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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농산물 축제 '장계 가는 날'에 가서 종진(17·가명)이 민정(15·가명)이 그리고 어머님과 내가 같이 놀러갔다. 구경꾼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배부터 채워야 하는 법. 임시로 설치된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해물파전과 도토리묵을 먹는데 종진이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기 시작했다. 여기 와서 '배 터지게 먹겠다'며 끝내 점심도 안 먹고 온 종진이는 양 손으로 수저를 들고 번갈아 입에 퍼 넣었다.

 

못 먹겠다고 버티던 민정이가 그 모양을 보고 겨우 먹기 시작했다. 근데 종진이가 문득 나를 쳐다보더니 꺾는 시늉을 했다. '씩' 쪼개며.

"엉? 한 잔?"
술 한 잔 하자는 거냐고 내가 눈짓으로 물으니 옆에 있던 민정이가 한 발 앞서 나간다.
"소주? 막걸리?"

 

종진이는 무슨 조폭처럼 말 한마디도 않고 계속 손짓으로 꺾는 시늉만 반복했다. 술을 먹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괜히 내 앞에서 으쓱이는 게 귀여웠다. 내가 5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막걸리 한 병을 사 오게 했다. 민정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금세 막걸리 병을 하나 휘두르며 돌아왔다. 그런데 잔돈이 2천원이었다. 막걸리 한 병에 3천원이란다.

 

바로 코앞 농협매장에서는 840원 하는 걸 뻔히 아는 나는 외지에서 온 손님들 대상으로 하는 장사라 해도 너무 비싸다며 막걸리를 물리자고 했다.

 

민정이가 질겁을 했다. 자기는 미안해서 절대 못 간다고 했다.

"제 체면이 뭐가 돼요? 저도 체면이 있다구요. 방금 사 놓고 이유도 없이 어떻게 물려요."
"괜찮아. 아빠가 안 드시겠다고 한다고 둘러 대."
아무리 등을 떠밀어도 못 간단다.

종진이한테 가라고 했더니 이 녀석은 가위바위보 하잔다. 그럼 둘이서 가라고 했더니 셋이서 가잔다.

 

결국 내가 졌다. 셋이서 함께 갔다. 나는 당당히 물렸다.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시겠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장계면 부녀회에서 차린 점포 같았다. 그래서 차마 코앞 농협매장에 가서 막걸리를 사 올 수가 없었다. 부녀회 기금 마련하려고 애들 쓰는데 야박하게 굴기가 미안해서다.

 

어쨌든 우리 '스스로세상학교' 아이들의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성숙함, 상거래에서의 신의성실, 함부로 뜻을 바꾸지 않는 일관성이 대견스러웠다. 이들이 축제마당을 두루 살피러 가고 없을 때 나는 혼자 매대로 가서 5천원 짜리 한 장을 드리면서 '성금' 이라고 했다.

사실 우리 식탁에 놓였던 해물전, 도토리묵, 단술, 김치는 모두 돈 주고 산 것이 아니었다.
한 젓갈 쑤시다 그냥 두고 일어서는 손님들이 두고 간 음식을 거둬 모았던 것이다. 종진이와 민정이가 인상을 찌푸리건 말건 나는 단호했다.

 

파종과 재배, 그리고 운송. 더구나 요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화탄소를 만들어 내고 화석연료를 태워가며 이 자리에 오른 이 음식들을 절대 사람의 몸을 거치게 하지 않고는 두 눈 멀쩡히 뜨고 그냥 쓰레기 통으로 보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이 먹던 것은 안 먹는다는 것은 못된 미신이라고 강변도 했다.

 

나의 음식에 대한 태도에 제법 익숙한 종진이는 곧 수저를 들었으나 ‘스스로세상학교’에 갓 온 민정이는 한참만에야 젓가락을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가 먹은 음식값에 해당하는 돈을 성금으로 드린 것은 민정이의 '체면'에서 배운 바 크다. 내 배가 체통을 지켜야 내 머리도 체통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당연히 계산대의 아주머니는 눈을 황소눈깔 만큼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이럴수가, 이럴수가'라고 했다.

 

종진이와 민정이가 돌아왔을 때 내가 음식 먹은 감사함으로 성금 5천원을 냈다고 했다. 좀 감동을 하라고 한 말인데 이놈들은 맨송맨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남은 음식 거둬 먹일 때는 찡그리더니 금세 다 잊었나보다.


태그:#스스로세상학교, #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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