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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금수 선생의 영정을 앞세우고 유골함과 함께 묘지로 향하는 유족들의 모습이다.
▲ 묘지로 향하는 유족들 고 김금수 선생의 영정을 앞세우고 유골함과 함께 묘지로 향하는 유족들의 모습이다.
ⓒ 강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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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5일(화) 오전 11시 유명을 달리한, 한국 노동운동에 애써온 고 김금수 선생이 28일(금) 경기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양지바른 곳에 잠들었다.

고 김금수 선생은 투병 중이던 생전에 "내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위원회 같은 것 꾸리지 말고 추도식도 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노동 원로들과 후배들은 간소하게나마 회상과 추모의 모임으로 추도식을 대신했다. 또한 마석모란공원 안장에도 최소한의 인원만 참여해 몇 사람의 추모 발언을 듣는 것으로 하관식을 마쳤다.

이날 하관식에는 노동 원로인 박중기 선생, 권낙기 선생, 남상헌 선생, 권영길 초대 위원장(민주노총), 천영세 지도위원(민주노총), 단병호 전 위원장(민주노총), 이원보 이사장(한국노동사회연구소)과 노동 후배활동가들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직원들,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활동가 등 50여 명 추모객과 유족이 함께 했다.

이날 추모사에서 천영세 선생은 "한국노총에서 쫓겨 나와서, 쫓겨나온 동지들하고 너무 황망하니 어디 갈 곳이 없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근교 산을 오르내렸다. 김유선 전 이사장과 북한산 한 기슭에 앉아서 그때도 아마 오늘 같은 푸른 하늘이었던 것 같다. (김금수 선생님이) 바라보시면서 역사 발전과 노동자 민중의 미래, 민족의 앞날을 얘기하셨고 꿈을 나눴던 기억이 새삼스럽다"며 고인과의 일을 회상했다.

이어서 "제가 부음을 듣고 스마트폰을 열어서 언제 통화를 했나 보니 17일 낮 12시 11분 그때쯤 한 20여 분을 길게 통화했다. 그러고 보니까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다"고 고인과의 마지막 통화를 기억했다.

천 선생은 "퇴원을 하셔서 몸이 안 좋으신 상태로 알았는데, 17일은 목소리가 너무 창창한 거예요. 그래서 '형님 웬일이요 이렇게 목소리가 좋소' 했더니 '어 나 많이 나았어. 기침도 가래도 많이 사라지고 그런데 밥을 먹어야 될 텐데 아직도 죽 먹고 있어.' '아 형님 참 욕심도 많소. 무슨 금방 밥이오. 국만 먹는 것도 어딘데...'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김금수 선생이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고무된 목소리로 '반응이 너무들 좋다'고 하자, 짜증이 나더라. 아픈데 이게 정신이 있는 분인가(싶어서). 그래서 형님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오, 다 어련히들 알아서 잘하겠소. 그러면서 끊었다"고 하며 "끊고 나서 제가 스쳐 지나가는 소망이, 6년 전 어느 날 저녁처럼 이 양반이 건강이 회복돼서 집 뒤의 나지막한 뒷산을 오가고 하다 보면 노동사회연구소가 있는 불광동 쪽으로도 나와서 점심도 하실 수 있고. 잘하면 지금 타오르기 시작한 이 촛불 광장에 광화문 청진동 골목이나 무교동 골목 어디서 이 양반하고 소주 한 잔도 기울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며 황망해했다.
 
고 김금수 선생의 하관식에 천영세 선생이 묘소에 흙 한 삽을 덮고 있다.
▲ 흙 한 삽을 덮는 천영세 선생 고 김금수 선생의 하관식에 천영세 선생이 묘소에 흙 한 삽을 덮고 있다.
ⓒ 강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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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선생은 "형님! 깨어 있는 상태에서 두 눈 감으시기 전에 아침까지도 신문 보셨다면서요. 세상 국제 정세 이 지구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횐히 보고 가셨지 않느냐. 당신이 와서 87년 머물다 가시는 이 지구 행성 곳곳에 무슨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가셨지 않은가. 고등학교 때 사회적인 실천 첫발을 내딛었던 '암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움직이고 있어요. 그 마그마가 들끓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땅 한반도만이 아니고 곳곳에서 그렇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가시는 길 편안하게 잘 가시라. 민중이 승리할 겁니다. 분단은 반드시 극복되고 평화는 올 겁니다. 인류 만인의 평등, 그런 세계도 언젠가는 올 것"이라며 "희망을 안고 꿈을 놓지 말고 형님 잘 가세요. 편안히 그곳에서 잘 계세요.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고인을 추모했다.

