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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의 명소. 리차키프 공동묘지.
 리비우의 명소. 리차키프 공동묘지.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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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 새겨진 딱딱한 코블스톤이 비에 씻겨 만질만질하다. 매끄러운 거리 위를 도시의 빨갛고 노란 트램을 타고 달렸다. 하얗게 센 머리 위에 스카프를 두른 작은 할머니가 트램 위로 올랐다. 조곤조곤. 세상 모든 할머니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다 그런가 보다. 평화롭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트램에서 내렸다. 아직 비가 온다. 빗물을 타고 올라오는 땅의 비린내 사이에, 고소하고 은은한 커피 향이 섞여 있다. 리비우의 색은 노랑. 파란 하늘 아래 노란색, 아이보리색, 갈색 건물들이 레고 조각처럼 붙어 서 있다.

키예프의 색은 옅은 회색. 유럽, 이라기보다는 러시아스러웠던 도시. 리비우는 유럽이다. 딱딱한 빵과 도수 센 보드카보다는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와 진한 향의 커피가 어울리는 도시다. 이런 곳에서라면, 빗방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비엔나 커피 향을 맡으며 잠시 걸어도 짜증스럽지 않겠다.

리비우 시내를 가르는 트램. 매끄러운 거리 위를 도시의 빨갛고 노란 트램을 타고 달렸다.
 리비우 시내를 가르는 트램. 매끄러운 거리 위를 도시의 빨갛고 노란 트램을 타고 달렸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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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시작될 우크라이나-폴란드 유로컵 행사 준비로 시내는 활기차다(여행 당시 2012년). 활기찬 분위기야 마다할 거 없지만, 얇은 주머니가 걱정이다. 아직 행사 시작 전이라 다행히 저렴한 호스텔을 찾았다. 도미토리 침대 하나에 5유로. 프런트 데스크 안내문에는 행사가 시작하는 내일모레부터 방값이 20유로로 오른다고 적혀있다. 곧 떠나야겠구나. 여행자를 움직이는 건 도시에 대한 애정뿐만은 아니다. 돈이 없으면 떠나야 한다.

여덞 개의 침대가 놓인 도미토리 룸 세 번째 침대. 일본 남자 하나가 삐딱하게 누워 컴퓨터를 또각이고 있다. 오랫동안 다듬지 않은 긴 단발머리. 듬성듬성 난 지저분한 수염. 햇살에 그을은 얼굴. 햇빛 찬란한 이 시각에 밖에 나가지 않고 어둡고 우울한 도미토리 룸에 박혀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장기여행자다.

"하이."

긴 앞머리에 가려진 남자의 두 눈이 드러났다.

"리비우에는 언제 왔어요?"
"음…. 한 닷새쯤 됐나."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나 비듬이 떨어지면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요량으로 눈여겨 지켜봤다. 비듬은 없다. 그럼 한 발짝 더.

"저희는 이제 막 도착했어요. 리비우 어때요? 볼만한 게 많나요?"
"글쎄. 끼닛거리 사려고 이 옆 상점 간 거 말고는 나간 일이 없어서…. 어제랑 오늘은 상점도 안 가고 호스텔에만 있었어요. 내일도 그럴 거고. 물어볼 사람을 잘못 정하셨네요. 하하하하."


뭐지 얜.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짐작대로 남자는 장기 여행자다. 심각한 여행 중증이다. 남자는 한국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이 갔다며 굳이 침대에서 일어나 이마트에서 샀다는 라면과 고추장을 꺼내 보여줬다. 유럽에 오는 건 이번이 세 번째. 이번엔 2개월 반 정도 돌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일본에서 열흘 정도 머물다 다시 떠난단다. 뭐지 얜?

"그렇게 여행할 돈은 어디서 벌어요?"


진심으로 궁금하다. 더스틴과 나는 길어도 삼사 개월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후대비까지는 꿈도 못 꾸는 인생일지라도, 뭐라도 해 돈을 벌어야 생활도 되고 다음 여행도 떠날 수 있을 거 아닌가? 이 남자는 뭔데 여행을 계속하지? 유럽도, 남미도, 아시아도, 돌고 돌다 일본에는 고작 열흘간 발을 담그고 다시 떠난다. 대단한 유산을 물려받았나? 로또에 당첨됐나? 프리랜서 일을 하나? 가이드북 저자인가? 사진작가인가? 나도 좀 알자.

