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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가까운 날, 나는 우연히 통영에 갔다. 한파가 와서 따뜻한 남쪽 항구인 통영조차도 영하 8도까지 떨어져 매우 추웠고, 동피랑 벽화마을에 오르니 찬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예쁘고 따뜻한 벽화들,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뜻밖의 그림들을 감상하고, 통영항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옆 작은 카페에서 통영 빼때기죽도 한 그릇 먹고 내려오다 만난 벽화, '어머니전'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다. 굵은 주름과 흰 머리, 목도리를 머리까지 쓰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지그시 내려 무릎 위에 있는 뭔가를 보고 있는 듯한 어머니 모습과 그 아래 쪽에 쓰인 글귀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시인이다
▲ 어머니 학교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시인이다
ⓒ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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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피랑) 같은 삶을 가파르게 살아온 어머니들의 인생 자체가 굴곡진 소설과 다르지 않듯이, 생명에 대한 깊은 사랑과 삶의 깨달음을 주름살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풀어내는 모든 어머니들도 또한 시인이 아니겠는가? 마침 그때 나는 이정록 시집 <어머니 학교>를 읽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물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눈물이 마르면서
고무신 안쪽에 자동차바퀴가 보이더구나.
그 껌정고무신이 타이어표였거든.
바퀴 안에 진짜라고 써 있더구나.
애들 놔두고 진짜 죽으려고?
그래 얼른 신발을 다시 꿰찼지.
저수지 둑을 벗어나 집으로 오는데,
신발 속에서 진짜, 진짜, 울먹이는 소리가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더구나.
진짜 애들한테 떳떳한 어미가 돼야지, 맘먹고는
이날까지 왔다. 글자 하나가 사람을 살린 거여.
넌 글 쓰는 사람이니께 가슴에 잘 새겨둬라.
내 말을 믿으면 진짜 글쟁이고
안 믿으면 그 흔해빠진 똑똑한 아들만 되는 거고.
근데, 어미가 니들 놔두고 진짜 죽을 생각을 했겄냐?
이런 거짓부렁이를 소설이라고 하는겨.

- <소설>(어머니학교 56)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시인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신을 벗어두고 물로 뛰어들려 하다가, 벗어놓은 고무신 안에 새겨진 '진짜'라는 글자를 보고, '애들 놔두고 진짜 죽으려고?' 하며 정신 차리는 것이, 어머니의  질긴 인생길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 땀에 찬 발이 고무신 안쪽과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를 '진짜, 진짜, 울먹이는 소리'로 여기며 걸어가는 장면이 환한데, 말들을 굴려가며 삶의 한 대목을 참으로 절실하게 풀어내고 있다. 나이 들어 장성한 아들딸에게 우연한 시기에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을 '옛말' 하듯이 담담하게 내놓은 시가 눈물겹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어려운 시기의 슬픔을 씌우려고 하지 않는다. 듣는 아들이 가슴 아프지 않도록,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도록 '거짓부렁이'라고, '소설'이라고, 눙치면서 말을 돌린다.

이 대목은 해학을 통해 슬픔을 안고 품었던 우리 전통 정서와 맞닿아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고 했던 민요는 그러므로 원망과 저주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슬픔을 이겨내려는 해학으로 봐야 한다. 웃음으로 슬픔을 감싸 안으려한 우리 어머니들의 낙천성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시집 <어머니 학교> 서문에서 이정록은 2010년 11월 9일 새벽에,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잠에서 깨었다고 술회한다. 오른손 하나만 어머니로 변하지 않고, 쏟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적기 시작했고, 그래서 '태어난' 시집이 <어머니 학교>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말씀을 한 서른 편쯤 쓰고 나서, 시인을 낳아준 어머니가 한 분이 아니고 수천수만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아주 옛날에도 나를 낳으셨고 지금도 출산 중'이며, '앞으로도 나는 계속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주는 의미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어머니는 육신으로 한 번 나를 낳으셨지만 어머니의 삶과 말씀과 지혜와 사랑을 통해 시인은 시로 거듭 '태어날' 것이고, 거듭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어머니 학교>라는 시집 이름도 정작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아들이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았을 어머니께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제자로서 바치는 찬사가 아닐까?