"분단은 반드시 극복, 평화도 올 것... 고맙습니다"
 
고 김금수 선생의 하관식에서 추모사 도중 고인이 묻힌 땅을 쳐다보는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의 모습이다.
▲ 고인이 묻힌 땅을 바라보는 단병호 선생 고 김금수 선생의 하관식에서 추모사 도중 고인이 묻힌 땅을 쳐다보는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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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련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추모 발언을 통해 "저희 병원에 교환원들 13명이 해고됐을 때다. 어디 가야 할지도 모르고 김말용 선생을 통해서 알게 됐던 게 노동 교육협회였고, 그때 선생님을 뵀을 때 말씀이 '한국노총 민주노조와 어용노조의 차이가 뭔지 아냐?' 어용노조도 임금 인상은 잘한다. 민주노조라 하면 조합원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걸 끝까지 나서서 해결하는 게 민주노조다. 그래서 교환원 복직시킬 때까지 단식까지 하면서 머리 정말 박 터지게 싸웠다. 선생님의 그 말씀이 저를 투쟁하게 했고, 해고됐던 교환원들은 다 전원 복직이 되었다"며 김금수 선생과의 인연을 회상했다.

또한 "89년 첫 번째 감옥 갔다 왔을 때 김금수 선생님이 제게 '고생했다. 맛있는 거 사줄게' 하고 저를, 남대문 근처 어느 식당에 데려갔다. 거기 가서 맛있게 먹었다. 전골이었는데 (먹고) 나오시면서 '차 위원장 이게 뭔지 아냐? 개고기다'"라고 했다며 생전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흥석 전 민주노총 경남본부장은 마창노련 대의원들 교육하던 김금수 선생과의 인연을 기억하며 "김금수 선생님이 가르치신 대로 살았고, 열심히 투쟁했다"고 말하고 "전노협 만들고 민주노총까지 왔었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올라오지 못한 데 대해서 정말로 죄송했다. 선생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발자취 하나하나 저희가 다 새기고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말로 고인을 기렸다.

고 김금수 선생이 명예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이사장은 "당신을 만난 지가 오십 년이 좀 넘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제가 잘못 모셔서 일찍 가신 거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먼저 든다"고 슬픈 심정을 토로하고 "매사 저한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보라'고 늘 말씀하시더니, '답을 애태워 찾으려고 하지 말고 답이 안 나오면 열심히 물어봐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이제 스스로 물음을 던져놓고 가셨다. '역사에서 길을 찾자. 역사에 길을 묻자'고 강조하시더니 이제 당신이 역사가 됐다"고 울먹였다.

그는 "세계 최초로 써내신 '세계노동운동사'는 세계 노동사 연구회 회원들이 더욱더 연구의 연구를 정진하면서 키워낼 거다. 목말라하시던 이재유 기념사업회도 뒷사람들이 다 감당해서 이루어낼 거다. 그러니 편안하고 넉넉한 웃음과 함께 편히 쉬십시오. 당신의 꿈을 잊지 않겠다. 삶으로 기억하겠다"는 말로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 기억하는 추모 발언 이어져... "노동자가 중심에 서야 한다던 선생님"

