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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길, 그냥 걷기만 해도 마음이 한가해진다.
▲ 완짜이 마을 2 마을 길, 그냥 걷기만 해도 마음이 한가해진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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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빛

짜이하오(寨蒿) 마을로 가는 중빠(中巴:마이크로버스 정도 되는 작은 버스) 안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만으로도 꽉 차고 만다. 우리 일행을 빼면 모두 시골사람들이다. 쟁기를 들거나, 무거워 보이는 짐 보따리를 든 사람들로 좌석이 다 차고 나자, 차장인 젊은 청년이 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낸다.

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급히 차 문을 두드린다. 차장이 문을 열고, 자리가 없다고 하자 무어라고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네더니, 서너 명의 사내들이 차에 올라탄다. 자리가 없어 엔진룸 위에 앉은 그 중 한 청년이 담배를 꺼내 물더니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다. 담배 연기는 순식간에 차 안에 가득 퍼진다.

내 옆자리 창가 쪽에 앉아있던 아내가 담배연기를 피해 손을 휘저으며 창문을 열자, 차장이 갑자기 그 청년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른다.

"야, 여기 외국인 타고 있잖아. 담배 꺼."

이거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이 오갈지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에 나는 그 청년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의외에도 청년은 우리를 조심스레 바라보더니, 얼른 버스 바닥에 피우던 담배를 던져 발로 비빈다.

차장은 처음 우리가 버스에 탔을 때부터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차비를 받을 때도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지?'하는 궁금증이 가득해 보였다.

한국 돈을 받아들고 좋아하던 사람
▲ 버스 차장 한국 돈을 받아들고 좋아하던 사람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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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사건이 있은 이후, 달리는 버스 안에 탄 중국인들은 모두 창밖을 보고 있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척 했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관찰하는 눈길이다. 어쩌다 그 눈길과 내 눈길이 마주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른 고개를 돌리곤 한다. '대체 이 외국인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하는 궁금증이 버스 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한참 침묵이 이어진 후, 차장이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건넨다.

"너희들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는 것조차 미안한 듯, 얼굴 표정이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차장의 질문이 계기가 되었는지, 버스 안의 중국인들이 모두 나를 주시한다. 궁금함과 호기심이 얼굴 가득하다.

"우리 한국 사람이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주위의 중국인들 표정이 갑자기 환해진다. 긴장과 호기심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동시에 그렇게 환하게 바뀌는 순간은 평생 처음이다.

"한국?"
"정말 한국 사람이야?"
"한국에서 왔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도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보는 표정이다. 한국인이 자기네 버스에 탄 것은 처음이라느니, 한국사람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주고받더니, 차장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한국 돈 좀 보여줄 수 있니?"

차장은 차비로 받은 돈을 손에 쥐고 나에게 가리키며 말한다.

주머니를 뒤져 천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주자 차장이 받아 한참 들여다보더니 돌려준다.

"그냥 너 가져라. 기념이다."

내 말에 차장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천원이 중국 돈으로 얼마냐고 묻기에, 6위안 정도 된다고 하자 그가 얼른 10위안 짜리 한 장을 꺼내 내게 준다. 아니 그냥 선물로 주는 거라고 하자, 그가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고맙다는 말을 되뇐다.

그러자 아까 담배를 피우던 청년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나도 한국 돈 하나만 줘라."

강요가 아니라는 듯, 그의 표정이 한없이 부드럽다. 아내가 지갑에 있는 동전을 꺼내 주자 그가 또 이리저리 동전을 살펴보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자 여기저기 중국인들이 서로 한국 돈을 달라며 난리다. 일행들이 동전을 꺼내 나누어주자 서로 왁자지껄 떠드느라 버스 안이 도떼기시장같이 시끄러워진다.

"한국 사람은 드라마에서만 봤다.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다. 환영한다."

차장이 다시 인사를 한다. 그 눈빛에 호의가 가득하다. 내가 중국에 자주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왜 더럽고 불친절한 중국을 그렇게 자주 가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빙그레 웃고 만다.

더럽고 깨끗함의 기준이 정말 무엇일까? 친절과 불친절의 경계는 어디일까? 어쩌면 늘 샤워를 하고, 새 옷만 골라 입는 우리가 실은 더 더러운 것 아닐까?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채, 허위로 가득 찬 자본의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불결하고 불친절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이 더럽고, 모든 사람이 불친절한 나라는 없다. 그 나라 사람의 일부가 더럽고, 일부가 불친절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순간, 중국인은 한없이 친절하고 한없이 부드럽다. 나는 그런 순간을 즐겁게 맞아들이면 될 뿐이다.