깨달음과 지혜의 학교, 어머니

이정록 시인의 전 시집인 <의자>에서 이미 어머니가 깔아주셨던 지혜의 말씀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어머니 학교>는 온전히 시인의 어머니 이의순(73) 여사의 말씀만으로 시집을 꾸렸다. 모두 72편의 시들이 어머니의 질그릇 같은 말씀으로 이루어져서, 작은 시내 같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푹 삶아지는 게 // 삶의 전부일지라도 // 찬물에 똑바로 정신 가다듬고는 // 처음 국수틀에서 나올 때처럼 꼿꼿해야 한다.'('국수' 어머니학교 2)며 정신이 바짝 나게 하고, '실패'(어머니학교 20)라는 시는 실패가 가진 중의적인 의미(실을 감는 패인 실패와 성공의 반대인 실패)를 이용한 점도 훌륭하지만 시 속에 담긴 지혜도 풍성하다.

'실 꾸러미 속에 아무 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 실속 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거 그중 실속 있는 겨 /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 너 한 번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 실패한 인생이라는 겨'

'전망'(어머니학교 30)도 새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래서 둥지가 자꾸 낮아진다는 관찰을 통해 어머니 특유의 깨달음을 전한다.

'로열층이 어떻고 경치가 어떻고 으스대지만 / 전망도 한두 번이면 텔레비전만도 못한 거여. / 사람만큼 좋은 전망이 어디 있겄냐? / 새는 눈이 없어서 낮은 곳에 둥지를 틀겄냐? / 진짜 전망은 둥지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고 / 있는 힘 다해, 날개 쳐 올라가서 보는 거여.

전망 좋은 최고급 아파트를 성공의 상징인 것처럼 여기는 세태에 일침을 가한다. 전망이란 고정되고 굳어버린 풍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 다해 날개 쳐 올라간 곳에서 보는 뿌듯한 생동감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만큼 좋은 전망이 없다는 구절도 전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

생명 사랑의 학교, 어머니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찍은 '어머니전' 사진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찍은 '어머니전' 사진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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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가까이 했던 어머니의 깊은 생명 사랑도 시 곳곳에 편편이 박혀있다. 풀을 맬 때도, 어머니는 해를 등지고 앉아서 밭을 매는데, 풀들이 깨지 않도록 그늘을 드리운다는 게 그 이유다. 풀들이 깨면 '몸을 다 드러내는데 얼마나 아프겄냐?'는 것이다. - '풀'(어머니학교 28)

'티브이 잘 나오라고 /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 그것 좀 눕혀놓으면 안 되냐? /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 '물'(어머니학교 12)

'땀 찬 소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 따가운 햇살 쪽에 서는 것만은 잊지 마라. / 소 등짝에 니 그림자를 척하니 얹혀놓으면 /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장하겄냐?'- '그늘 선물'(어머니학교 21)

새에게도, 일하고 돌아오는 소에게도 무심하지 않아서 작은 선물을 주려는 어머니 마음이 따뜻하다. '사랑'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다음 시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하고 있다.

편애가 진짜 사랑이여.
논바닥에 비료 뿌릴 때에도
검지와 장지를 풀었다 조였다
못난 벼 포기에다 거름을 더 주지.
그래야 고른 들판이 되걸랑.
병충해도 움푹 꺼진 자리로 회오리치고
비바람도 의젓잖은 곳에다가 둥지를 틀지.
가지치기나 솎아내기도 같은 이치여.
담뿍 사랑을 쏟아부을 때
손가락 까닥거리는 건 절대 들키면 안 되여.
풀 한 포기도 존심 하나로 벼랑을 버티는 거여.
젖은 눈으로 빤히 지릅떠보며
혀를 차는 게 그중 나쁜 짓이여.
- '사랑'(어머니학교 29)

편애가 진짜 사랑이라 못난 벼 포기에다 거름도 많이 하지만, 사랑받는 대상이 사랑 받는 줄 모르게 사랑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풀 한 포기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니까. 하물며 사람이랴! 측은한 듯이, 불쌍한 듯이 젖은 눈으로 보거나 혀를 차는 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의 표현임을 힘주어 말한다.

무너져 가는 농촌을 지키는 농민들에게 국가가 지원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떠드는 것도 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리. 자력을 길러 삶에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과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며 자괴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으랴. 그런 면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웅숭깊다.