리비우는 유럽이다. 딱딱한 빵과 도수 센 보드카보다는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와 진한 향의 커피가 어울리는 도시다.
 리비우는 유럽이다. 딱딱한 빵과 도수 센 보드카보다는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와 진한 향의 커피가 어울리는 도시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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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 오페라 극장. 6천원 정도면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
 리비우 오페라 극장. 6천원 정도면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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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냥 어디서 생겨요."

…. 정이 그냥 뚝 떨어지네. 좀 알려주면 안 돼? 치사하게 말이지.

"저희는 이번에 유럽에 처음 왔어요. 동유럽 세 번이나 와봤으면 잘 아시겠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뭐 동유럽은 다니다 보면 다 똑같
아요."
"러시아는 가봤어요?"
"러시아? 러시아도 여기랑 똑같아요. 백인들 많고 사람들 영어 하나 못하고."


뭐지…. 얜…. 대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문앞을 맴돌았다. 문이 열렸다. 흰 머리에 얼굴 빨간 할아버지 등장.

"올라!'

캬. 상쾌한 외침. 스페인에서 온 유쾌한 할아버지다. 일본 남자가 묘사한 러시아인 비슷하게, 백인에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한다. 나도 스페인어 한 마디 하지 못한다. 그래도 대화는 통한다. 아저씨도 여행 중증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가워한다. 한국에는 지난해에 갔었다며, "서울, 부산, 제주"가 좋았단다. 그때의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는지 볼록 나온 귀여운 두 뺨이 조금 더 빨갛게 물든다.

리비우의 명소는 바로 '공동묘지'다 

리차키프 공동묘지. '공동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으스스함보다는, 녹지와 나무와 바닥에 젖은 낙엽, 묘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각상들, 조각상에 낀 초록 이끼들이 주는 알싸함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리차키프 공동묘지. '공동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으스스함보다는, 녹지와 나무와 바닥에 젖은 낙엽, 묘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각상들, 조각상에 낀 초록 이끼들이 주는 알싸함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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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리비우가 마음에 들었다. 도시 전체가 유럽! 하고 외치는 양 유럽스럽지만, 물가는 유럽스럽지 않게 저렴하다. 비가 온 다음 날. 오늘은 공기도 촉촉하고 상쾌하다. 이런 날씨에 이런 도시를 산책하지 않는 건 죄스럽지. 오늘의 산책지는 공동묘지다.

키예프의 명소가 천 년 된 미라가 잠자고 있는 동굴 수도원이었다면, 리비우의 명소는 공동묘지다. 축축한 안개가 감싸고 도는 묘지의 공기는 침묵처럼 묵직하다. 리차키프 공동묘지에 사람이 처음 묻힌 건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인 동시에 로맨틱한 묘지로 알려져있다.

'공동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으스스함보다는, 녹지와 나무와 바닥에 젖은 낙엽, 묘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각상들, 조각상에 낀 초록 이끼들이 주는 알싸함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슬픔에 빠진 천사의 얼굴. 잠이 든 듯 평화로운 얼굴로 천을 흐트러뜨린 채 누운 여인의 모습. 기도하는 아기 천사. 절망에 빠진 표정. 조각 없는 무덤. 살아생전의 얼굴이 새겨진 무덤. 시인의 무덤. 오페라 가수의 무덤. 독립군의 무덤. 어른의 무덤. 아이의 무덤. 무덤 뒤의 무덤. 또 무덤.

우크라이나 20 히브리나 지폐의 주인공, 우크라이나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이반 프랑코의 무덤은 돌을 깨는 영웅이 장식하고 있다. 소련 체조선수였던 빅토르추카린의 묘비 앞에는 단단한 몸을 한 남자의 상반신이 우뚝 서 있다. 20세기 초 오페라 스타 솔로미야 크루셰니츠카의 묘지는 현악기를 든 우수에 찬 남자의 조각상이 무덤의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하얀 대리석 십자가가 규칙적으로 난 무덤은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와 볼셰비키에 대항해 싸운 2000여 명 폴란드인들의 묘다. 나치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운 우크라이나 반정부 군대(UPA)의 군인들, 1930년대 스탈린으로부터 비롯된 기근의 희생자들도 이곳에 누워있다.

