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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旁岐曲逕(방기곡경)'.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이 아닌 '샛길과 굽은 길'을 일컫는 말로, 바른 길을 좇아서 정당하게 순탄하게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왕도정치의 이상을 다룬 저서 '동호문답'에서, "제왕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구태를 묵수하며 고식적으로 지내거나 외척과 측근을 지나치게 중시해 복을 구하려 한다면 소인배들이 그 틈을 타 갖가지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 말을 <교수신문>이 올해의 한자성어로 뽑았다. 사유인 즉슨,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4대강 사업 추진, 미디어법 처리 등 굵직굵직한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동의 정당한 방법이나 절차를 구하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한 행태가 이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

그런데 <교수신문>에 앞서 이 말을 사용한 곳이 있다. 바로 한나라당이다. 금년 6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를 막기 위해 민주당이 문방위 회의장을 봉쇄하자, 한나라당 대변인 윤상현이란 자가 "방기곡경(旁岐曲徑)으로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민주당"이란 제목을 달아 논평하기를,

"국회가 민주당의 물리적 방해로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일을 순리대로 정당하게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한다하여 '방기곡경(旁岐曲徑)'이라 한다.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민주당의 난처함이 오죽하겠는가..."

고 이죽거려 마지 않았다. 생각컨대, 이 말을 내뱉었을 때만 해도 그것이 되레 자신들을 옭죄는 말이 될 줄은 차마 꿈에도 상상 못 했을 게다.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난처함"이 민주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몫이 될 거라는 사실 또한. "'방기곡경'이 기가 막혀"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길위에서 길을 잃은 것"은 그러나 한나라당만이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개혁정권 하에서 '비판신문'을 자임하다가 이명박 정권 들어 '어용신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조중동도 '방기곡경' 앞에서 길을 잃기는 마찬가지.

매년 년말이 되면 '올해의 한자성어'를 꼬박꼬박 소개해 올리기로 유명한 조선일보가, 2009년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데도 '방기곡경' 단어는 물론이고 <교수신문>이 '올해의 한자성어'를 선정했다는 팩트마저 지면에 반영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노무현 정부 첫 해인 지난 2003년, 조선일보는 12월 20일자 2면에 <올해의 사자성어 右往左往 교수들 선정> 기사를 싣고, 22일엔 '만물상' 칼럼 <四字成語>를 통해 "어느 하나도 희망적이거나 교훈적인 것 없이 그저 암담하고 답답할 뿐이다"고 검은 한숨을 내뿜었다.

이어 2004년에도 <黨同伐異'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四字成語>(12.25) 기사를 1면에 크게 싣고, 같은 날 '만물상' 칼럼 <당동벌이>를 통해 "자기하고 같은 편은 무조건 깨끗하고 정당하며, 생각이 다르면 부도덕하고 잘못됐다는 소인의 독선적 사고가 2004년 한국을 휩쓸었다"고 거세게 쏴붙였다. 그때 그 열심이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가 하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관련 소식을 전하면서, 교수신문이 '방기곡경'을 올해의 한자성어로 뽑은 이유에 대해선 함구하는 은폐 신공을 선보였다. '방기곡경'을 소개하면서 "세종시 원안 수정과 4대강 사업 추진, 미디어법 독단적 처리"를 거론하지 않은 신문지는 이 두 신문지 말고 없다. 역시 "'방기곡경'이 기가 막혀"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태그:#방기곡경, #올해의 한자성어, #한나라당과 조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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