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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함유선 옮김. 밝은세상 펴냄.
▲ <케네디와 나>(장폴 뒤부아 지음) 겉그림. 함유선 옮김. 밝은세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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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상실감이라고 할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아예 둘 다라고 할까. 마흔 다섯 살 중년 남성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마비 증상의 대상은 바로 세상 모든 것! 세 아이의 아빠, 한 아내의 남편,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중년은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 나도 '삶 한 가운데'를 무덤덤하게 지나칠 테고 결국엔 '삶 저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문득 별 생각 없이 또는 정신없는 상태에서 지나쳐버리고 말 그때를 무작정 바라보게 된다면 난 어떤 모습일까.

아내도, 아이들도, 심지어 나도 눈에는 보이지만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을 때 그걸 보는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게는 아직 상상에 불과한 일이지만 이 중년 남성에겐 현실 아닌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 난 내 중년의 한 가닥 실을 이룰지도 모를 (달갑지는 않은)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전직 작가, 아니 여전히 작가이다. 더 이상 글은 쓰지 않지만. 세 아이의 아빠다. 서로 그러려니 하고 사는 사이이지만. 사랑이 아니어도 여전히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멀쩡한 아내의 멀쩡한 남편이다. 아내의 '바깥 친구'를 알고도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는 무감각이지만. <케네디와 나>(장폴 뒤부아 지음/밝은세상 펴냄)의 주인공인 이 남자는 지금 권태도 무엇도 아닌, 갑자기 찾아온 헛헛한 중년을 겪고 있다.

중년의 한복판에서 멈추어버린 남자...지금 어딘가에 또!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흔 다섯 해를 살았노라고 자랑할 것도 아니고 아이 셋을 낳아 잘 길렀다고 자랑할 것도 아니고 아내 힘을 빌려 살아가는 중이라고 자랑할 것 같지도 않은 글 쓰지 않는 작가. 글 쓰는 일만 멈춘 게 아니라 삶이 통째로 멈추었다. 살아온 발자취는 막상 되돌아보자니 그냥 과거일 뿐. 마흔 다섯이며 일이 없고(일을 멈추었고) 그다지 부모에게 기대지 않는 아이 셋과 가족 생계의 주도권을 잡은 아내를 바라만보는 이 남자. 그는 사무엘 폴라리스이다.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말하자면 아내와 세 아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혼자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한집에 살지만 더 이상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른바 한 가족이라는 일체감을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감정은 파편화되어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렇다고 우리 중 그 누구도 각자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 살 만큼 똑똑하거나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닌 채 서로 멀어졌다. 오늘도 한 집에 모여 보통 가족의 관습과 행태를  그대로 흉내 내며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 무엇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유일한 자존심이라도 되는 사람들처럼 서로 모른 체하며 지낸다."(9쪽)

글을 써대다 멈춘 때는 벌써 두 해 전. 그간 글로 모은 돈도 거의 꼬리를 감추었고 아내에게 얹혀사노라고 말하는 그는 "아내가 나에게 그 정도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현실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작가도 그 무엇도 아닌 언젠가 사라져버릴 마흔 다섯 중년 남성일 뿐이라는 말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도움 좀 받고 그렇게 산다한들 뭘 그리 큰 문제일까 싶은 것. 언젠가 그처럼 중년이 될, 그를 읽어대는 또 한 남자가 짐짓 그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중이다.

무작정 사버린 권총 한 자루. 그 권총은 지금 그의 책상 한 구석에 그대로 버려져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감추지 않았다. 감출 것도 없는 허우대만 멀쩡한 중년 남성이 뭘 그리 감추고 말고 하겠는가. "아마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떨쳐내기 힘든 확신(!)만 늘려갈 뿐이다.

그가 글쓰기를 그만 두었을 즈음에 아내 안나 폴라리스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언어치료사로 한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첫째 아이인 사라는 사무엘 눈에는 치과 교정학을 공부 중이며 젊은 여성의 욕구만 가득한 제 멋대로 사는 딸일 뿐이고, 쌍둥이 아들들인 나탄과 자콥은 외아들로 자란 그에겐 이해하기 힘든 것을 아는 그렇고 그런 철부지들일 뿐이다.

