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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대략 400년 전후에 이탈리아에서 살다 죽었던 두 남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사람은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이름 없는 시골뜨기이며, 다른 사람은 과학자와 대학교수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인사이다. '가방끈'과 사회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건방진 책' 때문에 말년을 망쳤던, 종교재판의 죄인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첫 남자 도미니코 스칸델라라(1532∼1599)는 본명보다는 메노키오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인구 600~700명의 고향에서 목수, 제분업자, 방앗간 주인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마을 이장과 교회 교구 행정관직을 맡았던 시골 유지였다. 부인과 11명의 대가족을 부족함 없이 부양할 정도로 경제기반도 튼튼했고, 당시 외딴 시골마을에서는 드물게 스스로 공부하여 라틴어 기도문을 암송할 정도의 교육 수준을 갖춘 유식쟁이이기도 했다.

잘 나가던 메노키오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52세 때였다. 그는 성경과 가톨릭의 교리에 어긋나는 불경한 발언으로 마을 사람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1584년에 동네 사제에게 고발되어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신앙 고백을 위해 신부님을 찾는 것보다는 나무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가 더 위대하다."
"예배 의식과 법정 언어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이 이 세상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석방 후에도 이런 위험한 세계관을 전파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메노키오는 15년 후에 다시 체포되어 결국 67세의 나이로 화형 당했다.

메노키오 재판의 하이라이트는 시퍼런 (종교)권력에 무릎 끓지 않은 그의 용기와 양심이었다. 무식한 시골 중늙은이가 우주 탄생의 비밀과 종교 생활에 관한 급진적인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종교 재판관은 "배후와 공범자를 불어라"고 그를 겁박했다. 고문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메노키오는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들"이라고 맞섰다.

그는 금서, 여행기와 연대기, 이슬람 코란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석하면서 독특하고도 독창적인 세계관과 우주관을 키웠다. 말하자면, 메노키오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인쇄 혁명의 세례를 받아 스스로 깨우친 민중 지식인의 전형이었다(카를로 진즈부르그, 『치즈와 구더기: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참조).

메노키오의 역사적 복권을 위하여

두 번째 남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이다. 예순이 넘은 메노키오가 고문과 재판으로 고생할 때 30대 초반이었던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 대학 수학교수로 출세길에 들어섰다. 메노키오가 불타죽던 1599년에 갈릴레오는 애인(마리아 감비나)을 만나 단란한 가정의 성을 쌓았다. 야심에 불타는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선하여 원로원에 선물했고,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별들에게 '메디치 가문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 당대를 호령하던 권력자에게 아부했다. 이런 반짝이는 처세술 덕분에 그는 피렌체 대공의 수학자 겸 피사 대학교의 수학 종신 주임 교수라는 부와 명예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잘 나가던 갈릴레오도 하필이면 52세가 되던 1616년에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종교재판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유명세와 권력자들과의 인맥에 힘입어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주창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경고 조치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633년에 갈릴레오는 <두 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1632)에서 금지된 지동설을 전파했다는 죄목으로 종교재판에 다시 얽혔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유죄 판결을 받은 갈릴레오는 법정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고 허튼 역사가들이 없던 명대사를 지어내어 그를 과학혁명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메노키오 사례와 비교되는 갈릴레오 재판의 하이라이트는 권력 앞에 쫄은 과학자의 초라하고 비굴한 태도이다. 재판관이 <대화>에 서술된 관련 부분을 읽어주고 "당신은 언제부터 지동설을 믿었는가?"라고 다그치자, 갈릴레오는 "나는 단 한 번도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지지한 적이 없으며 현재도 그렇다. 만약에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렇게 오해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헛된 야심과 순진한 무지 탓"이라고 옹졸하게 변명했다.

시골 촌부 메노키오가 "내 머리에서 나온 위험한 사고방식은 전부 나의 것"이라고 떳떳이 밝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대의 유명한 먹물 지식인 갈릴레오는 자신이 책에서 언급하고 증명했던 과학적 진리(지동설)를 손바닥 뒤집듯이 부정했던 것이다.

재수 없게 종교재판의 덫에 걸렸던 불쌍한 두 늙은이들의 '죽음 이후의 삶'은 매우 달랐다. 재판 후 금서 목록에 올랐던 <두 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는 1835년에 해제되었고, 그보다 훨씬 지난 1983년에 갈릴레오는 교황의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사면·복권되었다. 그러나 빅뱅 이론에 버금하는 우주 탄생의 비밀을 혼자 깨우치고 가톨릭의 낡은 관행을 비판했던 메노키오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역사의 죄인이며 억울한 패배자로 남아있다. 종교 개혁과 프랑스 혁명 같은 역사적 변혁과 진보에도 불구하고, 힘없고 가난한 민중의 헌신과 희생을 교황으로 대변되는 권력자는 먼지처럼 귀찮고 하찮은 것으로 침묵·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남자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획득할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책을 (잘못) 읽거나 서술하는 행위는 당사자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위험천만하다고? 동양 철학적으로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안다)'의 무거운 나이에 해당하는 오십대(현재의 386세대)가 공연히 공권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나섰다가 괜한 신세를 망친다고? 아니다. 메노키오와 갈릴레이의 사례로부터 우리가 새삼스럽게 배우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권력의 시대착오적 집요함과 반성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다.

그렇다. 메노키오를 위한 국가와 권력은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옛날 옛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2013년 지금 이곳의 문제로 고쳐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두려움 없이 실천했던 메노키오는 이 땅의 양심수, 내부고발자, 군의문사 진실추적자 등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메노키오의 역사적인 복권은 낡은 시대를 견디며 저항하는 '또 다른 메노키오'인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육영수 씨는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현재 중앙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치즈와 구더기, #메노키오, #갈릴레오 갈릴레이, #종교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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