짜이하오에 왜 가느냐는 차장의 질문이 이어지고, 완짜이 마을을 찾아간다니까, 거기는 외국인이 묵을 곳이 없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준다. 차도 다니지 않는 마을이라며, 버스가 도착하면 거기에서 빵차(봉고차)를 알아봐주겠다는 친절까지 덧붙여 준다. 고맙다.

차는 강을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차 안에서는 중국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이런 것이 여행의 재미라는 것을 새삼 만끽한다.

동족의 초대

버스 차장의 도움으로 빵차를 빌려 완짜이 마을로 향한다. 짜이하오에서 완짜이까지는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비포장이다. 길은 한창 공사중이다. 완짜이 마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산 너머 새로 공항을 닦는데,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을 공사중이란다.

완짜이 마을은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동족 거주지다. 꽤 이름이 있는 동족 마을이라는데, 가는 길도 험하고 관광객이라곤 눈 씻고 봐도 한 명도 없다. 아슬아슬한 비탈에 촘촘하게 지어진 집들도 오래 된 것보다는 새 것이 많다.

완짜이 마을 건너편 비탈의 농경지
▲ 계단식 농경지 완짜이 마을 건너편 비탈의 농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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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산비탈을 따라 이어져 있고, 길은 사람 두엇 지나갈 만한 좁은 오솔길이다. 차는 마을 입구에까지만 갈 수 있을 뿐이라, 마을에는 차라고는 없다. 차가 없어 마을길이 더 아름답다.

요즘 우리네 골목에는 차가 없는 곳이 없다. 예전에는 골목이 아이들의 놀이공간이었다면, 이제는 자동차의 주차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그러면서부터 팍팍해 진 것이 아닐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웃한 사람들이 그 골목에 모여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사라져가면서, 우리는 점점 강퍅한 시절을 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공동의 공간을 자동차라는 개인의 공간, 자본의 공간으로 바꾸어버린 것 말이다.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을길을 따라 천천히 이 집, 저 집 구경을 한다. 집은 하나같이 나무로 지었다. 워낙 평지가 좁은 비탈에 지은 집이라 기둥을 아슬아슬하게 나무로 세우고, 그 위에 방을 얹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집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채 검은 빛을 띠고 있다. 나무 기둥이라 지탱하는 힘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비탈에 벽돌을 한 줄 쌓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운 집도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이 아슬아슬하다.

건너편 골짜기에는 비탈 밭이 첩첩이다. 이쪽 비탈의 집에서 저쪽 비탈의 밭으로 일을 하러 가려면 골짜기 아래로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할 텐데, 가는 길만 해도 한나절 걸리겠다, 하는 괜한 걱정도 생긴다.

비탈에 집을 지어서 앞집 마당이 뒷집 지붕과 나란히 펼쳐져 있기도 하다. 미니스커트 같은 동족 치마를 빨아 말리는 풍경도 신기하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완짜이 마을 아이들과 부녀. 옷은 동족이 입는 미니스커트 같은 치마
▲ 완짜이 마을 사람들1 완짜이 마을 아이들과 부녀. 옷은 동족이 입는 미니스커트 같은 치마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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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너머 이웃집 지붕이 있다. 비탈에 지어진 완짜이 마을의 집들
▲ 완짜이 마을1 마당 너머 이웃집 지붕이 있다. 비탈에 지어진 완짜이 마을의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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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을 몇 굽이 도는데, 앞에서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삼촌과 조카쯤 되어 보인다. 양해를 구한 뒤 사진을 한 장 찍고 조카냐고 물으니 뜻밖에도 딸이란다. 믿기지 않아 몇 살이냐고 묻자,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스물아홉 살, 딸아이는 다섯 살이다."

자신의 이름은 우카이웨이(吳開尾), 딸의 이름은 우리엔으어(吳連娥)라고 소개까지 해 준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한 장 찍어주자 아이가 좋아 팔짝팔짝 뛴다.

그 무렵쯤에는 우리 소문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는지, 집안에 숨어 우리를 힐끔힐끔 살펴보는 아이들도 제법 있다. 내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면 아이들은 후다닥 뛰어 집안으로 달아나곤 한다.

