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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분들은 며칠 전 올라온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총무 최성민 님의 '동아일보, 제2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저지르는가?'라는 글을 보셨을 겁니다. 74년 동아투위 사건이 얼마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되자 <동아일보>가 이를 보도하면서 보여준 "해직의 칼을 휘둘러 거리로 내팽기친 동아투위의 투쟁업적을 은근슬쩍 자사의 민주화 투쟁 경력으로 편입시키는 듯한 보도태도"는 "언론을 악용한 천인공노할 사례로 규탄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제2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비유, 표현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동아일보가 기자를 희생시키고 세월이 지난 뒤 그 기자들이 이룬 업적을 자사의 것인 양 둘러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제하에서 일어난 일장기 말살사건 당시 담당기자를 해고하는 선에서 총독부와 절충을 한 뒤 해방 이후 기회만 있으면 그 사건을 일제하에서의 민족투쟁 사건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을 양식 있는 이들은 다 알고 있다."

여기서 '일장기 말살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기자를 희생시키고 난 뒤 (세상이 바뀌자) 그 기자들이 이룬 업적을 자사의 것인 양 둘러댄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거지요.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혹시 제목만 보거나 기사를 대강 읽은 독자들의 경우, '웬 일장기 말살사건? 그건 일제하 민족지의 항일 투쟁 아니었나?'라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안티조선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의외로 조선일보의 친일경력에 대해서 모르고 또 놀라워하더라"라는 글을 보았던 기억도 났구요.

그 기사에 딸린 '독자의견란'에 한 독자님이 일장기말소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만, 저도 <오마이뉴스> 글을 읽으며 배우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장기말살사건에 대한 참고사항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장기 말소는 일개 기자의 몰지각한 행위"

먼저 동아일보 홈페이지에 올려져있는 자사 연표(http://www.donga.com/docs/donga80/index.htm)에는 당시 일에 대해 이렇게 언급되어있더군요.

1936년 8월2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 정간. 이 사건으로 8명의 기자가 구속되고 송진우 사장 등 13명이 사임. 신동아와 신가정은 폐간


객관적인 팩트로서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항일 거사'의 이면에 있었던 당시 상황에 대해서 <미디어오늘>(전국언론노조 발행)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1936년 8월 24일 오전 동아일보 체육부 이길용 기자는 한 장의 사진을 들고 미술담당자를 찾아갔다. 사진은 이날 석간에 실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장면이었다.

평소 배일감정이 강했던 이기자는 손선수의 가슴에 일장기가 또렷이 나와있는 이 사진을 보고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미술담당자에게 기술적으로 일장기를 지워줄 것을 부탁했다.

붓으로 거칠게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 사진이 나가자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9개월동안 동아일보는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바로 유명한 일장기(히노마루) 말소 사건이다.

오늘날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거사적인 항일언론투쟁으로 묘사하고 자신을 항일 '민족지'로 상징화시키는 대표적인 독점물로 심심찮게 사용해 오고 있지만 이 사건의 이면을 살펴보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기자는 되도록이면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다만 일장기가 보기 싫다는 심정에서 대수롭지 않게 일을 처리했다. 그는 석간편집자에게는 양해를 구했지만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거나 의논하지도 않았다. 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단순히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장기를 지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사건을 거사적인 항일투쟁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게 얼마나 허구인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보다 적나라하게 동아일보의 주장을 뒤엎는 사례도 있다. 사건이 터지자 사장 송진우는 이기자를 불러놓고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큰 호통을 쳤으며, 이 소식을 들은 김성수도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면서 노여움과 개탄을 금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후 송진우는 무기정간 해제를 위해 총독부 고관들에게 로비하면서 이 사건은 회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개 기자의 독단에 의해 저질러진 몰지각한 행위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더 파렴치한 일도 있다. 당시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가 아니라 여운형이 발행하던 조선중앙일보에 의해 최초로 행해졌음에도 불구, 동아일보는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의 지면을 보고 역시 손선수의 사진을 지워버렸다"(인촌 김성수전)며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에 11일이나 앞선 8월 13일자에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 그런데 이때는 이상하게도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갔고 동아일보사건이 터지자 비로소 조선중앙일보 담당기자가 구속되는 등 파문이 일었다. 이후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끝내 복간되지 못했다.

덕분에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라는 항일언론의 휘광을 혼자 누리고 있다. 그런데 그 휘광의 이면에는 또 다른 치욕이 도사리고 있다. 총독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경영진은 이길용 기자 등 13명의 사원을 해고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아일보는 기자들을 무기정간 해제를 위한 희생물로 삼았던 것이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단면이 드러났듯이 일제하에서 기자해고는 이처럼 신문정간해제를 담보로 총독부와의 타협 속에 거래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비단 동아일보만이 아니었다.(신문자본연구팀, 95년 7월 12일자, '일장기 말소사건과 기자해고' 기사 중.)



"이심전심으로 엮어낸 항쟁"?

이에 비해, '동아일보 80년사: 민족과 더불어 80년' 사이트에서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은 기자 한두 명의 개인적인 정의감이 벌인 일이 아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팽배해 있던 분위기가 이심전심으로 엮어낸 항쟁이었다.