단병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은 추모 발언에서 "선생님은 당시 늦깍이였던 저를 노동운동으로 이끌어 주셨다. 87년으로 기억한다. 그때 선생님은 제 옆에 노동운동을 하는 간부들이 자본과 회사에 맞서서 투쟁을 열심히 하고 또 이기고 그러면 잘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셨다.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자기 관리를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얘기를 하셨다. 그리고 항상 힘들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또 운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많이 부딪힐 텐데 그때는 항상 대중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라고 하셨다"며 고인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그는 "선생님은 늘 기회가 있으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바뀌고 올바른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변혁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얘기하셨다"며 "그 엄혹한 시절에 70년대 한국노총에 들어가 있었던 것도 그렇고 한국노총에서 해고된 이후에 한국노동교육협회를 세우고 또 한국노동사회연구소를 세웠던 그 모든 것을 보면, '이 땅의 노동자들을 올바르게 키워내고 그 힘으로 사회를 바꿔보자'라고 하던 선생님의 지론과 소신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단 전 위원장은 "선생님은 아마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서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다. 지금 무도한 윤석열 정부는 역사를 뒤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주노총 또 노동자들은 그 무능하고 무도했던 박근혜 정권도 끌어내렸다. 만약에 윤석열 정부가 또다시 역사를 후퇴시키려고 한다면 노동자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어렵게 만들어온 이 민주적 질서를 유지시키고, 더욱더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이제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영면하십시오"라며 고인을 기렸다.

"윤 정부가 역사 후퇴시키려 한다면 노동자들이 떨치고 일어날 것"
 
일찌감치 가출한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낸 고인과의 인연을 밝히는 박혜경 전 원장(민주노총 노동교육원).
▲ 민주노총 노동교육원 박혜경 전 원장 일찌감치 가출한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낸 고인과의 인연을 밝히는 박혜경 전 원장(민주노총 노동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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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교육원장을 역임한 박혜경 선생은 "선생님께서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에게는 아버지 같았다. 제가 28살 때 노동 교육협회에 들어와서 그때는 제가 일찌감치 가출해서 현장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제 노동 교육협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선생님께서 '너 굳이 집을 나와 있을 필요가 있느냐?'라고 이렇게 말씀하시길래 생각을 해보니까 굳이 나와 있을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바로 집으로 들어갔고, 곧 이민 가실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노동 교육협회 활동을 했다"며 고 김금수 선생과의 인연을 소개하고 "선생님 이제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배우고 기리도록 할게요. 선생님 그리울 거예요"라는 말로 추모했다.

최승회 이사장(세계노동운동사 연구회)은 "며칠 전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 준비위 출범식에서 해주실 격려사를 받으러 댁을 찾아가 뵈었을 때, 그 격려사가 저희에게 주신 유언장이 될 줄은 몰랐다"고 고인과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80세가 넘으셨어도 끊임없이 우리 운동에 대해 걱정하고 몸소 실천하셨던 모습을 기억하겠다. 후배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선생님의 빈자리를 메우고 다시 나아가겠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라고 추모했다.

마지막으로 유족을 대표해 나온 고 김금수 선생의 아들 김지환씨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옆에서 보고 느낀 것을 종합하면 두 가지가 될 것 같다. 첫 번째는 아버지께서는 '본인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라는 걸 말씀 하셨고, 특히 노동운동을 통해서 사회 변혁을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두고 있다는 것을, 제 기억으로는 한 제가 한 열 살 때부터 제 귀에 뇌리에 박혔었던 것 같다. 많은 분이 저희 집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항상 술자리에 저를 끼워서 얘기하셨던 것 같다"고 하며 "두 번째는 사회 변혁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도구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떠나시는 날까지도 사람과 사람에 대한 얘기가 아버지 말씀의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고 생전의 고인을 회상했다.

또한 "아버지께서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셨던 김진균 교수님과 김말룡 선생님 근처에서 영원히 있게 해준 걸 정말로 가족의 일원으로서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며 감사드린다"고 추모객들에게 인사했다.

한편 고 김금수 선생은 1937년 경남 밀양 출생으로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실장을 지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출범에도 관여했다. 1995년~2003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겸 이사장으로, 2003년∼2006년 노사정위원장, 2006년∼2008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세상를 떠나기 전까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정희 씨와 아들 지환 씨, 딸 소남 씨가 있다.
 
고 김금수 선생의 하관식에 참가한 추모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묵념하는 추모객들 고 김금수 선생의 하관식에 참가한 추모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강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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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피아에도 실립니다.


태그:#김금수, #고 김금수 하관식, #동야 김금수, #천영세, #단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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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활동가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으며, 인터넷 매체에 노동·통일 관련 기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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