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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고창고성 폐허를 찾은 까닭은

고창고성과 당나귀 마차
 고창고성과 당나귀 마차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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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을 따라 고창고성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다. 15분쯤 지나자 고창고성인근에 닿는다. 그리고 폐허가 된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뜨거운 태양도 서쪽으로 조금은 기운 듯하다. 더위가 조금 누그러드는 것을 보니. 우리는 고창고성 입구에서 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낙타나 전동차가 아닌 당나귀 마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마차를 타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마부들이 모여 한가하게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우리 팀이 나타나자 그 중 마부 하나가 당나귀를 끌고 앞으로 나온다. 가이드를 포함해 우리 팀 인원이 9명이라서 마차 한 대에 타는 것이 무리일 것 같은데 모두 태운다. 마차는 고창고성 안으로 천천히 달려간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무너진 흙벽이다. 성벽이고 주택이고 온전한 게 별로 없다. 세월 탓일까, 아니면 파괴 탓일까? 가이드 말로는 두 가지 다라고 한다. 훼손은 꼭 전쟁만이 아니라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고창고성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가는 당나귀 마차
 고창고성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가는 당나귀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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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가 힘겨워한다. 이 더위에 마부를 포함 10명을 태운 마차를 끌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속도가 느려지면 마부가 구령을 불러 길을 재촉한다. 가면서 보니 이곳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편으로는 날씨가 더워서 일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볼거리가 없어서 일 거다. 10분쯤 되었을까? 목적지인 가한보(可汗堡)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고창고성의 중심건물인 불교사원 유적이 있다.

고창고성 사원
 고창고성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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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창고성을 찾은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창국의 궁성을 찾아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장법사가 설법을 펼쳤다는 사원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 와서 보니 궁성터는 거의 확인이 안 되고 사원터만 확인이 된다. 사원이 바로 가한보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큰 법당인 대전(大殿), 맞은편의 배전(配殿) 그리고 정원(庭院)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주와 불감
 탑주와 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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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확인할 수 있는 구조물은 가운데 큰 법당과 삼장법사가 설법을 펼친 강당이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남북으로 나 있고 그 끝에 계단이 있어 법당의 축대로 바로 오를 수 있다. 법당의 가운데에는 복원된 중심 탑주(塔柱)와 불감(佛龕)이 자리 잡고 있다. 불감은 아래층에 세 개의 큰 벽감이 있고, 그 위로 7개씩 3층으로 된 작은 벽감이 있다. 이들 벽감에는 진흙으로 만든 불상과 채색된 광배가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강당은 큰 법당의 왼쪽 앞에 있으며, 네모난 외벽 안에 원형의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시 사각형이다. 이곳에서 삼장법사는 고창국의 왕과 스님들에게 설법을 하고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곳 강당 안은 소리 울림이 좋은데, 그것은 설법이 잘 들리도록 음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이드의 설명이 그 어느 곳보다 크고 웅장하게 잘 들린다.

삼장법사가 설법한 사원 강당
 삼장법사가 설법한 사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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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삼장법사는 628년 초 고창왕 국문태(麴文泰)의 초청으로 고창고성에 이른다. 법사는 이곳 사원에서 한 달간 기거하며 왕에게<인왕반야경>을 가르친다. 왕은 법사의 불경 강해에 감동하여 계속 머물 것을 권하였으나, 법사는 불경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왕에게 서역에서 불경을 구해 돌아올 때는 3년간 머물 것을 약속한다.

그러자 왕은 삼장법사에게 시종과 인부, 마필을 주고, 의발과 생활용품을 하사한다. 그뿐 아니라 20년간 천축을 왕복할 수 있도록, 황금 100냥, 은전 3만매, 능견 500필을 준다. 삼장법사는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 천축으로 가 불경을 구해 돌아온다. 법사는 644년 고창국 남쪽을 지나게 되나, 국씨고창국은 이미 당나라에 의해 망하고 없었다.

사원 조감도
 사원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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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다시 한 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사원터를 떠난다. 우리는 고창고성에서 정말 뜨거운 오후를 보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흙벽돌과 구조물들 사이에서 옛 사람들의 흔적을 찾으며. 우리가 당나귀 마차에서 내렸던 곳으로 돌아오니, 손님이 우리 9명 외에 2명 더 늘었다.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느라고 늦어진 모양이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 큰 배낭에 카메라와 물병을 들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돈을 아끼려는 건지, 아니면 고창고성을 걸으며 자세히 관찰하려는 건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오면서는 당나귀가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출발지에 도착하니 당나귀도 화가 났는지 마부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일을 마친 후 그나마 마부가 당나귀에게 먹이를 주면서 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이곳에는 당나귀 마차가 7-8대 있는데, 그들이 교대로 운행을 해 당나귀를 아주 혹사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

