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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망증이 점점 심화되는 것 같다. '건망증의 늪'에 깊이 빠져버렸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공포감 같은 것을 겪기도 한다. 잊을 것은 적당히 잊고 사는 것이 미덕일 수도 있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사는 상황에서는 비애도 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매일 '생활일기'를 쓴다. 예전처럼 육필로 글을 쓴다면 '일기'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일 터이다.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덕에 쉽게 일기를 쓰게 됐다. 2008년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 사고와 관련된 큰 병골르 치르고 난 다음부터 어느새 4년을 넘기고 있는 일이다.

'생활일기'는 비록 너름새 좋고 휘황찬란하게 살지는 못할망정 올곧고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리저리 망실(忘失)을 하는 일들이 많아 건망증의 폐해를 조금이라도 벌충하려는 마음으로 지속하고 있는 일이었다.        

매일 이른 아침 소소한 동작들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천주교 신자로서 '봉헌기도'를 바치고, 맨 먼저 하는 일은 지난해 오늘의 '생활일기'를 읽어보는 것이다. 지난해 오늘 내게 있었던 일들, 내가 간 곳이며 한 일이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간추린 기록들을 읽어보는 일은 재미있기도 하다. 기쁨과 슬픔과 희원, 때로는 통분도 접하며 되새기기도 하니, 어느 정도는 성찰과 여과와 추스름의 미덕을 챙기는 일일 성싶다.

'생활일기' 덕분에 가끔은 재미있는 일도 생긴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지난해 오늘의 일들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불명확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확인이 되기도 하고, 까맣게 잊었던 일들이 재생돼 새로운 실마리나 매듭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지상 주차장 풍경이다. 차량들이 하나같이 '후진 주차'를 하고 있다.
▲ 아파트의 후진 주차 차량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지상 주차장 풍경이다. 차량들이 하나같이 '후진 주차'를 하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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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에 1년 전 오늘의 '생활일기'를 읽어보는데, 아파트 주차장에서 발생했던 가벼운 차량 접촉사고 얘기가 나왔다. 오전 6시 무렵이었다. 성당의 장례미사에 참례하려고 바삐 차에 올랐다. 장지가 멀기 때문에 오전 6시에 장례미사가 거행된다고 했다. 미사에 늦지 않으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주차장 앞 길가에 주차해 있는 흰색 아반떼 승용차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긁힌 자국이 내 승용차 왼쪽 앞 모서리에도 남게 됐다. 차 안에 메모지가 있었으나, 6시가 임박한 시각이었다. 명함이라도 한 장 아반떼 승용차의 앞 유리에 붙여놓으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바삐 나온 탓에 지갑을 지니지 않아 명함이 없었다. 오전 6시 미사이니 미사를 지내고 오더라도 7시 이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시각에는 아반떼 승용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성당부터 가기로 했다.

미사를 지내는 동안 마음이 편치 못했다. 겨우 환갑을 넘긴 이른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내 또래 교우에 대한 생각으로 가뜩이나 무겁고 아픈 마음이었다. 미사 후 장지까지 호상을 하고픈 마음을 접고 예정대로 오전 7시 이전에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흰색 아반떼 승용차는 그 자리에 없었다. 주차장의 차량들은 대부분 그대로 있는데, 주차장 앞 길가의 그 아반떼 승용차만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비어 있는 덕에 나는 좀 더 쉽게 내 자리에 후진으로 차를 넣을 수 있었다. 내 자리는 장애인 표지가 있는 자리였다. 103동 3, 4호 라인에는 장애인 차량이 내 차 한 대 뿐이므로, 그 자리는 '내 자리'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아반떼 승용차의 주인은 접촉사고를 낸 차량이 내 차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아반떼 승용차가 뉘 집 차인지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 승용차가 사라지고 없는 상황에서 당혹스러움을 안아야 했다. 낭패감 같기도 한 심정과 불안감을 안고 집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2>

잠시 후 아침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인데 내 차량을 '뺑소니 차량'으로 신고하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사과부터 하고 나서 사정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젊은 여성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내 휴대전화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거니, 지금 출근 중이라 바쁘다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다.

나는 그날 전화를 두 번 걸었고,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받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아반떼 승용차의 여성 운전자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고 보니 10층에 사는, 내가 평소 귀여워 해주는 두 여자 어린이의 엄마였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내과의원 원장님의 부인이었다.

다소 모욕적인 얘기가 있었지만, 나는 죄인 심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가 정비업체에서 받아온 견적서를 받았다. 140여 만 원의 금액이 적혀 있는 견적서였다.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많은 금액에 내심 놀라기도 했으나, 나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녀가 차를 수리하는 동안 사용할 렌터카 비용도 요구해서 기꺼이 수용하기로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시무소에서는 화단의 나무들과 저층 세대 주민들을 위해 '전진 주차'를 권유하는 팻말까지 화단에 설치해 놓았지만, 주차장 길가의 차량들 때문에 핸들 각도가 잡히지 않아 대부분의 차량들이 '후진 주차'를 하고 있다.
▲ 아파트 지상 주차장 풍경 내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시무소에서는 화단의 나무들과 저층 세대 주민들을 위해 '전진 주차'를 권유하는 팻말까지 화단에 설치해 놓았지만, 주차장 길가의 차량들 때문에 핸들 각도가 잡히지 않아 대부분의 차량들이 '후진 주차'를 하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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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보험회사에 사고 설명을 한 다음 상대차량 수리 의뢰를 했다. 30년 가까이 운전을 하면서 보험회사에 접촉사고에 따른 상대차량 수리 의뢰를 하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대인, 대물, 자차, 자손 등 네 가지 보험 항목을 통틀어 지금까지 보험회사에 수리 의뢰를 하기는 이번을 합해 상대 차량에 대한 접촉사고 수리만 단 두 번인 것이었다.

