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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북남작가대회에 참석해 백두산 천지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 <조국은 하나다>를 낭송하고 있는 소설가 정지아
 지난 7월 북남작가대회에 참석해 백두산 천지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 <조국은 하나다>를 낭송하고 있는 소설가 정지아
ⓒ 정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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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부모님의 삶을 기록한 <빨치산의 딸>을 썼을 때 나는 스물넷이었다. 제법 잘 팔리던 <빨치산의 딸>은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매금지처분을 당했다.

출판사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은 정보기관에 빼앗겼다. 그 후로도 책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빨치산의 딸>이 팔린 것은 문학성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가려져 있던 역사의 한 부분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두어 해 전 복간하겠다는 출판사가 있어 오랜만에 <빨치산의 딸>을 다시 읽었다.

세상을 다 아는 듯싶었지만 스물넷은 결코 인생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어서 다시 읽으니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실이었다. 진실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과 사유도 절대 막을 수 없다. 총칼 앞에 잠시 침묵하는 듯해도 언젠가 진실은 어둠을 뚫고 화산처럼 폭발한다.

“법은 의복과 같다. 법과 의복은 봉사해야 할 사람 몸에 꼭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정신을 대변한다는 존 로크의 말이다. 국가보안법은 이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지난 시대에 꼭 맞는 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을 통해 독재정권은 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 자유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국가보안법이 막으려 하는 사상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로크의 말처럼 법이 봉사해야 할 사람 몸에 맞게, 그러니까 그 시대와 인간에 맞게 변화하듯, 사상 또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간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21세기의 신화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또한 봉건주의라는 낡은 체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사회주의의 도전에 직면하여 수없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국가보안법,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시대에 꼭 맞는 법

<빨치산의 딸> 겉표지
 <빨치산의 딸> 겉표지
ⓒ 필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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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응한 자유민주주의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그 유연성에 있다.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랄 수 있는 유연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대한 거액의 보상 판결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몇 방울 눈물을 떨궜다. 지금이라도 인혁당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한 것이 반가워서는 아니었다. 오래 전 어느 글에서 읽었던, 글에서 보았으나 내 일인 듯 생생하게 하나의 영상으로 떠올랐던 한 아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놀이터에 묶여 아이들의 돌멩이 세례를 받았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빨갱이의 자식은 판검사도, 공무원도 될 수 없었던, 그런 야만의 시절이 있었다.

사회주의가 막을 내리고, 우리의 주적(主敵)이자 같은 민족인 북한마저 자본주의 경제를 수용하기 시작한 요즘에도 지난 시대의 의복을 움켜쥐고 있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국가보안법에 관하여 글을 써야한다고 했더니 아직도 그 법이 폐지되지 않았느냐고 의아한 듯 물어온 친구도 있는 이 마당에 말이다.

인간도, 사회도, 나이가 들수록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인간은 정의되어지지 않는 존재다. 시간 속에서 변화 성장하는 까닭이다. 국가보안법은 인간과 사회를 옥죄고 있는 굴레이다. 그러나 인간도 사회도 결국은 그 굴레를 깨고 성장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므로. 다만, 그 동안에 굴레로 인하여 누군가 흘려야 할 서러운 눈물이 안타까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회의 소속 작가 정지아 소설가가 쓴 글입니다.



태그:#정지아, #국가보안법, #빨치산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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