고창성 1,500년 역사이야기

고창고성 지도
 고창고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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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高昌, Qarahoja)은 오아시스 도시로, 그 이름을 '지세가 높고 넓으며(高敞) 사람들이 번창(昌盛)할' 것이라는 네 글자에서 따 왔다고 한다. 고창에 왕국이 들어선 것은 460년이다. 유연(柔然)이 고창지역을 지배하던 북양의 저거(沮渠)씨를 추방하고 감백주(阚伯周)를 세워 고창왕이라 칭했다. 이후 499년 왕권이 국가(麴嘉)에게로 넘어갔고, 이때부터 국씨고창국이 시작된다. 국씨고창국은 약 150년간 지속되다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고창고성 유지는 국씨고창국 시기에 건설된 것이다. <수서>(隋書)「고창전」에 의하면, 고창성은 둘레가 1,840보로 6리(里)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을 볼 때 가로 세로가 각각 3,600m나 되는 정사각형 구조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성에는 7개의 문이 있었고, 성문으로부터 북쪽의 궁성에 이르는 큰 길이 있었다고 한다.

고창고성
 고창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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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들어 이 지역을 고창회골국이 통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고창고성을 재건하고 확장하였다. 이때부터 궁성이 있던 자리를 왕(가한, 칸, Khan)이 사는 곳이라 해서 가한보(可汗堡)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외성을 확장하여 북쪽과 서쪽에 자성(子城)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고창성의 가로 세로 길이는 각각 5,000m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고창국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1383년 차라대(察合臺)의 후손에 의해 멸망했다. 1389년 이 지역은 무굴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통치의 중심이 서쪽에 있는 현재 투르판 시로 옮겨졌다. 그에 따라 종교도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바뀌게 되었다. 1472년경부터 투르판은 명나라와 조공무역을 통해 교류하였고, 그러한 전통은 청나라 때까지 이어진다.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얻은 교훈

아스타나 고분 사당과 십이지신상
 아스타나 고분 사당과 십이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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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성을 보고 나서 우리는 북쪽 삼보향(三堡鄕)에 있는 아스타나(阿斯塔那)고분을 찾아간다. 아스타나고분은 3-8세기 고창국 왕과 귀족무덤으로 면적이 10㎢나 된다. 아스타나는 '영원히 잠든 곳'이라는 뜻을 가진 위그루어다. 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가니 십이지신상과 사당이 우리를 반긴다. 최근에 만든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는 별로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무덤을 보기 위해 오른쪽 문으로 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가장 먼저 간 곳이 당나라 시대 만들어진 부부합장묘(210호)다. 현실 안에는 미라만 두 구 있다. 유리관 안에 있는데,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부장품으로는 목기, 동경, 토용 등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진 상태다.

꽃과 새가 그려진 벽화
 꽃과 새가 그려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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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찾아간 215호 무덤 역시 합장묘인데, 현실 안에는 벽화만 남아있다. 생활과 관련된 6폭 병풍으로, 꽃과 새가 그려져 있다. 벽화의 길이는 3.75m이고, 높이는 1.45m이다. 그림에 표현된 새는 기러기, 원앙 등이고, 꽃은 난과 백합 종류다. 그리고 하늘에는 새와 꽃에 비해 작은 제비가 나는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216호 무덤에도 시체나 부장품은 없고 6폭의 병풍형태로 된 벽화 '감계도(鑑誡圖)'가 있다. 감계도란 지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하는 그림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네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중 가운데 두 사람이 금인(金人)과 석인(石人)이다. 밖의 두 사람은 글씨는 없으나 옥인(玉人)과 목인(木人)으로 보인다.

예교사상을 전하는 벽화
 예교사상을 전하는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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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중국 전래의 예교(禮敎)사상을 전하려는 의도로 그려졌다. 입을 천으로 가린 금인은 입을 다물어 언행을 조심하라는 경고다. 겸허와 근신을 상징한다. 석인은 돌처럼 굳게 흔들리지 말라는 경고다. 시대의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광정시폐(匡正時弊)를 상징한다. 옥인은 깨끗한 성정을 함양하여 물욕을 절제하라는 경고다. 청렴결백을 상징한다. 목인은 구부러지지 말고 바르게 살라는 경고다. 무위정직(無僞正直)을 상징한다.

이들 네 사람 밖 양쪽으로는 종과 도자기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들 4개 고분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우리 팀원들이 안 보인다. 문화유산을 자세히 살펴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가 항상 늦는 편이다. 그래도 나는 사당과 12지신상을 마지막으로 다시 살펴본다. 그리고는 매표소 입구로 나온다.

투르판 고온 정황
 투르판 고온 정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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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곳에 더위와 관련된 도판과 해설이 걸려있다. 제목이 '연내 고온정황'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르판은 바다에서 제일 먼 거리에 있다. 비가 아주 적어 연 평균 강우량이 16㎜이다. 증발량은 3,000㎜에 이른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가문 지역 중 하나다." 그리고 기온을 나타내는 도표가 그려져 있는데, 7월 기온이 가장 높아 48℃이고 1월 기온이 가장 낮아 -15℃이다.


태그:#고창고성, #국씨고창국, #사원, #아스타나 고분, #감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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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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