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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빌려 쓴 엔화가 회사 집어삼키고 말아

입만 열면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 우산이 돼 주겠다는 은행, 과연 진심일까? 은행의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은행은 더 이상 어려울 때 우산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는 은행들의 사회적 책임 강화 요구로 이어졌다. 시중 은행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민과 중소기업 등 취약계층을 위한 '우산'이 되겠다고 했다. 중소기업 등 자금이 절실한 곳에 제때 자금을 공급하는 경제의 핏줄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르다. 중소기업은 여전히 은행한테 '을'일 수밖에 없다.

부평구 산곡동에 소재한 자동차부품 2차 벤더 D사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 회사 사장 G(67)씨는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자동차에서 1982년까지 근무했고, 이후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1995년까지 일했다. 그는 1995년 3월 한국지엠에 자동차 내장재를 납품하는 D회사를 설립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에도 G 사장은 직원에게 월급을 제 날짜에 안 준 적이 없을 정도로 회사를 견실하게 운영했다. 그러나 D회사는 올해 파산을 준비하고 있다.

G 사장은 2008년 8월께 부평구 청천동 임차공장과 계양구 효성동 임차공장을 부평구 산곡동 공장으로 통합하면서 공장 매입 자금을 K은행으로부터 엔화를 끌어다 마련했다. 1억 8000만 엔을 빌렸는데, 당시 환율(100엔=약 780원)로 약 14억 원이었고, 이자는 연3.5~4%였다.

당시 부평공단 공장 임차료가 3.3㎡당 2만 5000원 정도였기에 산곡동 공장(약 1450㎡)을 임차할 경우, 월 임차료만 1100만원이었다. 이에 비해 당시 엔화는 이자 4%를 적용해도 월 460만 원 정도라 저렴하다고 여겨 대출로 공장을 매입한 것이다.

그 일로 회사가 파산에 이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G 사장이 대출을 받은 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했고, 2009년 세계경제는 금융위기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2009년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엔화 가치가 크게 상승했다. 100엔당 780원하던 게 2009년 1월 100엔당 1546원으로 치솟았다. 2010년 4월이 돼서야 100엔당 1200원대로 하락하면서 안정세를 찾는 듯했으나, 다시 수직 상승하기 시작해 2011년 10월 1500원대를 기록했다. 2012년 비로소 1300원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뒤 2013년이 돼서야 1100원대로 떨어졌다.

엔화 가치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D사는 원금과 이자 상환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월 460만 원 내던 이자만 최대 1500만 원대로 뛰었다. G 사장은 빚이 늘더라도 회사 매출이 늘어 갚을 수 있다면 버틸 생각도 했지만, 한국지엠의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서 회사 매출로는 늘어나는 이자 상환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G 사장은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G 사장은 "우리 회사는 2차 벤더다. 한국지엠에 납품하는 1차 벤더의 하청을 받아서 납품하는데, 한국지엠의 생산물량이 줄어드니까 1차 벤더에서 우리한테 납품하는 양이 현저하게 줄었다. 생산물량이 많으면 1차 벤더가 2차 벤더에 넘기는데, 자신이 받는 물량이 줄어드니 우리한테 주문하는 게 자연스럽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경매에 넘기면 은행도 손해인데…"

공장을 운영할수록 빚만 늘었다. 2013년 12월이 됐을 때 K은행으로부터 빌린 엔화의 원금과 이자만 한화로 23억 원이 넘었다. 여기에 12월 말에는 국세와 지방세가 밀려 회사에 가압류가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회사 운영자금으로 인천신용보증재단과 신용보증기금에서 차입한 돈, 임금 지급을 위해 근로복지공단에서 차입한 돈을 더하면 G 사장이 갚아야할 돈은 25억 원을 훌쩍 넘었다.

이에 G 사장은 회사를 정리하기로 하고, 공장을 매각하기로 했다. 다행히 매수자가 등장했다. 매수자는 산곡동 공장 부지를 24억 원에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공장이 24억 원에 매각되면 채권단 빚과 세금, 체불임금 등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K은행이 D회사 공장 부지를 법원경매에 넘겨버린 것이다. G 사장은 K은행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매수자가 나타난 만큼 매각이 성사되면 빚을 다 갚을 수 있으니, 경매신청을 취하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K은행은 규정대로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인천지방법원은 매각물건에 대해 감정평가를 실시했다. 감정가는 약 23억 원이었다. 평균 낙찰률 70%를 적용하면, 16억 원 대로 떨어진다.

이와 관련해 G 사장은 "답답했다. 16억 원에 낙찰될 경우 1순위로 체불임금 등을 제외하면 K은행이 가져갈 돈은 14억 원이 안 된다. 이에 비해 매각이 성사되면 K은행은 최소 21억 원 이상을 가져갈 수 있다. K은행 입장에서도 경매보다는 매각이 더 이득이다. 그런데도 얘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K은행이 경매를 신청하자, 매수자는 매입 의사를 철회했다. 공장 부지가 낙찰되면 G 사장은 법이 정한 순서에 맡기면 된다. 낙찰된 돈을 채권단 순서대로 가져가고, 나머지 못 갚는 부분은 회사파산과 개인파산을 신청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G 사장은 회사를 정리하더라도 그동안 같이 일했던 직원들과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고 했다. 비록 자신이 엔화를 끌어다 쓴 게 화근이 됐지만, 최대한 그들에게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택하고 싶었던 것이다.

2차 매수자 등장... 은행, 매각으로 입장선회

자포자기하고 있던 순간에 2차 매수자가 등장했다. G 사장으로 K은행을 찾아가 다시 하소연했다. 매수자는 경매와 가압류만 해결해주면 24억 원에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채권단 중 임금 채권단도 일부 채권을 양보했다. 인천신용보증재단과 신용보증기금도 채권을 일부 양보했다. 이들은 G 사장의 진정성을 믿었다. 매각이 이뤄지면 매각대금이 G 사장 계좌가 아닌 K은행으로 바로 입금되게 하겠다고 K은행을 설득했다.

그러나 K은행은 회사 규정대로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G 사장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규정대로 하겠다는 입장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G 사장과 함께 매각에 나섰던 부동산중개업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은행 규정이라고 하지만, 은행이 어느 정도 유연성을 발휘하면 피해자를 줄이고, 은행 역시 원금 대부분을 상환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시사인천>이 이를 취재하고 있을 무렵인 지난 12일 G 사장으로부터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K은행이 경매가 아닌 매각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는 소식이었다. 매각이 진행되고 손에 쥐는 것은 한 푼도 없었지만, G 사장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물론 아직 확정 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경기가 호황일 때 돈을 가져다 쓰라고 안달이고, 경기가 불황국면으로 접어들 땐 대출자금을 회수하기 바쁘기 마련인 게 은행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각 은행들이 중소기업과 서민을 위한 은행이 되겠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은행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 다시 묻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은행, #중소기업, #갑을관계, #엔캐리, #사회적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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