손기정은 후에 그의 저서에서 베를린에서 귀국하던 도중 싱가포르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준 동아일보에 감사하고 이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는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제4부 중 '겨레와 함께 뛴 동아마라톤' 편에서)


제1부 안에 있는 '일장기 말소와 제4차 정간' 편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를 서술하면서 송진우 사장이 해당 기자를 어떻게 꾸짖었는가, 즉 적어도 회사측과는 얼마나 '이심전심'이 아니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해직'이라는 말 대신 '동아일보를 떠나게 된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더군요. <미디어오늘> 기사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감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 스포츠'를 뒤늦게 입수해 거기에 실린 사진을 복사하여 전재한 것이다.

그런데 초판 때는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였으나, 놀랍게도 재판에서는 원본과 달리 유니폼 가슴 부위의 일장기가 교묘히 삭제되어 있었다.

체육부 기자 이길용이 전속화가 이상범에게 사진 속의 일장기 처리를 상의했고 두 사람은 이심전심, 빙그레 웃음을 교환하며 별다른 말 없이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일장기 말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2년 김은배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6위 입상할 때도 눈에 거슬리는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는 총독부의 트집 없이 넘어갔다. 윤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한 뒤 보성전문학교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연락받은 김성수는 마침내 제4차 무기정간이 눈앞에 닥쳤음을 직감했다.

1, 2, 3차 무기정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소재인데다 시국 또한 매우 엄중했다. 몇 달 전 사이토를 살해한 '2·26 사건'의 장교들이 내세운 구호가 '국체명징(國體明徵)'이었다.

그리고 국기는 곧 국체의 상징이었다. 신문사는 경찰에 둘러싸였고 신문사 안은 마치 태풍전야 같았다.

사장실에서 눈을 감고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송진우에게 김성수는 말했다.

"자네 거기서 뭘 하고 앉아 있나?" 방금까지 "성냥개비로 고루거각(高樓巨閣)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며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송진우가 대답했다.

"새로 부임해 오는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폐간과 같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군벌은 미친 개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이튿날 서울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향후 6년간 저지를 조선 압살 정책의 첫 제물로 동아일보에 8월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사진부의 백운선(白雲善) 서영호(徐永浩), 사회면 편집자 장용서(張龍瑞) 임병철(林炳哲) 등 관련 기자와 사진과장 신낙균(申樂均), 화백 이상범, 체육부 이길용 및 사회부장 현진건이 줄줄이 연행됐다.

같은 사진을 다시 신동아에 게재한 잡지부장 최승만(崔承萬)과 잡지 사진부의 송덕수(宋德洙)도 연행됐다. 이 가운데 이길용 이상범 백운선 서영호 신낙균 장용서 현진건 최승만은 구속됐다. 그리고 이길용 현진건 최승만 신낙균 서영호 등 5명은 동아일보를 떠나게 된다.

이 사태로 김준연 주필과 설의식 편집국장이 사임했고 이어 12월에는 이여성(李如星) 조사부장과 박찬희(朴瓚熙) 지방부장도 사임했다.

송진우 사장도 총독부 요구에 따라 사직했다. 동아일보는 총독부에 '사직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불똥은 신동아와 신가정에도 튀어 두 잡지도 강제 폐간됐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닮음꼴 사건

이 사건으로 무기한 정간을 맞게 된 <동아일보>는 그 후 279일만인 37년 6월 2일에 속간호를 발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날 사고(社告)에서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본보에서 일장기 말소사건을 야기하여 당국의 기위(忌緯)에 촉(觸)하게 된 것은 실로 공축불감(恐縮不堪: 황공하여 견디기 어려움 - 재인용자)하는 바이다. 이제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 해제의 관대한 처분을 받어 금후부터 일층 근신하여 경(更)히(다시는 - 재인용자) 여사한 불상사를 야기치 않도록 주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서 조선통치의 익찬(翼贊)을 기하려 하오니 독자제현께서는 조량(照亮)하시와 배전 애호해 주시기 바란다. (김동민, '일제하 조선·동아일보는 민족지였나', <역사비평> 90년 겨울호에서 재인용)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던 '대언론제국의 언론기관'의 역할도 이후 일제에겐 별 필요 없었는지 <동아일보>는 40년 8월 <조선일보>와 함께 폐간되고 맙니다. 그 뒤 해방이 된 다음 미군정의 적산 불하를 받아 45년 12월 1일 복간을 하게 되는데, 그 날짜 '중간사(重刊辭)' 서론 부분에서 <동아일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전문이 홈페이지에 있음).

일장기말살사건에 트집을 잡은 침략자 일본위정(僞政)의 최후발악으로 폐간의 극형을 당하였던 동아일보는 이제 이날을 기하여 부활의 광영을 피력하며 이날을 기하여 주지(主旨)의 요강을 다시금 선명(宣明)하여 써 3천만 형제와 더불어 동우동경(同憂同慶)의 혈맹을 맺으려 하는 바이다.

아마 '이날을 기하여' 일장기말살사건은 <동아일보>의 항일과 그로 인한 수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일거에 변신을 하게 된 듯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닌게 아니라 일장기말살사건과 동아투위사태가 겹쳐 떠오를만도 하지 않습니까. 두 사건 다 차라리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상은 '일장기 말살사건'이 '기자를 희생시키고 난 뒤 (세상이 바뀌자) 기자들이 이룬 일을 자사의 것인 양 둘러댄 사건'을 가리키게 된 정황이었습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도움이 될까 하고 올려보았습니다. 애초 기사를 쓴 분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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