이야기와 치유의 학교, 어머니

<어머니학교>는 이야기 학교이다. 그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상 모든 어머니가 소설'인 이치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가 소설이고, 소설이 이야기다. <어머니학교>엔 이야기가 듬뿍 담겨있다. '중3 빨갱이'(어머니학교 33)에는 전교조 선생님을 배웅했다 해서 막내아들이 빨갱이가 되었다며 불려간 학교에서 도리어 교장 교감을 혼낸 이야기, 젊은 날 남편이 '삐딱구두에 명태알 같은 스타킹'을 신은 새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한 시간 안에 타고 온 택시에 다시 태울 것이라고, 택시 기사와 내기를 해서 이긴 이야기('삐딱구두' 어머니학교 66), 볏가마니 수매한 돈을 잃어버리고 온 남편을 대신해서 찾아온 이야기('장판' 어머니학교 67)는 절로 웃음을 물게 하며, 자못 통쾌하게도 한다.

그 중에 '더덕밭에 베개만 한 돌부처 있잖냐? /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돌덩인 줄만 알았던 애기바위 말이여'로 시작하는 '애기바위'(어머니학교 55)는 긴 시인데도 마치 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 것 같이 구성지다. 한과 슬픔을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그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면서 가슴 한 구석이 한동안 먹먹해지기도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읽으면서 마음병이 치유되는데, 삶 속에서 우러나온 치유의 말씀들도  법문이다. '지나고 봐라. 사람도 /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 어떤 세상이 맨날 / 보름달만 있겄냐? / 몸만 성하면 된다.'('그믐달' 어머니학교 18)는 시나, '근심이니 상심이니 하는 것도 한두 가지일 때는 흙탕물이지만 / 이런 게 인생이다 다잡으면, 마음 어둑어둑해지는 게 편해야. / 한숨도 힘 있을 때 푹푹 내뱉어라. / 한숨의 크기가 마음이란 거여.'('한숨의 크기'어머니학교 19)라는 절창이 그것이다.

'먹고 싸고 숨 쉬는 게 도 닦는 거여. / 향기도 꿀도 다 찌꺼기가 있는 법이여. / 아무 곳에다 튀튀 내뱉으면 어린애지 어른이냐? // 자식만 한 거울이 어디 있겄냐? / 도 닦는 데는 식구가 최고 웃질인 거여.'라고 한 '거울'(어머니학교 36)에서는 마치 한 소식한 도인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식구에 대한 애착이 마음공부 하는데 큰 마군이가 된다는 불가의 가르침과 통한다. '주름살은 날카로운 게 빠져나간 자리' '눈물비누'(어머니학교 47)이고, '가장 힘들어서 가장' '가장'(어머니학교 58)이라며 쓰다듬는 손길도 참 따사롭다.

시집 <어머니학교>의 작가는 누구인가? 시인일까? 시인의 어머니인가? 이런 질문은 이미 의미가 없다. 시인이 흘려보낸 시의 젖줄은 시인의 어머니이고, 또한 그 시인을 낳은 시인의 어머니 역시 시인인 것이다. 세상에 어머니에 대한 시는 많지만, 어머니가 풀어낸 시는 흔치 않고, '이토록 삶의 지혜와 해학이 넘치는, 그것도 어머니 연작의 대간은 없었'(정진규)으면서도, <어머니학교>는 단순히 어머니의 삶을 아프게 조명하여 눈물을 자아내는 시와도 다른 경지를 이룬 게 분명했다. <어머니학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72번째 시마저도 나를 못 견디게 하였으니.

막내가 가르쳐준 건데
하루살이는 애벌레 때부터
스무 번도 넘게 허물을 벗는다더라.
그러니께 우리가 보는 하루살이는
마지막 옷을 입고 날아다니는 거지.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는데
알주머니 하나를 온전하게 채우고
비우려고, 필사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거여.
필사적이란 말이 이렇듯 장한 거다.
어미 아비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춤사위여.
- '하루살이'(어머니학교 72)

덧붙이는 글 | <어머니학교>, 이정록, 열림원, 2012년 10월 25일, 1만 1천 원



어머니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열림원(2012)


태그:#어머니학교, #깨달음, #생명 사랑, #이야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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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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