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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던 노동자, 농민, 시민 수만명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중태인 백남기 농민이 입원한 대학로 서울대병원까지 가면을 쓰거나 직접 준비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 가면 쓴 노동자들 종로 거리 가득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던 노동자, 농민, 시민 수만명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중태인 백남기 농민이 입원한 대학로 서울대병원까지 가면을 쓰거나 직접 준비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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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서 벌어진 두 차례의 민중 총궐기 대회가 박근혜 대통령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가 심리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11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감정 섞인 반응을 보인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민중 총궐기 시위대를 IS(이슬람국가) 행동대원에 비유하면서 복면시위 금지법 추진을 지시했다. 이 뉴스를 듣고, 앞으로는 복면 쓰고 시위는 물론 노래도 못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에서 멀지 않은 광화문이나 시청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면, 청와대 코앞에서 그런 시위가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대통령 입장에서는 긴장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시위대가 복면까지 쓴다면, 긴장감은 한층 더 배가될 것이다. 4·19 때처럼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한양을 도읍으로 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지금의 광화문광장)이나 군기시(무기 제조 관청,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면, 왕들의 심리가 어땠을까? 10만을 전후한 대규모 군중이 한양 한복판에 모여 정권을 규탄한다면, 그 심정들이 어땠을까?

조선시대 왕들의 십중팔구는 놀라 기겁했을 것

이런 경우, 조선시대 왕들의 십중팔구는 놀라 기겁했을 것이다. 도성 바깥도 아니고 사대문 안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의 군중이 집결한다면, 도성 안에서 그에 대처할 공권력을 동원할 길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왕들은 '청와대'를 사수하기보다는 버리고 탈출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탈출하지 않는다면 시위대에 굴복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1882년 7월 23일(실록상의 음력 날짜는 6월 9일)의 임오군란 때, 고종도 그랬다. 고종은 창덕궁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한양 시민이 대거 참여한 시위대 앞에서 쉽게 굴복했다. 한양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시위대를 진압할 병력이 도성 안에는 없었던 것이다.  

임오군란은 1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에게 1개월치 월급을 무성의하게 지급한 데서 발단했다. 봉급으로 받은 쌀가마니를 열어보니 절반은 겨와 모래였고, 나머지의 상당부분은 썩은 쌀이었다.

이에 격분한 일부 군인들이 배급소 직원들을 구타했다가 감옥에 갇히자, 군인 가족들이 동조자들을 모아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개최했다. 이 시위는 평화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포졸들이 '물대포' 같은 것을 동원해 진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가 강경 진압을 택하는 바람에 평화적 시위가 물리적 시위로 돌변했고, 여기에 한양 시민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대규모 민란으로 전환된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것은, 일본·청나라·서양에 대한 시장개방(개항)으로 서민경제에 대한 악화된 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고종의 긴급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빨리 오지 않았다면, 임오군란의 시민 주역들이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을지 알 수 없다. 

육조거리 모형. 아래쪽에 광화문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육조거리 모형. 아래쪽에 광화문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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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에서 드러나듯이, 옛날에는 한양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인해 정권이 직접적 타격을 받기가 쉬웠다. 도성 안에 모인 시위대 숫자가 수만 명으로만 불어나도 정권이 무너지기 쉬웠다. 시위대가 가질 수 있는 무기와 관군이 가진 무기가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 도성 군사력을 훨씬 상회하는 군중이 집결하면 왕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옛날 왕들이 이번 민중 총궐기를 봤다면 아마 짐부터 싸려고 했을 것이다.

