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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한 성당
▲ 오스트리아의 한 성당 오스트리아의 한 성당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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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한 성당이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날 나는 성당 안, 한쪽 구석에서 한참을 울고 있었다.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이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힐끔이라도 보았다면 그것은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었음을 눈치 채지 못할 이가 없을만큼, 나는 절실했다.

물기 없는 푸른 공기가 늦은 오후의 풍경들에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하는 무렵까지, 그날의 세상은 그렇게 절대자의 심연 속에 심장이 온통 녹아내리고 있었다. 결국 종탑의 종소리가 낮게 울리고 마치 부식된 쇳조각처럼 긴 울음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제야 겨우 고개를 가누고 밖으로 나오는데, 그 순간 한 낯선 이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간소한 옷차림에 짙은 베이지 색의 낡은 천 가방을 어깨에 둘러 맨 노인이었다.

낯선 외국인 남자, 그의 눈빛에서 읽은 감정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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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큼 성큼, 신중하리만큼 느린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다.

가슴이 절실한 무언가로 가득할 때에야 가능한 눈물, 그것이 진심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낯선 타인의 얼굴 앞에서,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얼어붙은 듯 꼼짝 없이 서 있었다.

순간, 그가 독일어로 무언가의 말들을 건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국의 언어로 이어진 짧은 문장들이, 그렇게 잠시 동안 차가운 공기들 사이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A 와 Z, ㄱ과 ㄴ 으로 통역되지 않는 언어들, 그러나 깊은 바다의 물결처럼 너울거리듯 가슴을 향해 걸어 들어와 햇살처럼 따뜻한 이야기들로 가늠되고 이해되는 언어들이….

그랬다. 그가 성당 안의 내 울음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나를 차마 방해 할 수가 없어, 본인의 기도를 마치고서도 내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을 앞질러 살아 온 자가 그 길을 뒤이어 가는 이에게 "지금의 그 고통이 무엇이건 잘 이겨내기를, 그리고 생의 모든 것이 제 갈 길 대로 갈 것이니 그렇게 무너지도록 아파하지 말기를"하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었을 게다. 나는 물리적인 언어가 아니라 그 순간의 그의 얼굴로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당 안 기도실
▲ 성당 안 기도실 성당 안 기도실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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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알록달록 했던 세월들이 회색과 원색의 그림자들로 미끄러져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알지도 못하는 생명들과의 공명(共鳴)이 길 위, 어디에서든 불쑥 불쑥 찾아오곤 했었다.

길을 잃은 자가 더이상 타인이 아니라 그 옛날의 혹은 지금의 나의 모습일 수 있듯, 그의 고통 또한 어스름하게나마 가늠이 되고 아릿해지는 것. 비록 동질의 아픔은 아니나 잠시나마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따뜻한 착각.

내게도 4월의 눈송이 만큼 그런 소중한 순간들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날의 그 노인의 눈빛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겠다"는, 그리고 "감사하다"는 인사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의 무언의 대답에 짧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진 어느 길들 사이로 그는 사라져갔다.

성당 인구의 건축
▲ 성당의 입구의 건축 성당 인구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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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당혹스러워했던 나의 눈빛이 도리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 나는 이미 한참을 걸어 나온 길들을 자꾸만 뒤돌아보고 있었다. 진심을 전달하기조차, 그 진심을 그대로 전해받기조차 어려운 일을, 단순히 험한 세상 탓으로 돌리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그의 마음에 나는 한없이 미안해졌다.

장 그르니에의 문장, 내 마음에 다가오다

독일의 한 성당 조각상
▲ 독일의 한 성당 조각상 독일의 한 성당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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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여러 꽃 가게들 중 어떤 가게의 간판에 <보로메 섬으로!> 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겠는가! 나는 거기에서 <가장 아득한 곳>으로부터의 어떤 부름과도 같은 것을, 신기루의 매혹 같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마죄르 호숫가(보로메 섬을 감싸고 있는 호수) 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그러한 영광의 대용품들을 찾으면서 사는 수밖에!

한 번의 악수, 단 하나의 지혜의 표시, 한 번의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그토록 가까이 있는, 가혹할 정도로 가까이 있는 나의 보로메 섬들이리니." - 장 그르니에 <섬(les Iles)> 중에서

그날, 나는 장 그르니에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보로메 섬을 다녀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보로메 섬에서의 길들 사이로 진정한 소통이란 물리적인 언어가 아니라 가슴을 통해야 한다는 한 조각의 진실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차에서 바라본 한 풍경
▲ 기차에서 바라본 한 풍경 기차에서 바라본 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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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동일한 언어로 맴도는 이야기들조차 마른 낙엽처럼 공기속을 돌다가 땅 위에 무심히 흩어져 버리는 이유는, 그리하여 무표정한 얼굴들 만을 가득 남기고, 우리를 한 없이 쓸쓸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보다 나와 너 사이에 너무나 야위어진 마음들 때문일 것이다.

영어로 소통을 의미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나누다'를 의미하는 'Communicare'이라고 한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데에 바쳐지는 노력들을 굳이 가늠해 보지 않더라도,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

길 위의 풍경
▲ 길 위의 풍경 길 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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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길 위에서 그토록 깊은 울림을 전하고 받을 수 있었던 건 왜일까. 나누어진 것,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해진 게 단순한 언어들 사이의 윙윙 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서로 공명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리라.

여행을 다니다 보면 형편없는 외국어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하기 쉽지 않았다는, 그럼에도 여행이 한 달 혹은 석 달을 넘어서는 이들을 간혹 만난다. 그리고 단합이라도 한 듯 그들 사이에 한결 같은 마지막 말은 "오기를 참 잘 했다"는, "언어가 부족하더라도 이렇게 여행이 이어지더라"는 것이었다.

길 위의 풍경
▲ 길 위의 풍경 길 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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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여행만이 감춰 둔 어떤 몰약 같은 비밀이 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일상에서 우리를 외롭게 했던 것들, 여행 보다 훨씬 더 미지의 낯선 세계에 홀로 와 있는 듯한 그 절망감을 안겨 주었던 이유들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한 번의 악수, 단 하나의 지혜의 표시, 한 번의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그토록 가까이 있는, 가혹할 정도로 가까이 있는 나의 보로메 섬들이리니."

그러게나 말이다. 내게도 알 수 없는 일.

나의 보로메 섬들아!

덧붙이는 글 | 지난 2012년, 약 1달 간의 유럽 여행 중 겪은 어느 한 경험을 쓴 에세이 입니다.



태그:#유럽 여행 ,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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