아내는 자기 대신(?) 바쁘다. 그러니 아내가 뭐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집 안에 갇힌 남편 대신 바쁘고도 헛헛한 삶을 풀어낼 '친구'가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있는 이비인후과 '남자'의사 로베르 잔센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사무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하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알며 산다. 그리고 직접 잔센의 얼굴을 확인해두기도 한다. 사무엘은 지금,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서 제 힘으로 번 돈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집안에서 멈춘 마흔 다섯 살 된 중년 남성이다.

"폴라리스 선생, 1962년 매사추세츠에서 미국의 한 대통령이 이 시계를 선물로 받았고, 그 다음해에 암살당했습니다. 한데 선생이 단지 마뉴스 문트라는 이름을 가진 형편없는 치과의사를 물어뜯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시계가 어느 날 이 방에 와 있는 당신의 손 안에 들어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해본 적 있습니까? 해밀턴 시계가 선생의 손 안에 들어있게 되기까지 벌어졌던 모든 사건과 필연적인 우연의 일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결과를 빚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 배경,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으로 이루어진 무대장치 그리고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들러리들의 찬조출연을 생각해 보세요."(184쪽)

사무엘은 한 치과의사를 물어뜯었다. 치과 교정학을 전공 중인 딸 사라에게 엉뚱한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불만 가득한 사무엘에겐 뭐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라의 남자친구 역시 치과 분야에서 일할 사람이다. 사실, 그의 돌발 행동은 치료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기보다는 치료 뒤 부어오르는 입을 따라 함께 부어오른 이름도 다 붙이기 어려운 오래된 불만들 때문인 것 같다. 너무 오래 병원을 가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는 어느덧 냉소가 가득 섞인 불만들을 예상치 않은 때에 갑작스레 드러내곤 한다. 사무엘은 지금,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서 제 힘으로 번 돈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집안에서 멈춘 마흔 다섯 살 된 중년 남성이다.

엉뚱한 사건 뒤에도, 자신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 빅토르 쿠리아킨의 시계를 갖기 위해 또 다른 억지 노력을 다하는 사무엘 폴라리스. 아내 안나는, 참아도 될 일에는 사고를 내고 아내의 비밀에는 오히려 무덤덤한 남편을 보며 근심하는 중에 문득 남편 아닌 남자와 '관계'를 맺는 어머니를 보고 말았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만 보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불안한 몸짓들로 사는 이유를 물어대긴 사무엘이나 안나나 마찬가지다.

'케네디와 나'의 관계는 딱히 설명하기 어렵다. 안나와 사무엘의 관계도 어느 순간부턴가 설명하기 어려운 멀고도 무덤덤한 관계가 되어버렸는데, 그것 못지않게 '케네디와 나' 역시 사실 아무런 관계가 아니다. 말하자면, <케네디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주위에 널린 것 같은 느낌들로 둘러싸인 채 언제 어디서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마흔 다섯 살 중년 남성을 있는 그대로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삶이 뭐냐고 또박또박 묻지는 않지만 온몸으로 세상을 흔들어대는 중년 남성, 그는 사무엘 폴라리스이다.

별 의미도 없는 눈물을 흘릴 이유마저 잃어버린 채 들릴까 말까할 만큼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알리는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들이 혹 바로 옆에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 사람이 바로 <케네디와 나>를 읽는 이 자신은 아닌지 모르겠다. 별 관계도 없고 정말 케네디의 시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케네디 시계를 손에 쥔 채 끝나버리는 사무엘의 이야기에 못내 아쉬운 중년의 이야기를 덧붙여줄 이가 혹 지금 있을지...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케네디와 나>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세상, 2006.
Kennedy et moi by Jean-Paul Dubois



케네디와 나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세상(2006)


태그:#케네디와 나, #장폴 뒤부아, #외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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