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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저녁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 세트장에서 열린 서기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재현 공연.
▲ 재현된 황산벌 전투 2일 저녁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 세트장에서 열린 서기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재현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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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저녁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 세트장에서 서기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를 재현한 공연이 열렸다.
▲ 황산벌 전투 재현 2일 저녁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 세트장에서 서기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를 재현한 공연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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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징 소리가 귀청을 찢고 병사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군기가 펄럭이고 화살은 비처럼 쏟아졌다. 황산벌에서 벌어졌던 백제 망국의 비극적 대서사시가 1400년 만에 재현됐다.

2일 오후 6시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세트장. '700년 백제기상! 황산벌에 다시 서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황산벌 전투 재현' 행사에는 전문 연기자, 군인, 학생 등 1200여 명의 대규모 출연자와 30여 필의 말이 동원돼 당시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지난 2008년 제54회 백제문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황산벌 전투 재현 행사는 극적인 효과와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찬사를 받으면서 4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불러 모은 바 있다. 올해 '2010 세계대백제전' 메인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황산벌 전투재현 행사는 총 8막으로 구성되어 더 규모가 커지고 풍부한 볼거리들을 제공했다.

이날 재현행사는 대북소리에 맞춘 백제무사들의 검무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운명의 바람 황산벌에 불다'란 주제로 나당 연합군의 침략에 맞선 백제군의 출전 준비를 그리는 것으로 1막을 열었다. 2막에서는 계백장군의 살신성인과 가족의 희생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한 나라의 힘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 세트장에서 재현한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 황산벌 전투재현 충남 논산시 둔치공원 특설 세트장에서 재현한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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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재현행사장에 만들어진 백제군과 신라군의 전투장면
▲ 맞붙은 백제군과 신라군 황산벌 전투 재현행사장에 만들어진 백제군과 신라군의 전투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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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목숨을 내걸고 전쟁터에서 보냈던 계백이지만 어찌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을 것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의 생명을 제 손으로 거둬야했던 계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계백의 판단과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이 비극적 영웅은 고독한 길을 뚜벅 뚜벅 걸어갔다. 곧 자신도 가족들의 뒤를 따르리라 다짐하면서.

3막에선 계백 휘하에 모인 5000 결사대의 출정 모습이 재현됐다. "옛날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계백의 사자후에 이어 죽기를 각오한 5000결사대가 목청을 합쳐 피를 토하듯 내지르는 함성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 소부리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황산벌에 계백이 이끄는 5000 결사대가 다다른 것은 의자왕 20년(660년) 음력 7월 9일 새벽. 4막과 5막에선 고립무원의 땅에 선 5000결사대의 처절한 항전이 펼쳐졌다.

황산벌은 300~400m의 나지막한 야산들로 둘러싸인 20만여 평의 분지로 북쪽은 황산성, 동쪽에는 황령산성과 깃대봉, 남쪽에 국사봉과 산직리산성, 모촌리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수도 방어의 최후 요충지였다. 백제 군사들은 누구나 이곳이 바로 최후의 싸움터가 되고, 그리하여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백제군과 신라군 장수드르이 전투장면
▲ 황산벌 전투재현 백제군과 신라군 장수드르이 전투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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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들이닥친 신라의 대군은 5만, 백제 군사들의 10배가 넘었다. 계백은 군대를 셋으로 나눠 중군은 자신의 직접 지휘 하에 산직리산성을, 좌군은 황령산성을, 우군은 모촌리산성을 지키게 했다. 적은 숫자의 백제군이 열배나 많은 신라군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평지인 황산벌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윽고 전진을 독려하는 북소리가 울리고 10배나 많은 신라군이 거센 파도처럼 밀어 닥쳤다. 67세의 백전노장 김유신(金庾信)은 이미 목숨 따위 연연치 않으리라 결심한 백제 군사들의 결연한 투혼 앞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4전 4패. 신라군의 연이은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6막은 화랑 관창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신라군이 연이은 패배로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 장군 김품일(金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사로잡힌다. 계백이 갑옷과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인지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길게 탄식하며 살려서 돌려보냈다.

신라군 진영으로 돌아왔던 관창은 샘물을 떠 목을 축인 다음 다시 말을 달려 창을 휘두르고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나간다. 그리하여 또다시 생포되니 계백은 "이 소년이 죽기를 작정했으니 어찌 그 장한 뜻을 받아 주지 않겠는가!" 하고는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그때 계백은 어린 화랑의 목숨을 희생시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김유신의 속셈을 파악하고 자신과 부하들의 최후를 예감했으리라.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이룬 7막은 기병과 궁수들이 동원된 대규모 전투가 재현되어 계백과 백제 결사대의 장렬한 최후를 그리고 있다. 김유신의 예상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황산벌에 뼈를 묻기로 결의했던 계백과 5천의 결사대는 전멸하고 만다. 역사는 이때 살아서 포로가 된 백제 병사는 단지 20여 명 뿐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백제군과 신라군 병사들이 황산벌에 쓰러져 있다.
▲ 쓰러진 병사들 백제군과 신라군 병사들이 황산벌에 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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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가 계백군의 전멸로 마무리되고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123년간 영화를 자랑하던 백제의 도성 사비성은 맥없이 함락되고, 700년을 이어온 백제사는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비규환의 피바다 속에서 사비성은 7일 밤낮을 철저히 불타고 파괴 당해 지상에 버티고 서서 남은 것이라고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군공을 새긴 5층 석탑 하나뿐이었다.

거센 빗줄기가 내리는 가운데 펼쳐진 이날 재현 행사는 1400년 전 황산벌에 붉은 피를 뿌리며 쓰려져갔던 계백 장군과 백제 병사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의식으로 대미를 장식하며 저녁 8시 막을 내렸다.

행사의 제작 총책임자인 권흥순 대전 MBC 부장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철저한 고증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은 뒤 수차례에 걸쳐 연습을 하는 등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날 안희정 충남지사, 황명선 논산시장, 이인제 국회의원 등도 행사장을 찾아 공연을 관람했다. 총 4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황산벌 전투 재현행사는 3일 오후 6시에 다시 한 번 공연된다.


태그:#2010 세계대백제전, #황산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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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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