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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무릎을 쳤다. 필리핀 키리노 대통령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보고받은 직후였다. 그는 즉시 찬성 담화를 준비하도록 지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를 사로잡은 두 단어는 '미국'과 '중국 봉쇄'였다. 그는 이 둘을 연결시켜 신생 한국의 안보를 담보하고자 했다. 이 구상은 이후 수 개월 동안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키리노는 1949년 3월 20일 <AP통신>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동아시아에도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와 같은 반공집단안보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나토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키리노의 주장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도 소련과 중국의 공세에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점차 우세를 점해가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가 공산화된다는 사실은, 필리핀의 제 1야당이 화교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이었다는 점과 맞물려 키리노를 불안하게 했다.

 

중국 대륙의 상황 전개에 초조하고 불안하기는 이승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중국 공산당을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에 비유하며 "산불처럼 사방으로 번지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다. 청년시절부터 청나라로부터의 실질적, 정신적 독립을 주장해왔던 그에게, 중국은 설사 공산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담스러운 이웃이었다. 중국이 공산당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은 그로서는 더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접한 공산국가는 북한 하나로도 버거웠다.

 

미국은 왜 태평양조약기구를 반대했나

 

키리노의 제안을 이승만이 무릎을 치며 반겼던 이유는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의 제안은 여러모로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직접 보장해줄 수 없다면, 미국이 지원하는 안보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훌륭한 차선책이 될 수 있었다. 북한과 중국의 위협은 심대했다. 당시로서 미국은 정권의 국내적 유지와 국가의 국제적 생존을 위해 한국의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었다. 이승만은 3월 24일 찬성담화문을 발표했다. 키리노의 제안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동양 민족을 원조하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이 제안에 반대했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3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기자회견을 열고 이 반공군사동맹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미국은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막후에서는 이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애썼다. 결국 미국의 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태평양조약 구상은 미국의 거부와 반대로 좌초했다. 이승만은 좀처럼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을 등에 업은 한국이, 소련을 배후로 한 중국과 북한에 공동으로 대항하겠다는데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미국의 대중정책에 있었다. 당시 미 정부는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었다. 미국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소련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중국을 포섭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은 소련을 견제하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조심스럽게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던 미국에게 중국을 봉쇄하겠다고 나선 이승만, 장제스, 키리노의 행보가 반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배신감에 떨었지만 어찌해볼 방도는 없었다. 그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미국에 항의했다. 그러나 중국에 시선을 고정한 미국에게 그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벽에 부딪힌 정부의 천안함 외교

 

2010년 7월 9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천안함 사태에 관련된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이 성명은 천안함 조사결과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포함시킴으로써 북한을 공격 주체로 명시하는 것을 피했다. 한국 정부는 애초에 북한을 제재하는 결의안을 기대했다. 그러나 채택된 것은 의장성명이었고, 그 성명조차 공격 주체로 북한을 지목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은 외교적으로 체면을 구긴 셈이 됐다.

 

박인국 UN 주재 한국대사는 공식 발표를 통해 "이 사태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한 것, 추가도발에 대한 경고를 분명히 한 것으로써 충분한 의미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평가가 얼마나 실제와 가까운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UN 성명 발표 이전까지 천안함 사태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은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4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지난 20일 국제합동조사단은 확실한 물증과 함께 최종 결론을 내 놓았고, 이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어떤 나라도 천안함 사태가 북한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고 언명했다.

 

대통령은 6월 4일에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천안함 사태의 해결 없이는 6자회담도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천안함 공세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한국 정부는 천안함을 공격한 북한을 국제사회의 공적으로 삼아 북한을 압박하고 남북관계에서 우세적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천안함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정부의 기대와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UN 의장성명의 내용은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국제사회에 확실한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 뿐 아니라, 중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천안함 사태가 미국과 중국이 깊숙이 개입된 국제적 외교문제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서해 연합훈련에 대해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긴장의 조짐은 남북관계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천안함 사태로 발아한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한미-북중 간 외교적 마찰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동해에서 한미 연합훈련이 열리는 동안,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은 남중국해에서 주력 구축함을 동원한 대규모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최근에는 중국 외교부가 지난 7월 류우익 주중대사를 불러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에 진압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언급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강경한 자세를 한껏 과시했던 한국 정부의 입장은 점차 곤란해져 가고 있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업고 천안함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잡으려던 정부의 애초 의도는 중국의 반대라는 벽에 부딪혔다.  