우크라이나 20 히브리나 지폐의 주인공, 우크라이나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이반 프랑코의 무덤.
 우크라이나 20 히브리나 지폐의 주인공, 우크라이나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이반 프랑코의 무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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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명소가 천 년 된 미라가 잠자고 있는 동굴 수도원이었다면, 리비우의 명소는 공동묘지다. 축축한 안개가 감싸고도는 묘지의 공기는 침묵처럼 묵직하다.
 키예프의 명소가 천 년 된 미라가 잠자고 있는 동굴 수도원이었다면, 리비우의 명소는 공동묘지다. 축축한 안개가 감싸고도는 묘지의 공기는 침묵처럼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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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의 관광명소에 '죽음'이 연결되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는 사람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으니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사람은 죽으니까. 병이 들어 죽고, 사고가 나서 죽고, 혁명을 이루다, 독립을 위해 싸우다, 기근과 폭력으로, 죽으니까. 르비브의 사람들도 그렇게 죽어 갔으니까.

아티스트, 체조선수, 군인, 전쟁의 희생자가 잠든 리차키프 공동묘지는 리비우 도시의 과거다. 과거 한 번 화려하다. 14세기 폴란드의 지배를 시작으로, 리비우에는 폴란드인과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아왔다. 한때 폴란드의 일부였던 르비브는 오스트리아의 도시이기도 했으며, 헝가리의 도시이기도, 소련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그런 민족이 그런 과거를 거쳐 지금의 도시가 만들어졌다. 한때는 다른 민족의 도시였던 곳.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도시인 곳. 그리고 지금 이곳을 여행하는 나의 도시. 지나가는 여행자인 나는 생각한다. 솔로미야 크루셰니츠카가 얼마나 유명했건, 이반 프랑코의 문학이 얼마나 위대했건, 모두 지나간 날들이다.

로맨틱한 조각상으로 아름답고 슬픈 과거를 추억하고 있지만, 지금 이곳에 선 여행자의 눈에 가장 로맨틱한 건 역시, 세련된 조각상보다는 묘지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리비우의 할머니다. 작은 동전 두 개를 받아들고 지어지는, 그녀의 주름진 미소다.

산책하기 좋은 리차키프 공동묘지. 비가 온 다음 날. 오늘은 공기도 촉촉하고 상쾌하다. 이런 날씨에 이런 도시를 산책하지 않는 건 죄스럽지.
 산책하기 좋은 리차키프 공동묘지. 비가 온 다음 날. 오늘은 공기도 촉촉하고 상쾌하다. 이런 날씨에 이런 도시를 산책하지 않는 건 죄스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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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키프 공동묘지에 사람이 처음 묻힌 건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인 동시에 로맨틱한 묘지로 알려져있다.
 리차키프 공동묘지에 사람이 처음 묻힌 건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인 동시에 로맨틱한 묘지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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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한 상반된 두 태도

호스텔 도미토리에는 새로운 손님이 와 있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깡마른 우크라이나 소녀 올레나다.

"어디서 왔어요?"
"수미라는 도시요. 러시아 국경 근처예요. 오면서 노란 티셔츠 입은 유로컵 자원봉사자들 보셨죠? 저도 자원봉사하러 여기 왔어요."
"아 그럼 대학생?"
"네. 전공은 미술. 리비우에는 처음 와봤어요. 너무 신나요. 자원봉사 일도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기도 하지만…."


올레나의 눈빛이 살짝 떨려왔다. 예쁘고 어린 눈이다. 삶에 대한 기대와 긴장과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근데 있잖아요…. 혹시 수지도 호텔 예약할 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방 쓴다는 거 알고 예약했어요?"
"아…. 네. 호스텔 도미토리 룸은 원래 여러 사람이 방을 같이 써요. 처음 와서 모르셨구나. 다 여행자들이라 괜찮아요. 혹시 누가 해코지하면 저한테 말해요."

