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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내 게시판에 '공공성 VS 국립대 발전 계획안'대자보가 붙어 있다. ⓒ 오마이뉴스 노경진


'기초학문을 죽이지 마라.'
서울대 교수들이 학교측의 '기초학문 외면 정책'에 반발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은 대체로 교수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철학 공부는 돈 번 뒤에…"

6월 어느 날 점심시간. 서울대학교 법대 앞 벤치.

이 학교 철학과 4학년 김경철(23)군은 1시 수업인 '헌법연습'을 기다리며 여자친구인 역사교육과 4학년 안현정(22) 양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제는 서울대 교수 성명 파동.

김 : "총장이 바뀌었다고 해도 학부생들에게 변하는 것은 없어. 교수들도 단지 총장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 같아."
안 : "총장의 태도? 어떤?"
김 : "총장이 기초학문에 대해 소홀하다는 점. 기초학문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 단지 세계적 추세라며 오로지 경쟁력 있는 학문에 지원을 쏟아붓는... 그런 불균형한 처사가 아닐까?"

인문학의 위기, 그 핵심에 위치해 있는 철학과 학생인 그에게 이번 교수들의 성명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번 교수들의 성명은 학생 대상이 아닌 총장을 향한 목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성명으로 인해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기초학문의 위기는 기초학문에 대한 사회전체적인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총장 개인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교수들은 총장에게 근본적인 기초학문육성대책을 바라고 이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겠지만 형식상 '서울대'라는 한 대학 내부적인 비판일 수밖에 없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김군은 말했다.

김 : "기초학문의 위기는 사회가 넉넉하고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해결될 것 같애. 특히 인문학은 '필요'의 학문이 아니거든. 오로지 '학문적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 '돈'이 되는 학문만을 추구하는 경향이야."
안 : "하긴... 유럽은 명문가의 자제들이 철학이나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례가 많잖아. 재정적 뒷받침이 돼야 '라틴어'나 '희랍어'도 배우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우리들은 열심히 '영어' 공부나 해야 하는 것이고..."

"학문을 경제논리의 잣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은 설 자리를 잃었다"는 김군은 현재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철학교수의 꿈을 지니고 철학과에 입학했던 그의 과거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1학년 때부터 철학 논제를 입에 달고 다니며 지내던 김군은 이 땅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리한 욕심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철학에 대한 낮은 사회적 지명도와 더불어 학비를 홀로 충당해야하는 김군으로서는 외부로부터 재정지원이 전무하다시피한 철학전공을 계속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한 것이다.

법관으로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이 가능해지면 다시 철학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라는 김군은 1시가 되자 법대 강의실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서울대학교 교정 ⓒ 오마이뉴스 노경진


"학자의 길을 가고 싶지만, 선배들을 보니…"

같은 날 오후 2시, 법대 옆 사회과학대학 3층 인류학과 과방.

점심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학생들로 과방은 왁자지껄하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졸업하는 이영진(26. 인류학과 4) 군도 이들의 대화에 한몫 껴들었다. 그러나 어딘가 피곤해보인다. 이군이 준비하고 있는 인류학과 대학원 후기 시험이 20여일 남았기 때문이다. 이군이 학교에서 아침을 맞고 한밤중에 귀가한 지 수십일.

이군은 뒤늦게나마 교수들이 성명을 낸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고 있다. 최근 2~3년 동안 BK21 사업을 필두로 재정이나 시설지원이 공대나 경영대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것에 대해 교수와 학생들이 인식을 같이 해온 것. 인문·사회학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없는데 교육부와 총장이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가시적 성과만을 좇는 것을 늘 비판해왔다.

그러나 이군도 교수들의 성명서가 '실력행사'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어차피 (성명서는) 총장에게 전달된 것이니까요. 교육부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초학문계 교수들의 성명이기 때문에 정책에 반영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초학문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역할은 수행하겠죠."

이군은 인류학을 '하고 싶어서' 전공하려 한다. 이군은 "인문·사회학 대학원은 가능성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학문을 정말 좋아해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군 역시 당장 학비가 문제다. 공대의 경우 BK21 사업을 통해 연구실당 매달 일정한 금액을 할당받지만 인문사회대는 지원이 극히 제한돼 있고, 대학원들생에게 돌아오는 장학금 혜택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외국 대학이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보면 학비 면제, 생활비 지급입니다. 물론 기초학문에 대해서도 동일한 혜택을 적용하지요. 그러나 서울대는 기초학문에 절대로 그렇게 지원해주지 않습니다."

