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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뭔가 모순적이다. 그는 분명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은 죽음을 지향한다. 오전 6시 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 주변을 시찰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신다. 이후 수도꼭지를 수리하고 새 나사를 박고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는 명확하게 죽음을 원하고 있지만, 행동은 그와 정반대다.

<오베라는 남자?, 책 표지
 <오베라는 남자?, 책 표지
ⓒ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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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오베라는 이름의 남자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다. 인생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조연으로 삶을 살아가는 남자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진 속 배경처럼, 그저 자신이 부여받았다고 믿는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변화에 저항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더듬다 보니 영화 <플레전트 빌>이 떠올랐다. 영화 속 배경인 플레전트 빌은 완전 무결한 불변의 세계이다. 사람이 모여 살면 으레 일어날법한 갈등도 없고, 오로지 기쁨만 존재하는 마을이다. 플레전트 빌은 오베라는 남자처럼 색깔이 없다.

그들은 흑백의 삶을 산다. 하지만 흑백의 세상에 <플레전트 빌>의 주인공 데이빗과 제니퍼가 떨어지면서 완전 무결함에 균열이 일어나고, 종래에는 플레전트 빌에 사는 사람들 모두 색깔을 얻는다.

오베라는 남자도 색깔이 무엇인지 느꼈던 적이 있었다. 소냐라는 여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소냐는 모든 색깔의 물감을 담은 팔레트였다. 그는 우연히 야간 기차 청소부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색깔에 물들기 시작했다. 소냐는 세상의 배경처럼 살아왔던 오베를 발견해낸 것이다. 오베는 그렇게 세상의 배경이 아니라 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소냐와 함께 있다고 해서 오베라는 남자가 색깔을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니었다. 소냐 곁에 있었기 때문에 색깔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소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베라는 남자는 다시 색깔을 잃었다. 그는 소냐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이 오전 6시 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을 시찰했다. 하지만 그가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는 동안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다.

그는 완고했으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트레일러를 후진할 수 있어야 하고, 라디에이터의 증기를 스스로 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으며, 그는 평생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느긋한 인생을 즐기라는 말과 함께 인생의 3분의 1을 일해 온 곳에서 해고됐고, 주변 사람에게 구제불능이라고 여김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내 소냐 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상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 죽음임에도 그는 자신이 지켜왔던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자살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흩뜨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자살하려는 계획은 계속 미뤄진다.

그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으면서부터 그의 원칙보다는 소냐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자살 이후 소냐의 곁으로 갔을 때 소냐가 그것을 좋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웃을 도와주는 일,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는 일, 전에 싸웠던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 등을 계속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살지 않는다. 오베라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체득해간다.

오베라는 남자는 시간이 흘러 끝내 소냐의 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은 그가 원했던 것처럼 조촐하게 끝나지 않는다. 3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는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했지만, 그의 삶은 어쩌면 자신이 증오했던 하얀 셔츠의 남자들처럼 편협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색깔을 얻었다. 그의 삶은 대부분 흑백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죽음은 오색찬란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란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세상의 최우선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원칙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우리의 언어대로 그들의 언어를 마음대로 번역한다. 이러한 세상은 아비규환이며, 오베라는 남자처럼 자살이란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오색찬란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베라는 남자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우리의 생각으로만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이야기가 녹아있다.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얽히고설킬 때, 오베라는 남자가 깨달은 소통이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과 연대는 그만큼 힘이 세다. 구제 불능이라고 여겼던 오베라는 남자가 결국에는 변화한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베크만 씀/ 다산책방/ 2015.5/ 정가 1만 38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베라는 남자 (아마존 소설 1위 기념 시즌 한정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다산책방(2015)


태그:#오베,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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