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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능산리 고분군의 의자왕릉(오른쪽)과 태자 융의 묘. 물론 가묘이다.
 능산리 고분군의 의자왕릉(오른쪽)과 태자 융의 묘. 물론 가묘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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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에는 정면 교사형이 있는가 하면 반면 교사형도 있다.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 소정방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올렸다.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역대 31왕, 역년 678년 만에 역사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그리고 대신을 비롯하여 장수 88명과 백성 1만 2,87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우리나라 역사상 국왕이 외적에게 잡혀간 일은 의자왕이 초유의 일이었다. 의자왕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에서 3년 동안 지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이 청국에 볼모가 되어 잡혀가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고종의 아들 이은 왕자가 일본에 볼모가 된 적은 있었지만 왕조가 패망하고 국왕이 외적에게 붙잡혀 간 일은 일찍이 의자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정약용은 <강역고(疆域考)>에서 "삼한지중 백제최강 최문"(三韓之中 百濟最强 最文)이라 하여 백제의 강성함과 그 문명이 찬란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강성하고 문명이 찬란했던 왕조가 너무나 어이없게 무너졌다. 그리고 백제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왕조'가 되어 낙화암의 비사로 남아 있다.

어느 나라인들 망국사가 슬프지 않을 것이랴만 백제가 망하는 날의 비극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나와 태자·왕자·대신들과 함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열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올리게 하니, 백제의 군신이 목메어 울었다고 한다. 

신라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민족사의 비극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때는 아직 민족관념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민족문제와는 별개라는 논지를 펴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진실을 모르는 소치가 아닐까.

김춘추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고구려를 극비리에 방문하였다. 의자왕이 대야성을 공격하고(642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할 무렵의 일이다. 김춘추는 대야성의 성주인 자신의 사위가 백제군의 공격으로 무참하게 희생된 것에 분개하여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연개소문으로부터 전혀 뜻하지 않는 질책을 받았다. "우리 삼국이 동족상잔을 지양하고 대동단결하여 외적과 대처하자"(문정창, <백제사> 307쪽)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는 당나라가 삼국의 제패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수나라가 고구려로부터 참패를 당한 구원을 가진 연고로 하여 당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런 형세에서도 삼국간에는 끊임없이 영토 확장의 전쟁이 치러졌고, 신라와 백제는 서로 당나라와 연합하고자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신라의 대당외교가 성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이것은 연개소문의 주장처럼, 외적을 끌어들여 치른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

신라에서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부끄러울 정도의 친당(親唐), 부당(附唐) 정책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상대등(국무총리) 비담과 염종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선덕여왕을 시해한 일도 있었다. 

국가나 왕조가 망할 때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백제의 멸망 과정도 이 원리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만큼 국가 중흥의 야심과 원대한 포부로 국정쇄신을 도모하고, 신라를 자주 공격하여 영토 확장을 꾀하더니 말년에는 사치와 주색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왕의 방탕을 간하다가 좌평(佐平) 성충(成忠)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하고, 또 한 사람의 좌평 흥수(興首)는 귀양을 갔다.

의자왕의 황음과 충신을 멀리하는 패도가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 신라와 당나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왕의 황음무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백제가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있을 때 나당연합군은 물밀듯이 백제로 쳐들어 왔다. 성충의 예견대로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연산)에 이르고 당군은 백강에 들어와 상륙하였다.

계백장군이 결사대 5천을 이끌고 신라군에 항전하였으나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당군은 백제의 방어군을 격파하면서 수도 사비성을 향해 밀려왔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으로 피난하였다가 수도가 함락됨을 듣고 사비성으로 돌아와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연합군은 백제의 수뇌부를 당나라로 끌어가고 수많은 백성을 무참하게 학살하며 분탕짓을 했다. 당나라는 옛 백제 지역을 통치하고자 5도독부를 설치했다. 최고의 치소(治所)는 웅진도독부이며, 그밖에 마한·동명·금련·덕안의 4도독부를 두었다. 그리고 유인궤(劉仁軌)에게 1만 병력을 주어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백제왕조는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연합군의 잔학한 학살로 부흥운동은 쉽게 세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아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3만여 명의 병사가 참여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지도부의 내분과 연합군의 공격으로 부흥운동은 좌절되고 풍왕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당나라에 잡혀간 의자왕은 얼마 후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당나라는 그의 셋째 아들 융으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의 유민을 회유하고 신라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도록 하였으나 10여 년 만에 백제의 유민이 흩어지고 신라의 직할통치가 강화되어, 융이 당나라로 들어감으로써 백제 왕씨 부여(扶餘) 씨는 이 땅에서 멸족되고 '부여'라는 지명만 남게 되었다. 

의자왕의 실정과 황음을 가장 신랄하게 전하는 기록은 부여에 건립되어 있는 <당평백제비> (唐平百濟碑)의 다음의 구절이다.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망스럽고 귀신 부르는 계집의 말만을 믿는다. 형벌이 가해지는 상대는 오직 충량한 신하들이요, 총임은 아첨 잘하며 요행을 말하는 자들에게 먼저 내린다. 상하는 원한을 품고 베짜는 지어미는 슬픔을 머금는다.

대부분의 사료가 백제 멸망의 원인을 의자왕이 실정에 두고 있지만 더불어 중요한 것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짓밟는 신라의 사대주의에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평가할 때 백제 망국은, 신라가 비록 외세를 끌어들여 멸망시켰지만 신라는 당군을 축출하고 반쪽통일을 이루었다는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럼에도 신라지도층의 사대성은 백제 멸망의 유산으로 남는다. 이후 사대주의는 이 나라 지도층의 외교노선으로 굳어졌다. 예컨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그 사대성이 잘 드러난다.

"당 고종은 초서를 내려 구원(仇怨)을 평정하려 하였으니 백제는 이랬다저랬다 하며 대국에 죄를 지었음으로 그만 멸망한 것이니 또한 마땅한 것이라 하겠다."(<삼국사기>, 권제28)

태그:#겨레의인물100선,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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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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