 

이승만 지역인식의 진화와 발전

 

한국은 반세기 전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손을 내밀어 북한과 북한을 돕는 중국을 견제하자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북한 봉쇄와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제 1목표로 삼아 대중관계를 희생시켜도 좋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과거 이승만 정부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상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불행일지 모른다. 그렇게 먼 과거를 돌아보기에는 그간 우리가 배우고 익혀온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6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다. 국제사회는 냉전의 종식, 9/11, 중국의 부상 등 여러 사건과 현상을 겪었다. 그리고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왔다. 국내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내면서였다.

 

이승만은 한미동맹을 통해 "한미 연대 및 동아시아 견제"로 표현 가능한 그의 지역인식을 구체화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태평양조약 논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미동맹을 성취해낸 것은, 19세기 말부터 이어져오던 지역인식과 외교 철학의 논쟁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했다.

 

중화체제 몰락 이후 한국에는 많은 종류의 지역인식과 외교 노선 구상이 등장했다. 위정척사노선, 근대화론/문명개화주의, 동양평화론/범아시아주의, 민족주의, 미국 중심의 국제주의 등 다양한 노선들이 분출했고, 서로 경쟁했다. 최후의 승자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국제주의였다. 1945년 이후 미국이 한국과 동아시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나라 중 하나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이 승리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이후 상당기간 동안 한국의 지역인식과 외교는 이승만이 놓은 틀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냉전이라는 국제정세 때문이기도 했다. 이승만 뿐 아니라 196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도 중국, 러시아를 중대한 위협으로 이해했다. 미국은 그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초대되어야 할 해결사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은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조건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필요에 따라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보여왔다. 한편에서는 한미동맹, 주한미군, 한일수교, 한미일협조체제 등이 지속·전개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 한소, 한중수교, 남북기본합의서 등의 변화도 관찰되었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한중, 한소수교를 맺고 남북관계를 전환시킨 것은 한국의 지역인식과 외교 노선이 '이승만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물론 냉전의 와해라는 국제적 조류에 보조를 맞춘 것이었다. 국내 정치가 민주주의로 전진하던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에 이르러 이승만이 주조했던 지역인식의 범위와 방향은 보다 전폭적으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미국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입장을 공유하면서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강조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동아시아의 주변국들을 적극 활용하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과거로의 회귀가 느껴진다

 

이승만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많은 동아시아 담론들 속에서 미국을 잡아 지역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 노태우와 김대중은 반대로 미국과 반공으로 묶여있던 지역인식 속에서 동아시아를 포용하여 한국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이러한 지역인식은 한편으로는 1990년대 후반 북한문제를 다룸에 있어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데 기여했고, 한국이 주도하는 포용정책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또한 1990년대 말 ASEAN+3 정상회의를 통해 동남아와 동북아를 포괄하는 지역주의 담론을 주도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대외인식 속에서 오랜 기간 견제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동아시아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협조자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현 정부는 이러한 진화의 과정을 '잃어버린 10년'에 몰아넣고 새로운 외교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간 북한은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분쟁의 소지를 만들어왔다. 김대중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4대 강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내세운 '1동맹 3우호체제' 역시 정상들 간의 담화나 협조로 이루어졌을 뿐, 하나의 제도로 공식화되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의 반미 감정이 한미 양국 간에 중요한 외교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한국이 보여온 지역인식과 외교 노선의 진화는 여러 한계를 갖는 것이었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함은 분명했다.

 

그러나 '변화'는 '새로운 진화'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등장 이후 대결적인 대북인식을 강화하면서 한미공조에 무게중심을 두는 반면, 그동안 발전시켜왔던 지역인식의 진화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면을 보여왔다. 그러한 경향은 이번 사태에 관한 대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천안함 사태 이후, 정부가 국제사회의 동조를 얻기 위해 UN 및 아시아 지역에서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면서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만을 얻었을 뿐 중국, 러시아 등과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변화가 '미국만을 중시하고 주변 국가들은 무시하거나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 과거로의 회귀로 느껴지는 것은 과한 생각일까. 맥락과 내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60년 전 태평양조약을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열정이 읽히는 것은, 이 정부의 외교 노선이나 지역인식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지향했던 어떤 방향성에 반(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북한의 위협에 직면했던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앞장서서 북한을 물리치고 중국을 견제해주기를 바랐다. 그 희망은 결국 달성되었으나, 그것은 한국전쟁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난 후였다. 6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이 가진 것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2010년의 한국이 일부러 나서서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외교적 긴장관계를 감수할 이유는 없다.

 

한국은 그간 물질적 부(富) 뿐 아니라 지역인식과 외교력을 확장시킨 경험도 쌓아왔다. 천안함 사태의 해결은 한국 외교가 가진 과거의 긍정적 유산 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초유의 사건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라는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 한국은 비로소 지역인식과 외교력의 또 다른 진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태그:#이승만, #천안함, #이명박, #중국, #통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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