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 자신은 어렸을 때 소위 환빠였던 시기를 지나 요즘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많이 벗어나 반일이나 친북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다. 그러나 국민 다수에게는 여전히 민족 + 역사는 굉장히 공감을 얻는 키워드고, 그걸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홍보로 유명한 서경덕 교수가 참여한 '한국사 지킴이 100만 대군'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민족주의와 역사가 결합해 실제 교육환경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평소 나는 한국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학생 다수가 모른다는 조사를 통해 역사교육의 현실이 심각하다는 TV 뉴스의 진단에 동의하며, 역사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공유해온 글 속 '대군'을 동원해 지키려는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에 대해서는 좀체 동의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러한 시도가 과연 역사교육의 정상화(正常化)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며, 민족주의를 자극해 역사를 '지킨다'는 것이 참 당황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기자 말

한국사의 수능 필수과목 지정은 과연 역사교육의 정상화에 도움이 될까?

최근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있어 관련해 공청회도 열리고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다수의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한바에 따르면 찬반 모두 합의가 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현재 중-고등학생들은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우선 역사교육이 파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10년 전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400명이 넘는 학생들 중에 30명이 안되는 국사-근현대사 파였다(심지어 세계사도 공부하는 손에 꼽히는 학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암기할 부분이 많은 역사 과목은 수능 공부에 안그래도 머리가 아픈 학생들로서는 회피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한국사의 수능 필수과목 지정은 학생들이 회피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는 것이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사실 역사교과의 수업시수 자체는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매우 높은 편이다(초등학교 부터 한국사만 총 289시간). 또한 10여개의 고교 사회과목 가운데 필수적으로 학생들이 들어야 하는 수업은 한국사 밖에 없다. 이 두가지 사실은 국-영-수에 비할 수는 없지만 역사 교과가 양적으로는 기준(그런게 있다면)에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타당한 질문을 해야한다. 그럼 양을 늘려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구나?

사실 교육계의 모든 문제는 하나로 결론 지어진다. 서열화된 학벌사회 안에서 최상위 스펙을 소유하기 위한 입시 전쟁! 역사 교육이 그 동안 질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매번 학생들의 역사 인식 부족 논란에 시달렸던 것도 입시에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는 점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단순히 수업 시수 좀 늘리는 것과 다르게 수능 필수과목 지정은 단기적으로 학생들이 한국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명확하게 인지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 교육의 입시화는 단기적인 목표를 보고 추진하기에는 너무 많은 부작용이 우려된다.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이 불러올 문제들

가장 먼저 지적되는 부분이 사교육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현행 입시교육은 다양한 부작용을 가져왔고, 대표적으로 공교육의 축소와 사교육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역사교과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되면 사교육 시장은 좋은 먹잇감 하나를 추가로 얻을 가능성이 높다. 내신 관리를 위해 줄넘기 과외도 시킨다는 요즘, 역사 '점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학부모들이 지갑을 열어야 하는 것일까? 최근 동네 학원들이 줄고 사교육 시장이 한파라는 기사가 있던데, 사교육 시장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구직난을 조금이나마 해소하자는 목적이 아니라면 문제가 불 보듯 뻔해보인다.

두 번째로 지적되는 부분은 한국사를 제외한 다른 사회과목과의 밸런스 문제다. 사회탐구 영역에서 두가지 교과를 선택하게 하는 현행 입시제도 안에서 역사 교과를 필수로 둔다면, 다른 사회과목들의 비중 축소는 불가피하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데, 이미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교과의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우려 또한 존재한다. 국-영-수-역-탐구, 5과목 체제로 변화한다면 학생들의 부담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역사교과가 독립되어 나온다해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한국사-세계사 통합, 다양한 체험, 방문 학습 등)의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시험만 강제로 보는 것 아니냐는 것인데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타당성 있는 우려다.

세 번째로 지적되는 부분은 역사 교과의 암기화다. 이미 역사 교과는 암기 과목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역사 교과는 스스로 '암기과목'임을 부정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 교과는 매우 흥미로운 과목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 전래동화와 같은 옛날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곤 했다. 그러다 성장하면서 외워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으로 '역사'가 변화하면서 재미가 없어졌을 뿐이다. 그런데 역사 교과가 수능 필수과목이 된다고?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문제집(문제만 가득한!)을 풀어야 하고, 요점 정리된 참고서를 외워야 할 것이다. 게다가 대학을 가장 상위에 두고 대학을 향해 일렬 종대로 선 교육 구조를 가진 우리 현실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은 영단어 외우듯 역사적 사건 년도를 외워야 할지 모른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공청회에서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르치는데 이러한 역사교과의 암기화가 부정적일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한국사회과교육학회 박형준 교육과정위원장은 단순 암기과목이 된다면 "역사에 대한 실질적 흥미는 오히려 반감되고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더 요원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작지점으로 돌아가 논란을 촉발시킨 한국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단순히 '남침' 또는 '북침'이라는 단어에 대한 지식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면, 지식 암기가 아니라 사고력과 판단력을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의 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긴 호흡을 가지고 역사교육을 바라봐야!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공청회에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암기 내용을 대폭 축소하고 현장·창의적 교육 위주로 바꿔 생생한 역사인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정부 여당과 다수의 새누리당 의원들은 필수과목화에 찬성). 원론적일 수 있지만 하태경 의원의 말이 정답이다. 우리 역사 교육은 지나치게 숫자(년도)에 집착하고 이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대체 쓸모없는 "태정태세문단세..."는 왜 외워야 한단 말인가?). 역사교육을 흥미롭고 생생하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하며, 그러기 위해 정부와 연구자, 교사들은 교과서를 비롯한 교수 방법과 교육환경 개선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해야 한다.

더불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교육의 전망을 좀 멀리 봐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어 연속성이 전혀 없다. 역사교육의 경우도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강화 기조를 보이다가 2009년 개정 교육과정(수능 사회탐구 영역 2과목 선택, 집중이수제)을 통해 거꾸로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단기적인 결과에 연연할 수록 학생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역사교육은 실질적으로 후퇴를 거듭할 것이다. 긴 안목을 가지고 역사교육 전반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요구될 때다.


태그:#역사교육, #수능, #한국사, #민족주의, #교육제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