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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깔 곱게 잘익은 사과와 감들이 동네 시장에 많이 나와 있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감을 느낀다. 더욱이 이맘때면 산에는 울긋불긋 화려한 빛깔의 단풍으로 가을을 실감하게 된다.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가을 풍경이 있으니 바로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는 황금빛 평야가 그곳이다.

 

사통팔달 쭉뻗은 아름다운 가을 들녘을 감상하며 자전거를 타고 실컷 달릴 수도 있고, 도시에서 태어나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잃어버고만 '지평선'이라는 말을 직접 경험하고 감동하기도 한다. 정말 탁 트인 지평선을 눈 앞에 대하니 자잘한 일들로 속좁고 팍팍했던 마음이 대인처럼 넓어지게 된다.

    

이런 지평선이란 말을 새롭게 일깨워준 곳은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부근 수십만 평의 들판으로 예당평야라고도 하고, 현지 주민들은 서들(西野)평야라고 부르는 곳이다(예당평야는 충남 예산과 당진지역을 아우르는 평야라는 뜻). 가을 추수가 다 끝난 11월 초에는 이 평야에서 당진군이 주최하는 쌀축제도 한단다.    

 

지난 주말(10월 16일) 애마 잔차와 함께 수도권 1호선 전철을 타고 천안을 지나 종점인 신창역에서 내려 화창한 가을 햇살을 등허리에 쬐며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서들평야를 향해 달려가 보았다.

 

2시간 동안 탄 완행 전철  

 

이번 여행에서 수도권 전철에 완행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수도권 1호선 전철역인 신도림역에서 멀리 천안이나 인천까지 갈 수 있는데 여기에 급행열차가 있고 완행열차가 따로 있었다. 급행열차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서 그냥 완행열차를 타니 종점인 신창역까지 2시간 걸린단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몇 주째 밀린 <오마이뉴스> 신문도 읽으며 간다.   

 

급행열차나 완행열차나 차삯은 3000원으로 저렴했는데 문제는 자리다. 서울에서 수원을 지나 충청도까지 가는데 만약 자리가 없어 서서 가야 한다면. 어쩐지 출발역인 서울 신도림역에서 전철이 도착하자 갑자기 사람들의 동작이 다람쥐처럼 잽싸고 빨라진다 싶었다.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철 안에는 앉을 자리가 많이 생긴다.  

 

졸음을 부르는 따사로운 가을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 들어와 한숨 자라고 유혹을 한다. 창밖을 보니 주말 여행을 떠나는 차량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역시 전철을 타고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도림역에서 천안, 신창역까지의 전철은 다행히 지하철이 아니라 지상철이다. 덕분에 가을 행색이 완연한 창밖의 풍경을 보며 그리 지겹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사과밭이 맞아주는 국도길

 

어르신들이 많이 내리는 천안, 온양온천역을 지나 드디어 종점인 신창역에 다다랐다. 따로 자전거 길도 없고 잘 알려진 자전거 코스도 아니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 '어딜 가려고 저러나'하고 애마 잔차에 올라탄 나를 돈키호테 보듯 쳐다본다. 가을 들녘으로 가는 첫 번째 방향은 그 이름도 정겨운 읍내리와 순천향 대학교다.  

 

학생들과 가게들로 활기찬 순천향 대학교 앞을 지나니 2차선의 좁고 황량한 국도가 이어진다. 국도 주변은 크고 작은 공장과 회사들뿐이고 거대한 굴뚝과 철탑들까지 주변에 솟아 있으니 길이 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게다가 심심치않게 오르막길까지 나타나니 '있다가 이 길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나' 근심이 앞선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내리막길 라이딩의 짜릿함은 그런 근심들을 일거에 사라지게 한다. 자전거 여행은 내게 살면서 생기는 근심, 걱정들을 미리 앞서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배짱(?)을 길러 주었다. 