시위 잘못했다가는 참수형·거열형 처해질 수도

이런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정부가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민중을 통제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번 총궐기 대회 같은 대규모 시위가 여간해서는 발생하기 힘들었다. 시위를 잘못했다가는 참수형을 넘어 거열형(사지를 분해하는 형벌)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종묘나 궁궐을 침범하기로 모의만 해도 거열형을 부과했으니, 수만 명을 모아 궁궐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면 거열형을 당하고도 남을 만했다. 호패를 소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형을 당하던 때가 있었으니, 시위를 했다가 잘못되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 힘들었던 데는 기술적인 원인도 있었다. 지역 간의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던 탓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에 대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지지와 응원을 보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시위는 그 지역의 일로 끝나기 쉬웠다. 이 때문에 대규모 시위가 출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의 결과물이 19세기 후반에 세계 주요 지역으로 전파되자, 20세기 초반부터 시위 문화에 새로운 양상이 출현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대중용 신문이 보급되면서, 시위가 지역 단위에서 전국적으로 혹은 국제적으로 번지기가 쉬워진 것이다.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가 여타 지역 사람들의 동조를 얻어 한층 더 큰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한 사건이 1919년 3·1운동이다. 일본 경찰 측 추산보다는 많지만 한국 측의 추산에 따르면, 3·1운동 시위대의 규모는 2천 만 한국 인구의 10% 가량인 200만 정도다. 한국 역사에서 이만한 규모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조직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교통·통신·신문의 발달로 전국적 범위의 연락 및 집회가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그런 기술혁신이 생기기 전에는, 시위대가 요구조건을 관철시키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지방정부나 중앙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 정부를 장악한 시위대는 어차피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므로, 반란의 범위를 다른 지방으로 넓혀 새로운 정권의 건설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이런 양상을 찾을 수 있다.

교통 불편한 시대의 시위대, 목숨 걸고 정권 전복 시도

이렇듯, 왕조시대에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도 힘들었지만, 일단 발생하면 시위대가 목숨을 걸고 정권 전복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위에 실패하면 귀가하거나 훈방조치 되는 게 아니라 형장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은 데에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동조도 얻기 힘들었으므로, 시위대는 목숨을 걸고 정권 전복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통·통신의 발달 및 신문의 보급으로 전국적 시위가 쉬워지면서 시위대의 목표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종전의 시위는 중앙이나 지방 차원의 정부를 압박하거나 전복하는 것을 1차적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았지만, 20세기부터는 시위가 전국적 범위의 여론 형성을 1차적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미국에서 운행된 증기기관차.
 미국에서 운행된 증기기관차.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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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상대로 시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벌어지는 시위가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위에서는 정권 압박이나 정권 전복이 여론 형성 단계의 다음 단계로 미뤄질 수밖에 없게 됐다.

3·1운동 경우도 그랬다. 시위대가 200만이나 됐으니, 그 이전 같으면 정권이 전복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3·1운동 참가자들은 시위대의 힘으로 곧바로 식민통치를 종식시키기보다는 국내 및 국제 여론의 동조를 얻어 식민통치를 종결시키고자 했다. 시위대의 1차적 목표가 당장의 정권 전복이 아니었으므로, 총독부는 일단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위대의 1차적 목표가 달라지다 보니, 시위대의 숫자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지더라도 정권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대규모 시위대가 아무리 정권을 규탄해도, 최후의 순간에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권력이 SNS 일일이 통제 못하는 시대, 왕조 시대 재연될 가능성

또 청와대 근처에 수만 혹은 수십만의 시위대가 모인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 곧바로 정권이 붕괴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시위대의 구호가 전국적 공감대를 얻기 전까지는 정부가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활용해서 정부는 시위대의 구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여론을 통제하거나 국민들의 눈에 시위대가 부정적으로 비쳐지도록 여론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정부는 시위대의 규모가 큰 것만으로는 심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이어 SNS가 대중의 생활에 좀더 파고든다면, 현대의 정부도 더 이상 상황을 낙관하기 힘들 것이다. SNS로 형성되는 정보 전달을 정치권력이 일일이 통제할 수 없게 되면, 과거 왕조 시대의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구호가 확산되는 것을 막지 못하거나 그것이 왜곡되어 전달되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정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가 몇 만 명 규모로 늘어날 경우에 대통령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옛날처럼 '청와대'를 탈출하거나 아니면 굴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민중 총궐기 대회, #시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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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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