의의 전문이 여섯 통이나 현지로 날아갔는데도 모르는 일이라니? 1987년 4월 살인범인 줄 알면서 윤태식 씨를 방면하고도 사건을 제때 처리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 잘못이지 은폐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일까? 의아하게도 이에 대해 이정훈 기자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는 기사 서두에서 장세동 씨가 지난 해 12월 11일 서울지검 외사부에 출두하면서 수지김 유가족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기자는 '제 허물을 감추는 데만 급급한 연루자들만 보아왔기' 때문에 장세동 씨의 사과가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이정훈 기자의 말대로 장세동 씨는 분명 사과를 하기는 했다.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그러나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장세동 씨는 자신에 대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1987년 당시 안기부장으로서 최고 책임자였기 때문에 책임을 느끼지만 사건의 조작과 은폐에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장세동 씨의 태도는 그의 사과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정훈 기자도 바로 이 점에서 혼돈을 느꼈고 그래서 인터뷰를 추진하게 됐다고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장세동 씨가 인터뷰에서도 검찰 조사 때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이정훈 기자의 그 혼돈은 어렵지 않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장세동 씨의 사과는 진정한 의미의 사과가 아니었구나'하는 쪽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이정훈 기자는 그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란다. 이것이 내가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첫 번째 이유다.

이정훈 기자의 장세동 씨 인터뷰 기사는 조금 심하게 말해서 장세동 씨에게 면죄부를 주는 기사다. 왜냐하면 이 기사의 내용만 놓고 보면 장세동 씨가 수지김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책임질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기부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안기부장이었던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장세동 씨의 태도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정훈 기자가 인터뷰 내내 장세동 씨의 해명만 듣고말뿐 적절한 추궁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장세동 씨의 입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정훈 기자는 자신이 '이리저리 공격을 해보았다'고 기사에서 밝혔지만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오히려 이정훈 기자는 이리저리 공격을 하기는커녕 여러 모로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주기만 했다.

이정훈 기자는 인터뷰 서두에서 "싱가포르에서 윤태식을 반공투사로 만든 조작부분과 윤태식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고도 검찰에 송치하지 않은 은폐 부분은 장 부장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라고 말해놓고서도 장세동 씨의 '나는 모르는 일이었고 부장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는 요지의 해명에 대해 "누가 주체가 되었든 살인자를 반공투사로 만들었으니 조작은 조작이지요", "장 부장이 설명한 것이 사실이더라도, 부장이 지시하지 않았는데 그런 전문이 내려갔으니 그것 자체가 조작입니다"라면서 장세동 씨의 '잘못된 일이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입장을 은연중에 수용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정훈 기자는 아예 인터뷰 내내 장세동 씨의 진술을 객관적인 진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정훈 기자는 "당시 안기부 내의 해외공작국과 대공수사국 사이의 갈등이 수지김 간첩조작 사건 은폐의 원인인 것 같은데 부장이 그런 문제를 잘 조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이런 질문은 모두 기자 자신이 장세동 씨의 무죄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서 장세동 씨에게 "불교의 업(業)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장 부장께서는 세 번이나 투옥됐는데 이번에 수지김 사건으로 인해 또 한 번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게 무슨 업입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지 않았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왜 내 죄도 아닌데 다른 사람한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사과를 했느냐'는 질문이다.

아마도 이정훈 기자의 귀에는 장세동 씨의 말이 자신의 혐의 사실을 거듭 부인하고 부하 직원들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 내가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두 번째 이유다.

한겨레21의 김소희 기자는 최근호에서 이정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세동 씨가 한 말에 대해 '장세동 씨 정말 비겁하군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작이 아니라 실수이며 은폐가 아니라 방치였다”는 주장에서 나아가 장 씨는 ‘실수와 방치’마저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장 씨는 공소시효가 끝난 걸 알고 수사에 응했고,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진다는 언론플레이까지 했다. 수사과정에서도 대부분 시인해놓고는 결정적인 책임은 부하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 씨의 주장이 특별법이 만들어질 것을 염두에 둔 ‘멀리 보아 한 일’인지, 당장의 책임추궁을 모면하려는 ‘얕은 꾀’인지는 두고볼 일이다.

각종 언론 보도매체에서 보도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현재 수지김 유가족과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장세동 씨를 처벌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히고 있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반인륜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죄는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서이다.

이정훈 기자는 수지김 간첩 조작 사건을 7년 동안 추적해 보도한 공로로 지난해 국제엠네스티 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 인간과 그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안기부의 '수지김 간첩 조작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 상까지 받은 그가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밝혀진 당시 장세동 씨에게 해명의 기회를 주고 장세동 씨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이 사회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세동 씨가 이 사건에 정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기사를 이렇게 쓸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어떤 기사든 공익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인지 이정훈 기자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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