공사를 하는지, 뚝딱뚝딱 망치질 소리가 들리고 나무를 나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내가 그런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한 청년이 걸어오다가 우카이웨이에게 무어라 말을 건넨다. 알고 보니 둘이 친구라는데, 우리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청년이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제안을 한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점심은 저희 집에서 드십시오."

우리가 사양을 하자 청년은 곧 촌장님도 오실 것이다, 우리 마을을 방문한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거듭 초청의 손을 내민다.

"예전에는 우리 마을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했었지요. 그런데 2006년에 마을에 큰 불이 났어요. 마을 대부분이 불타버린 뒤부터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당신들이 최근에는 처음 온 방문객인데 그냥 보낼 수 없습니다."

나무 기둥 아래에 벽돌로 길게 받침을 했다. 금방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 완짜이 마을의 집 나무 기둥 아래에 벽돌로 길게 받침을 했다. 금방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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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 간다. 제법 큰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부엌이다. 우리네 옛날 부뚜막과 비슷하다. 솥이 걸려있고, 부뚜막 위에는 온갖 요리 도구들이 가득하다. 청년의 어머니가 나와 인사를 하고, 얼굴이 해사한 아가씨가 수줍게 나와 고개를 까딱 숙인다. 청년의 동생이란다.

"제 동생은 북경에까지 가서 동족 노래 경연에 참석한 적도 있어요."

청년이 자랑스레 말한다. 아가씨는 방에서 동족 악기를 가지고 나와 보여주며 몇 가락 연주도 해 준다. 그 사이 청년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순식간에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 마루 위 화로에 올려놓는다. 냄비뚜껑을 열어보니 스완탕이다. 야채와 고기 튀긴 것도 있고, 무 김치 같은 것도 있다.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없어진다. 동족의 음식 맛이 우리 음식 맛과 거의 비슷하다.

스완탕과 무 김치, 물고기 요리.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 동족 음식 스완탕과 무 김치, 물고기 요리.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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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문이 퍼졌는지, 마을 사람 몇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 중 한 청년이 내 옆 의자에 앉더니 자기네 마을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을 청년회장쯤 되어 보이는 청년인데, 촌장의 동생이란다.

"불이 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을이 이 주변 동족 마을 중에서는 가장 큰 곳이었어요. 지금은 300여 호에 1천 여 명이 살고 있지만, 한때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정도였지요. 80년대에는 독일, 프랑스에서 동족 노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6년 12월 26일에 큰 불이 나서 마을이 다 타버렸어요. 보시다시피 동족은 산비탈에 나무로 집을 짓는데, 불이 나면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순식간에 타버리고 맙니다. 그 불로 마을 상징인 고루(鼓樓)도 타버렸어요."

청년의 눈자위가 안타까움 때문인지 불그스레해 진다.

청년의 말은 점점 열변조로 바뀐다. 현재 마을 복원을 위해 삼년 계획을 세우고 있단다. 정부의 지원과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삼년 안에 반드시 마을을 불타기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마을 전통 축제도 되살리고, 풍우교와 고루도 완성하고, 관광객을 위한 민박 시설도 갖추고 나면 완짜이 마을은 다시 옛날의 영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청년은 결연한 표정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열정적으로 완짜이 마을 꿈을 이야기하던 청년, 북경 노래공연에 참석했다는 비파를 든 소녀,  촌장님,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한 청년
▲ 완짜이 마을 사람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열정적으로 완짜이 마을 꿈을 이야기하던 청년, 북경 노래공연에 참석했다는 비파를 든 소녀, 촌장님,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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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족의 전통은 노래라고 하던데, 노래는 지금도 잘 전승되고 있나요?"

동족은 세계에서 노래, 특히 합창을 가장 잘 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동족의 합창은 프랑스의 합창 대회에서 수상을 했을 정도로 뛰어나서, 동족 마을을 '노래의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묻자, 청년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현재는 노래를 부르던 젊은이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버려 예전만 못해요. 그저 나이 든 사람들이 겨우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민족 음악 선생이 주축이 되어 다시 전통 음악을 되살리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오셨으니 저희들이 동족 전통 음악 공연을 들려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청년은 아까 우리를 데리고 온 집 주인의 여동생을 불러 공연 부탁을 한다. 이내 마을 아주머니들이 여럿 모이더니 공연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다.

"공연으로 하려면 전통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 입는 데만 한 시간 정도 걸려요."