학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이군은 대학원을 졸업한 선배들이 실업상태에 놓이거나 진로를 바꾸는 것을 보면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한다.

"적어도 국립대만큼은 공공성을 위해 경제 논리를 떠나 기초학문을 육성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어느 대학에서 기초학문을 지원해주겠습니까?"

이군의 안타까운 한마디이다.

"별 말씀없던 교수님들, 이제라도 나섰지만…"

▲자연대 부학생회장 이자호 씨
ⓒ 오마이뉴스 노경진
자연대 부학생회장 이자호(21. 의예과 3) 씨는 이번 교수들의 성명이 못내 아쉽다. 좀더 빨리 발표됐으면 큰 힘이 될 수 있었을텐데 하는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 학생회는 지난 3월부터 두 달 동안 내년부터 실시되는 모집단위 광역화에 반대투쟁을 벌여왔다. 본부는 학문간 통합과 경쟁력 강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BK21사업의 요구사항대로 모집단위 광역화를 추진했다. 학생회와 교수들은 아직 학문간 특성을 고려한 통합방안이나 커리큘럼 마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모집단위 광역화를 졸속적이라고 비판하고 나섰고, 기초학문의 고사도 가속화할 것이라고 강한 우려를 표시해 왔다.

이자호 씨에 따르면 학생들에 비해 교수들은 이제껏 모집단위 광역화 반대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학내에서는 이번 성명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BK21, 국립대 발전방안, 모집단위 광역화 등 지속적으로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 반대운동이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은 별 말씀이 없으셨죠. 언론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구요. 그래서 올 상반기 교육투쟁이 별 성과없이 끝났습니다. 이미 수시모집이 시작된 지금, 더 이상 학생회가 개입할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즉, 모집단위 광역화가 실시되기 이전에 교수 성명이 발표됐다면 학생 운동과 함께 정부의 교육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씨는 또 교수 성명이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문대 학생회 관계자는 "성명이 발표된 것은 바람직하나, 총장 한 사람의 성향을 문제삼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며, "경쟁력만을 앞세우는 정부의 그릇된 교육관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져야 했다"고 성명내용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올해 서울대학교 봄대동제 포스터. 포스터 처럼 서울대는 지금 뒤로 날고 있는 것이 아닐까?
ⓒ44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한편 지난 5월 18일 서울대학교(총장 이기준) 기초학문분야 3개 단과대학(인문대, 사회대, 자연대)이 총장을 상대로 '기초학문 외면' 정책의 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29일에는 사범대 교수들이 교수 임용의 공정성 등 학교운영 방식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또, 6월 4일 서울대 교수협의회(회장 신용하)도 이날 오후 이사회를 갖고 이들 교수의 성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사범대 교수들은 교수임용과 관련, 본과 출신 3명을 교수 후보로 추천했으나, 교내 중앙인사위원회는 지난 5월 24일 이들 3명에 대해 모두 부결 결정을 내렸다. 교수 임용시 3분의 1 이상을 타교 출신으로 임용해야 한다는 국립대 방침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인사위는 같은 날 역시 본교출신의 의, 치대 후보 7명은 전원 통과시켰다. 이에 사범대 교수들이 교수 임용 절차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집단반발했다.

그러나 사범대의 이같은 집단반발은 이번 임용 절차의 문제점 이전에 사범대에 만연해 있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년 째 제기돼 오고 있는 사범대 폐지론과 최근 불거진 물리교육과 교수충원문제와 관련해 사범대 내에 소외감과 본부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범대 교수들이 발표한 성명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사범대 교수들은 성명에서 "대학운영에 지나친 경영논리를 내세워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대학이나 학과는 집중지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기초학문분야나 사범대는 홀대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며 "특히 BK21사업으로 사범대 교수 9명의 자연대 이적에 따른 교수부족사태에 이은 신규임용 부결조치 등 일련의 사태는 교육이 국가경영의 기초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라고 규탄했다.

기초학문 3개 단과대 교수들의 성명도 사범대 교수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지난 18일 3개 단과대 교수들은 성명을 통해, "기초학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채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총장의 대학 운영 방침에 따라 대학의 이념과 본질이 크게 손상되고 있다"며 "대학 내의 기초학문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배려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단기적 시장성을 앞세워 보호가 필요한 학문 분야의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총장이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총장의 거취 문제까지도 논하겠다는 이들 3개 대학 교수들의 성명을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교수들 성명 이전부터 경쟁력만 중시하는 본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대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총학생회는 3월부터 5월까지 집중적으로 '모집단위 광역화' 반대투쟁을 벌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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