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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혼 섬에 도착해 짐을 풀고 숙소 뒤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 경사가 급한 언덕 때문에 가려졌던 시야가 탁 트이면서 호수 위에 솟아있는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부르한 바위였다.

초현실적 분위기의 부르한 바위.
 초현실적 분위기의 부르한 바위.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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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시베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책으로 된,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기들을 수없이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바이칼 호수와 부르한 바위의 사진도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그만 숨이 멎어버리고 말았다.

바람에 요동치던 수면이 그 물결 그대로 바위에 닿아 얼어붙어 있었다. 관광객은 물론 주민도 몇 없는 섬 안에서 그 순간 그 곳에는 S와 나 둘 뿐이었다. 주변에는 다른 생물의 흔적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흔한 새소리나 풀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모두 멈추고 S와 나만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부르한 바위는 이 일대에 자치공화국을 이루며 살고 있는 부랴트족이 믿는 샤머니즘의 최고 영지이다. 그들의 조상인 칭기즈칸이 아래에 묻혀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샤머니즘이나 칭기즈칸의 전설 중 어느 것도 믿지 않는 나지만, 바위에서 신비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올혼 섬의 오방색천 감은 기둥들.
 올혼 섬의 오방색천 감은 기둥들.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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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와 나는 올라온 언덕의 반대쪽으로 내려가 바위 가까이에 가보기로 했다. 모래사장을 걷는 잘박거리는 우리의 발소리가 멈추자 무언가 퐁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뭍과 닿아 있는 호수의 얼음이 녹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방울지며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 사이로 졸졸대는 소리도 섞여들었다. 언덕 위 장엄한 풍경과 대비되는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였다. 처음으로 듣는 봄이 오는 소리였다.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호숫가 얼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호숫가 얼음.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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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에서는 봄이 마냥 좋은 계절이 아니라고 한다. 눈 위를 달리는 건 그나마 낫지만 그 큰 눈이 녹아 질퍽해진 땅은 흡사 늪과 같아 다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올혼 섬 역시 일 년에 두 번, 바이칼 호수가 차가 달리기에는 얼음이 약하고 배가 다니기에는 물이 부족한 가을과 봄 일주일 정도씩 고립이 된다.

그렇게 고립된 섬 안에서 S와 함께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상상해 보았다. 상처가 고름을 내며 아물어가는 시간,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시간. 그 시간은 길고 지난해 보일지라도 꼭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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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차 시간이 정해져 있는 우리는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도리어 섬에 갇혀 기차를 놓칠까봐 겨우 사흘 만에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다. 뭍은 조금씩 녹아가고 있지만 수심 깊은 호수는 아직 꽝꽝 얼어 있었다. 그 얼음 위를 달리는 승합차 안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된 몇 개월간의 여행 준비, 다툼 그리고 이별까지….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이 끝나고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치유의 여행 끝에는 찬란한 여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태그:#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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