혼자 쓰는 호텔 방인 줄 알고 왔다가 침대 여덞 개가 모인, 그것도 낯선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방에 들어온 올레나는 얼마나 놀랐을까. 귀엽다. 내가 지켜줘야지. 지켜준다는 말에 올레나가 수줍게 웃는다.

리비우의 하늘. 동전을 던져보자.
 리비우의 하늘. 동전을 던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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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긴장으로 살짝 경직됐던 올레나의 표정이 젊음의 생기발랄함을 되찾았다. 올라 스페인 할아버지의 빨갛고 신난 볼이 올레나의 어린 얼굴 위에 겹쳐졌다.

"오늘 리비우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세상에! 너무 멋진 거 있죠! 너무 멋진 도시예요! 한 번 길을 잃긴 했는데…. 그 덕에 멋진 언덕에 가서 도시 전경도 보고. 너무 좋았어요! 아, 아름다운 도시예요!"

올레나는 '멋지다'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이 아가씨…. 귀엽다. 이렇게 좋아하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올레나의 생기발랄함에 반한 나는 내친김에 데이트 신청을 했다.

"유로컵 전야제 공연한다는데, 같이 안 갈래요?"

올레나, 더스틴과 함께 시내로 나갔다. 하루 전만 해도 조용하던 유로컵 팬 존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도로를 가로막아 세워놓은 행사장 양쪽으로는 축구 경기 관람을 위한 맥주 노점이 즐비했다. 맥주 한 잔을 들고 무대 앞으로 갔다. 밴드를 동원한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이 시작됐다. 중년 나이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눈을 감고, 무대 중앙에 서서, 빠른 리듬을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올레나 옆에 서서,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마음속에 뭔지 모를 다짐이 새겨졌다.

곧 시작될 우크라이나-폴란드 유로컵 행사 준비로 시내는 활기차다(여행 당시 2012년).
 곧 시작될 우크라이나-폴란드 유로컵 행사 준비로 시내는 활기차다(여행 당시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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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뒤에는 불꽃 쇼를 보러갔다. 'Fire Show'라기에 대단한 불꽃이라도 터뜨릴 줄 알았건만, 남자 하나가 외롭게 서서 불붙은 곤봉 하나를 휘두르고 있다. 초라한 불꽃 쇼에 흥미를 잃은 나는(불꽃이 꺼져버릴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곤봉남에게는 미안하지만) 관심을 올레나에게 돌렸다. 나의 질문공세가 시작됐다.

어렸을 때랑 지금이랑 나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여기 최저 임금은 얼마예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보통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결혼해요? 나는 여행자다. 그러니까, 그냥 스쳐 가는 사람. 잠시 스쳐 가는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잠깐 상상해 보는 의식이 필요하다. 어떨까, 우크라이나 대학생 올레나의 삶은.

"저는 88년생이라 잘 몰라요. 근데 저희 엄마 말로는. 소련이 붕괴하고 나라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바뀌었데요."
"최소 임금이요? 음…. 한 달에 최소 1000데브리나(약 15만 원) 정도?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 전까지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결혼하면, 대부분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서 같이 살죠. 그러다 보니 뭐 고부갈등도 있고…."


엄마가 해주는 시큼하고 달달한 보르쉬(비트 뿌리를 넣고 끓여 사워크림을 얹어 먹는 우크라이나식 붉은 수프)를 먹으며, 내가 네 나이 때는 벌써 네가 세 살이었다느니, 여자가 대학 가는 건 꿈도 못 꿨다느니, 소련 때는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았느냐느니 하는 오래되고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듣다가, 그래도 엄마 품 떠나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나름 만족하며 사는 삶. 한국의 삶과 많이 다르지 않다. 이토록 이국적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사람들 사는 건 비슷하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톨스토이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는 거겠지.

2012 유로컵 당시 리비우 시내
 2012 유로컵 당시 리비우 시내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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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차나 한 잔 마실까 해서 주방으로 내려갔다. 음울한 일본인 남자가 저녁으로 지은 닭백숙을 먹고 있다. 오늘도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갔나 보다.

"아까 그 스페인 할아버지 봤죠?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못하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여행은 어떻게 하는지. 하하!"