청년은 그렇게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내게 술을 권한다. 약주 맛이 나는 술이다. 동족의 전통 술이라는데, 20-30도 정도 되며, 찹쌀이 원료란다.

"불 나기 전에는 아름드리 대나무 집도 있었지요. 밤이면 우리 마을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어울려 춤추며 축제를 벌였어요. 그땐 참 좋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청년의 얼굴에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있다.

남은 자들의 쓸쓸한 동족 음악

그때 몸집이 퉁퉁한 사내 한 명이 들어와 인사를 한다.

"우리 음악 선생님입니다. 전통 음악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청년이 음악 선생을 소개한다. 마침 마을 촌장님도 출타했다 돌아와 우리를 찾아오셨다. 우리 이야기를 들은 촌장은 전통 공연 준비를 도와준다.

마을 길을 전통 복장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공연을 하러 가는 길이다.
▲ 완짜이 마을 3 마을 길을 전통 복장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공연을 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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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위해 저도 전통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해요. 우리 집이 바로 저 옆이니 같이 가 구경하시죠."

음악 선생을 따라 간 집은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신축 건물이다. 아직 나무 향내가 집안에 은은하게 퍼질 정도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집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 구경을 하는데, 구석에 커다란 항아리만 한 통이 놓여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술이란다. 전통주인데, 100근짜리라며, 중양절에 먹을 것이란다. 술통을 톡툭 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술꾼의 풍모가 엿보인다. 자기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이 조선족이라며, 그래서 한국에서 온 우리가 더 반갑다고 연신 웃던 음악 선생은 전통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옷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동족 전통 공연을 해 준 사람들. 남자는 음악 선생님
▲ 완짜이 마을 사람들 2 동족 전통 공연을 해 준 사람들. 남자는 음악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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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 옷은 만들기 힘들다. 면화를 직접 재배해서 실을 자아 만드는데, 제작을 시작하면 일 년에 겨우 한 벌 만들 수 있을 뿐이예요. 여자 옷에는 수많은 은 장신구들이 붙어있는데, 이것도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불이 났을 때 마을에 보관하고 있던 전통 옷들이 거의 타버렸어요. 은장신구도 거의 없어져 지금 몇 벌만 남아 잇을 뿐이지요. 오늘 그 옷들을 입고 공연을 할 겁니다."

준비가 다 끝나자, 음악 선생은 비파를 꺼내 들고 마을 공터로 향한다. 여자들도 복장을 갖춰 입고 공터에 모여든다. 동족 여자들의 전통 복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색색의 온갖 문양을 수놓은 옷에, 치렁치렁 실 장식을 매달고, 머리에는 갖가지 은장식으로 치장된 비녀를 꽂거나, 꽃 문양으로 장식한 은관을 썼다.

모두 여덟 명의 여성이 노래와 춤을 추고, 음악 선생은 비파 연주를 하는 공연은, 그러나 보기보다는 허술하다. 음정도 서로 어울리지 않고, 심지어 아주머니들은 노래 가사도 제대로 외우고 있지 못한 듯, 입만 벌릴 뿐이다.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해준 집 여동생만이 노래를 익숙하게 부를 뿐이다. 스러지는 저녁 햇살에 그들의 노랫소리가 아련하게 흩어지는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질 뿐이다. 마치 세상의 변화 속에 자신의 자리를 점점 빼앗겨 가는 동족의 슬픈 잔영 같은 공연이라고나 할까?

"노래를 하는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버려 제대로 공연을 할 수가 없다."

공연이 끝나자 촌장은 변명처럼 그런 말로 변명을 한다.

"그렇지만 삼 년 후에 오면 제대로 동족 노래 공연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촌장 동생은 여전히 열의에 차서 후일을 기약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열의조차 스러져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미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자본과 상업의 달콤한 유혹에 길들여진 그들은 자신의 고향인 완짜이 마을을 그저 그리운 곳으로 기억할 뿐, 돌아가 살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은 죽음보다도 강하다. 현대의 욕망은 돈으로 대표된다. 돈이 모이는 곳이 바로 욕망이 충족되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도시다. 이미 도시로 유입된 동족 사람들에게, 고향은 그저 그리운 곳으로 마음속에 남아있는 곳이 아닐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야 했던 우리들의 경험이 그 증거이리라. 당시 군사 정권은 농촌의 인력을 도시로 유입시킴으로써 싼 공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수출하려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그 유입을 재촉한 것이 돈이라는 욕망 충족의 도구였다.