보험회사는 흔쾌하게 수용을 해주고 렌터카 비용도 제공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역담당 직원이 상대차량 운전자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때고 편리한 시간에 차를 정비업체에 맡기고 렌터카 비용을 청구하라고 했다. 그런 내용을 내게도 자세히 알려줬다.

결국 차량 수리 문제는 그렇게 가닥이 잡혀 한 시름 놓게 됐는데, 나는 여전히 죄의식 아닌 죄의식을 지녀야 했다. 접촉사고 사실을 내 쪽에서 미리 상대 쪽에 알려주지 못한 실책 때문이었다. 그쪽에서 나를 양심 불량자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늘 손에 묵주를 쥐는 것은 내 오래된 습관인데, 10층의 부부를 아파트 로비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는 묵주를 쥔 내 손이 불편해지는 현상을 겪어야 했다. 또 나는 그 집의 귀엽게 생긴 두 여자아이의 눈치도 살피곤 했다, 혹여 엄마와 아빠가 대화 중에 나를 나쁘게 여기는 말이라도 해서 아이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눈빛도 다를 터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것이 내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사항이었다.

<3>

나는 두 여자아이의 이름을 숙지한 다음 아이들의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라는 호칭을 썼다. 그 후로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엄마를 만날 때마다 차량 수리 여부를 묻곤 했다. 두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면서 남편의 내과의원 근무도 하는 ○○엄마는 몹시 바쁜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 아직 차를 고치지 못했다고도 했고, "정비업체에 가면 다른 고급 차들 수리를 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어서 우리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는데도 ○○엄마는 차를 수리하지 않았다. 생활이 워낙 바쁘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으로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곧 그 문제를 까맣게 잊었다. ○○엄마나 아빠를 아파트에서 만나는 경우도 드물었고, 접촉 흔적이 별로 뚜렷하지도 않으니 '차 수리를 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는가 보다'라는 생각도 들어서, 나는 점차 그 문제를 잊게 됐다.

그러다가 얼마 전 아침에 1년 전 같은 날의 '생활일기'를 읽던 중 이른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뺄 때 길가의 아반떼 승용차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던 얘기를 접하게 됐다. 나는 ○○엄마가 아직 차를 수리하지 않은 사실을 상기했고, 다시금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 그래서 1년 전의 그 일에 대해 다시 사죄할 겸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내과의원으로 과일이라도 한 상자 보내 줄 생각을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빠, 내과의원 원장님의 이름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과의원으로 과일 한 상자라도 보내려면 원장님의 이름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낮에 그 내과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여직원에게 정중하게 원장님의 함자를 물으니 누구시냐고 했다. 나는 태안예총 회장이라는 내 직함을 말해줬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바로 ○○엄마였다. 왜 전화를 했느냐고 묻기에 1년 전의 차량 접촉사고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커서 과일이라도 한 상자 보내드리려 한다고 하니, ○○엄마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태까지 차를 고치지 못하고 있는데, 그쪽으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한번 묻지도 않는 게 과연 옳은 태도냐고 내게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쪽에서 바쁘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즉시 보험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지역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자세한 얘기를 했다. 매일 아침에 지난해 오늘의 '생활일기'를 읽어보는데, 지난해 오늘의 '생활일기' 중에 차량 접촉사고 얘기가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상대차량 운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안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담당 직원은 걱정 말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차를 고쳐주고 렌터카 비용도 지불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직원은 ○○엄마와 다시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내게 ○○엄마와의 통화 내용을 전해줬다.

그 후로도 ○○엄마는 차를 고치지 않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만났을 때 물어보니 똑같은 대답이었다. 바빠서 차를 정비업체에 맡길 시간도 없고, 어렵게 시간을 내서 차를 가지고 가면 크고 작은 사고 차량들이 워낙 많아서 자기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엄마의 태도에서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엄마가 내게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쌀쌀한 태도에 찬바람이 돌 정도였다. 그런 ○○엄마가 내게 먼저 인사도 하고 다정하게 말도 걸어주고, 내가 묻는 말에 웃음으로 대답을 해주곤 하는 것이었다.

지난 설 명절 후에는 친정에 다녀왔다는 ○○엄마를 아파트 로비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고향이 전주라고 했다. 나는 더럭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충청도 태안 토박이인 내 아버지가 전주에서 신부를 맞아 신혼 살림을 했던 곳이었다.

○○엄마는 끝내 차를 고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 미안한 마음은 더욱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는 왜 차를 고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미안한 일이 됐다. 하지만 그 일로 해서 나와 ○○엄마는(○○아빠도) 좀 더 친숙한 사이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엄마와 아빠를 만나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 서로 유쾌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가 있게 됐다. 한동안 차갑게 느껴졌던 ○○엄마의 예쁜 얼굴이 요즘에는 더욱 예쁘게 느껴진다.


태그:#생활일기, #아파트 주차장, #차량 접촉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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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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