잠시, 이십대 후반인 일본인 남자의 얼굴이 물에 젖었다가 바싹 마른 종이처럼 건조하고 늙어 보였다. 어디서 봤더라. 이런 얼굴. 대학교 선배들에게서 본 것 같다. 이 수업 듣지 마. 학점도 잘 안 주고 어렵기만 해. 점수 쉽게 주는 걸 들어야지. 직장 상사한테서도 본 것 같다.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내가 회사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말이야. 아 쉽게 쉽게 가. 새로운 아이디어인 거 같지? 다 해 봤어. 안돼 안돼. 누군 그런 생각 안 해봤나? 다 해 봐도 안 되니까 쉽게 가자는 거야.

과거의 무용담만 가득한. 열정 없는. 쉬운 길만 찾는. 기대와 설렘 없는. 그런 얼굴. 내 얼굴. 학교생활이 지겨웠던 대학교 3학년 때의 내 얼굴. 멍청한 일만 준다며 분개하던 직장 4년 차의 내 얼굴. 마살라가 지겹다며 팬케익과 피자만 찾던 인도 여행 4개월 차의 내 얼굴.

"영어는 못해도…. 말은 잘만 통하던 걸요."

아직 우리에겐, 우크라이나의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렌다. 창고 문 앞에서 장교 차림으로 선 아저씨에게 "롱 리브 유크레인!(우크라이나가 영원하길)"을 외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이상한 식당이 있는 나라. 시민들의 시위로 헌법까지 바꿔낸 열정적인 나라. 러시아인 듯 유럽스러운, 우크라이나의 묘한 분위기가 가을바람처럼 차고 신선한 나라. 딸기가 많은 나라.

우크라이나도 오래 머물면, 지루해질까? 그때가 되면, 다시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야 할까? 새로운 곳을 찾고 또 찾다, 더는 새로운 곳이 없어지면, 그땐 어떡하지? 여행을 하고 또 하다, 여행 자체가 시시하고 쓸데없고 지루하고 피곤하게만 느껴지면, 그땐? 여행을 너무 오래 하다 보면, 나도 이 일본 남자의 얼굴처럼 건조해질까? 동유럽 어디 가나 똑같다며, 새로운 거 별로 없다며 시큰둥하고 달관한 자세로 여행을, 여행지를 대하게 될까? 호기심 하나 없이. 건조하고 무뚝뚝하게. 5년 차 직장인처럼. 졸업반 대학생처럼.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리비우에는 오래전부터 카페 문화가 발달했다. 커피와 함께한 생에 최고의 치즈케이크.
 리비우에는 오래전부터 카페 문화가 발달했다. 커피와 함께한 생에 최고의 치즈케이크.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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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 시장. 소녀가 조른다. 할아버지, 아이스크림 사줘요.
 리비우 시장. 소녀가 조른다. 할아버지, 아이스크림 사줘요.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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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두렵다. 이젠 좀 새로운 걸 보자고, 인도를 떠나 동유럽까지 왔는데. 이마저 지루해지면 그땐 어쩌나? 해답은 여행이 아니었나 보다. 새로운 장소가 아니었나보다. 태도인가보다. 수많은 곳을, 수많은 날을 여행한 '여행 베테랑' 일본 남자는 여행을 일상으로 만든 값으로 설렘과 호기심이란 가격을 치러버렸다. 호기심과 관심 없는, 열정 없는 여행은 어느 5년 차 직장인의 회사생활처럼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식상하다.

여행을 오래 했다고, 영어를 잘한다고 좋은 여행자는 아니다. 내 눈에는 골수 여행자인 일본 남자보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스페인 할아버지가, 호스텔 도미토리 룸이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인지도 모르는 올레나가 더 좋은 여행자로 보인다. 그들에겐,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태도인 호기심과 열정, 설렘이 있으니까.

우리의 긴 여행이 꿈만 같다는 올레나에게, 중간중간 여행 사진을 보내주기로 했다. 사진을 보낼 때마다 떠올려야겠다. 올레나의 붉은 두 볼. 여행자가 항상 간직해야 할, 그러나 잃어버리기 쉬운. 호기심 가득한 어린 두 눈.

리비우의 스카이라인
 리비우의 스카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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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리비우, #르비브, #우크라이나, #동유럽, #리차키프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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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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