 

중간에 쉬어갈 만한 곳도 마땅히 없는 국도길을 그렇게 달리는데 다행히 넓은 사과밭이 나타나 자전거 여행자에게 쉼터를 자청한다. 수줍은 새색시처럼 볼이 발그레한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기만 해도 흐뭇해서 지친 다리에 힘이 난다. 자전거와 함께 사진도 찍으며 사과밭 사이에서 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아차 싶었는데 이유는 사과 도둑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아저씨가 이쪽으로 걸어 오시는데 날 도둑으로 생각하진 않으시는 것 같다. 손에 사과 몇 개를 들고 오시고 있기 때문이다. 면목이 없어 사양을 하니 상품용은 아니라도 맛은 좋으니 그냥 먹으란다. 그러시면서 저 앞 구덩이를 가리키며 올해 유난히도 자주 내리던 비에 망가진 사과들을 많이 버렸다는데, 자세히 쳐다보니 커다란 사과 무덤이다. 지난 계절 비가 자주 내려 자전거 여행을 못간다고 불평을 해댔던 내가 부끄러워 차마 아저씨 앞에서 사과를 먹지 못했다.

 

산에는 단풍, 들에는 금벼

 

서들평야로 들어가는 관문인 선우대교에 오르니 발아래로 드넓은 평야의 젖줄인 삽교천과 황금물결의 가을 들녘이 펼쳐진다. 독수리 눈이 된 것처럼 시야가 트이고, 가슴 속이 뻥뚫린다. 끝없이 펼쳐진 저 평원 속을 애마 잔차와 실컷 달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다리에 불끈 힘이 가고, 평야 속에서 만날 푸근한 마을과 풍경을 떠올리니 흐뭇한 웃음이 난다.

 

이렇게 자전거 타고 달리며 둘러보기 좋아서 그런지 나는 가을 산의 단풍보다 가을 들판의 금벼들이 더 좋다. 더욱이 벼가 익어가는 가을 들녘을 만나러 가는건 한낱 볼거리를 구경하러 가는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식량 자급률이 30%도 안되는 우리나라(OECD 회원국 중 최하위)에 그나마도 수입쌀이 밀려드는 이때, 수천 년간 우리를 먹여 살려온 금싸라기 땅과 수고하시는 농부, 농모님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 이름도 재미있는 우강면 대포리를 지나면서 바다처럼 넓은 평야와 예쁜 감이 매달린 감나무들이 서있는 작은 마을 풍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가을 추수를 하는 주민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멀리에서도 들려오고, 트랙터가 쌀알을 토해내는 소음이 정답게 들리고, 동네 개들은 지나가는 자전거를 봐도 덤비기는커녕 하품을 하며 졸고 있다. 평야는 평화다.

 

그렇게 평원의 농로길을 한눈팔며 여기저기 달리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농로길은 사통팔달 잘 닦여있지만 따로 표지판이 없다. 마을 주민만이 아는 길이다. 요즘 농촌에선 보기드문 내 또래의 젊은 농군이 용달차를 타고 서있기에 달려가 길을 물어보았다. 그도 외지인이 반가웠던지 아예 차에서 내려 손짓을 하며 방향을 자세히도 알려준다. 예당평야로 알았던 이곳이 서들평야라고 새로 알려주기도 한다. 길을 알려주는 젊은 농군의 까맣게 탄 얼굴과 팔뚝을 보니, 밥상 머리에서 밥알을 흘리면 주워먹는 내 습관을 고치기 힘들 듯싶다.

 

평화롭기만한 서들평야 속의 마을을 지나가다가 발견한 어느 집 담벼락에 써있는 글귀가 마음에 와닿는다.

 

들일 마치고 고개 들어보니 달이 뜬다.

일월곤륜이 내 가난한 집 병풍이구나.

좋은 시절이다.

 


태그:#자전거여행, #서들평야, #우강면, #당진군, #합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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