전통 복장을 하고 공연을 하는 완짜이 사람들. 공연은 스러져가는 동족의 운명을 보는 것처럼 애닯다.
▲ 동족 공연 전통 복장을 하고 공연을 하는 완짜이 사람들. 공연은 스러져가는 동족의 운명을 보는 것처럼 애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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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동족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 한족과 뒤섞여 새로운 세계를 맛본 뒤다. 더구나 그 배면에는 한족을 소수민족과 뒤섞음으로써 중화주의를 실현하려는 중국식 소수민족 정책이 깔려있지 않은가? 정부에서 돈을 대주고 동족의 집을 복원시키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동족 마을이 관광지화하면서 더 많은 한족들이 그 마을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상업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미 관광지가 된 많은 소수민족 거주지가 그런 형태로 변해버렸다. 운남성 나시족(納西族)의 리지앙(麗江)은 이제는 나시족보다 한족들이 더 북적거리고, 심지어 나시족 문자인 동파문자까지 배워 조각을 하고, 문양을 만들어 판매하는 한족들도 부지기수다. 

완짜이 마을이 청년의 말대로 복원되어 관광지가 된다면, 리지앙의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 아닐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손 흔드는 완짜이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돌아서는 길, 내 마음 한켠에서는 그런 의구심이 자꾸 생겨난다.  원래는 '큰 사람', '산 위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동족(峒族)이었으나,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명칭을 명명하면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라는 뜻의 동족(侗族)으로 바꾸어버린 그 속내가 자꾸 읽혀져 든 의구심이다. 부디 이런 나의 의구심이 기우(杞憂)이기를!

펑깡 나무를 든 할머니

이튿날, 첫 차를 타고 룽지앙을 떠난다. 떠나는 내 마음 속에는 자꾸 완짜이 마을의 스러져가는 풍경이 아른거린다.

차는 험하디 험한 레이산을 다시 넘는다. 꼬불꼬불 돌아 레이산 정상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발이 퍼붓기 시작한다. 조금만 늦게 출발했어도 레이산을 넘지 못했을 것 같은 폭설이다. 눈은 카이리에서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밤 기차를 타고 구이양으로, 구이양에서 다시 하루를 묵고 쿤밍으로 향한다.

구이양 칭옌 고진에 폭설이 내렸다. 칭옌고진에 눈이 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란다.
▲ 칭옌고진의 설경 구이양 칭옌 고진에 폭설이 내렸다. 칭옌고진에 눈이 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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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흘 내내 눈이 내린다. 황과수 폭포는 길이 막혀 포기하고 찾아간 칭옌고진(靑岩古鎭)도 눈에 덮여 있다. 밤기차는 쉬지도 않고 달린다. 숨이 턱에 차 고개를 넘고 터널을 지나며, 기차는 나를 과거의 시간 속에서 현실로 데려가고 있다.

내가 그동안 떠돌았던 구이저우의 풍경들이, 아득한 과거의 시간 속을 여행한 것 같다. 그 마지막 풍경은 어제 늦은 밤, 구이양 역 혼잡한 대합실에서 만난 할머니다. 춘절을 앞두고 발 디딜 틈조차 찾기 힘들도록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대합실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무 한 그루를 손에 쥐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펑깡 나무였다. 펑깡은 구이저우 지역의 귤이다.

할머니는 마치 소중한 보물처럼 펑깡나무 묘목 한 그루를 비닐봉지에 싸들고,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일까? 살아온 세월이 파놓은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한데, 할머니는 그 세월의 저편으로 떠나고 있는 중일까? 문득 할머니가 들고 있는 펑깡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라 이 세상에 남겨두고 싶은 할머니의 꿈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세월 저편을 건너 완짜이 마을로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여행은 어쩌면 꿈을 찾아 헤매는 헛된 몸부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펑깡 나무를 들고 서 있던 할머니처럼, 나는 이번 구이저우 여행에서 무엇을 들고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타는 사람 하나 없는 역에 잠시 멈췄던 기차가 다시 어둠을 향해 달린다. 창밖으로는 눈보라가 거세다. 눈발은 기차 출입문 사이에도 수북하게 쌓여 있다. 4년만의 눈이라는데, 그것도 폭설인 구이저우는 그렇게 떠나는 내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끝)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구이저우 여행 이야기는 계림에서 총지앙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답사하고 나서 추후에 계속 쓸 계획입니다.



태그:#구이저우, #완짜이, #동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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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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