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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존엄사법

지난 10월 22일, 보건복지부는 임종을 앞둔 환자가 원할 경우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연명치료 결정법', 이른바 '존엄사법(Well-dying, 웰다잉법)을 10월 23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시범시행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내년 2월부터는 본격시행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정부 발표 후 '존엄한 죽음'은 지난 몇일동안 우리 사회에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시범사업이 실시되고 있는 13곳의 대형병원에 존엄사 상담을 문의하는 연령대가 비단 60, 70대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층에서 고루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사회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란 생각을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 상황이 살기 힘들고 팍팍하면 자연히 사람들은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죽음에 대한 관심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성숙 시키며 보다 나은 상황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고요? 죽음에 대한 고민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보다 성숙하게 가치있게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살려고 싸우면 죽게 되지만 죽고자 싸우면 살게 되는 역설처럼... 우리의 생은 그렇게 삶과 죽음의 순환적인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현대 유럽철학의 거장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이 세계에 그저 던져진 존재라면서 이 험준한 삶을 잘 헤쳐나가고자 한다면 죽음의 가능성을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태도를 취하라 하였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를 쓴 파드마삼바바는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며 삶을 잘 살고자 하면 죽음을 먼저 배워야한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죽음은 더 나은 삶의 밑거름이 될까요?

전 세계에서 안락사 혹은 존엄사가 가장 자유롭게 실시되는 나라는 벨기에입니다. 벨기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든 연령대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로 죽음을 쉽게 다룬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2015년 6월 이 나라의 '로라'라는 이름을 가진 25세 여성이 특별한 질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삶을 마감하고 싶어했고 어느 의료진이 그녀의 죽음에 도움을 주겠다고 밝히면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21살 때부터 정신과 진료를 받았었고 자살시도도 여러 번 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안정적이고 좋은 가정에서 자랐어도 삶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을 거라며 3개월 뒤 안락사를 시행할 것이라는 뜻을 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미리 선포한 그녀는 3개월의 과정동안 생각의 변화가 생겼고 결국 죽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그녀의 정신적 질환도 상당히 호전되었고 주변 관계도 좋아졌다고 합니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그 사회에서 그렇게 죽음을 결정한 이들 중 다시 자기 삶을 되찾고 살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측컨데 그녀가 좋아진 이유에는 그녀의 죽음 선포 이후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고 잘해준 부분이 매우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자기 삶의 끝을 생각해보며 지낸 시간 역시 그녀를 변화시켰을 것이며 그녀 삶과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정부가 허용한 존엄사는 안락사의 문제와 분명 다릅니다. 안락사는 살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거나 생명유지에 필요한 영양공급을 중단하는 등 직접적으로 죽음에 관여하지만 존엄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만을 중단할 뿐입니다. 존엄사는 안락사보다 보다 완화된 정책이며 직접적인 생명의 죽음을 권하지 않음과 동시에 당사자 역시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시간이 더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존엄사의 의미는 생존 확률이 희박한 인간이 자기 생의 마감을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정리하며 준비를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어진 삶을 좀 더 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여러 이견이 사회적으로 있지만서도...

단지 임종을 앞둔 이들에게만 의미있는 계기가 아니길 바라며...

존엄사가 시행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 정책이 주는 의미가 단지 피치 못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존엄한 죽음은 죽음에 임박하여 준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살아 생전에 미리 자기 삶의 전체를 생각해보며 준비할 수 있을 때 더욱 의미있고 값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법칙 중 하나는 죽음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인간이 자기 삶을 성숙시키고 보다 인격적 삶을 사는데 큰 계기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은 참 공평합니다.

힐튼가의 상속녀로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또한 늘씬한 미녀이기도 한 페리스 힐튼(35)이 몇 년 전 방한하여 한 TV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다며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고 죽음이 무섭다는 말을 합니다. 죽음의 가능성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은 더 성숙하고 자유로워지기 어렵습니다. 참고로 그녀는 엄청난 부를 누리며 많은 유명인들과 파티 라이프를 즐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런 호사로운 삶도 마음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이기지는 못하나 봅니다. 

인생의 유한함을 올바로 수용하고 인식하는 것은 삶을 의미있고 유익하게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죽음은 영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고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나의 삶이 온전히 드러났고 더이상 변화하지 않는 영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역사가 되었고 비로소 이야기되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문장은 마침표를 찍어야만 자신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듯이...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한 문장의 의미는 언제든 다른 방향 다른 의미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생이 남아 있는 한 모든 이들은 여전히 보다 나은 삶으로 변화가 가능하고 우리는 생이 있는 타인을 함부로 단정하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서양의 문물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자리', '드러난 것'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의 근원적 목적을 생각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기만을 바랍니다. 물론 지금 현재 최선을 다하고 보이는 성과에 매달리며 새롭게 나아가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삶의 본질적 목적을 미리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저 늘 무엇인가를 잡으려 하고 새롭게 만들려 분투하다 보면 삶의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자칫 자기 삶을 소진하고 소비하며 무모하고 공허한 방향으로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난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죽음을 보면서 여러 집착과 욕망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다 더 가치있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죽음을 보면서 역으로 삶을 더 존엄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끼사고따미, 마음의 평화를 얻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인도의 사왓티 거리에서 바싹 야위고 눈물로 얼룩진 여인이 보자기에 싸인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아이를 살려 달라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를 보고는 놀라며 여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갈길을 갔습니다. 그 아이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반쯤 넋이 나간 그녀의 이름은 끼사고따미!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한 그녀는 시집오는 날부터 모진 설움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고함치고 하인부리는 듯한 시어미니와 시누이들 틈에서 그녀는 갖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들을 낳자 모질던 시집 식구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은 그녀 대신 자기 딸들에게 일을 시키고 시누이들 역시 아이를 조금이라도 보듬으려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그녀는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간의 설움이 치유되는 듯 했습니다. 아들은 그녀의 전부이며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열이 오르고 붉은 반법이 온몸에 생기며 젖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픈 아이를 낳게 하려 온갖 노력을 했지만 결국 어느날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어졌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화장하려 하자 끼사고따미는 남편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그렇게 거리로 달려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이사람저사람 붙잡고 아이를 살려달라 애원한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던 한 할머니가 처지가 딱한 그녀를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딱하오. 아이를 살릴 방도가 나에게는 없으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알려주리다. 서쪽으로 가면 기원정사란 곳이 있는데 거기에 계신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해주고 죽지 않는 약을 나누어준다고 하더오. 새댁이 한번 그곳으로 찾아가 보구려."

그 말을 들은 끼사고따미는 한걸음에 기원정사로 가 부처님을 뵙고는 아이를 살려 달라 울부짖습니다.말없이 여인을 바라보던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여, 사람이 한번도 죽어나간 적이 없는 집을 찾아 그 집에서 겨자씨 한줌을 얻어 오십시오. 그러면 당신 말대로 아이를 살려 드리리다."

끼사고따미는 희망에 차서 이집 저집 다니며 겨자씨 한줌을 구하려 다니게 됩니다. 행색이 안쓰러운 그녀를 보고 집 주인들은 겨자씨는 주려하지만 다들 자기 집에서는 사람이 죽어나간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집저집 다니다가 달빛이든 밤이 되고 지친 그녀가 어느 한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느 여인이 문을 열고 그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얼마전 쌍둥이를 잃었습니다. 나도 그 아이들을 잃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새댁, 이 세상에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은 집은 없답니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사람이 죽었고 또 죽어가고 있답니다."

그렇게 두 여인은 서로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고 그녀는 힘없이 기원정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인간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며 모든 생은 영원할 수 없고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끼사 고따미는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고 아이의 죽음을 수용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 그녀는 평생 수행에 정진하였고 부처님은 이렇게 그녀를 칭찬하였습니다.

"나의 비구니 제자 가운데 남루한 옷을 입고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로 첫 번째는 끼사고따미로구나!"


태그:#존엄사, #연명의료결정법, #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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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학술연구교수 / 마음연구소 우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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