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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에는 밥을 밖에서 사먹는 일이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래도 더러 사먹을 때가 있었는데, 아마 부모님 따라 어디 놀러간다든지, 서울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가는 길에서였지 싶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서 밥을 먹을 때면 으레 값싼 밥집을 찾곤 했는데, 밥집마다 유리문에 ‘백반’이라고 써 붙여 놓아서, “뱀 잡을 때 쓰는 백반을 사람이 먹는단 말인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습니다. ‘백반’이 ‘흰밥’을 한자로 적은 ‘白飯’을 가리키는 말인 줄은 2001년이었나? 나이 서른 줄에 거의 가까워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이 ‘백반’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아서 왜 저런 말을 써 붙였는지 물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 백미(白米)
 └ 현미(玄米)

 

 요새는 쌀밥을 먹어도 누리끼리한 쌀밥을 먹습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흰 쌀밥만 먹었습니다. 또한, 밥을 먹어도 밥맛을 따로 느끼지 않고 배 채우려는 생각으로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밥 한 숟가락을 퍼먹어도, 밥을 한 사람 마음을 느낍니다. 이 밥이 쌀이 되기까지 땀흘려 논에서 일한 농사꾼 손길도 느낍니다. 그래서 우물우물 씹는 동안 밥에서 퍼져나오는 밥물이 그냥 밥물이 아니라 눈물이거나 피눈물이거나 땀방울이라고도 느껴서, 잘 지은 밥을 먹으면 기운이 곱으로 솟습니다. 대충 지은 밥을 먹으면 속이 메스껍기도 하고, 밥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사람 머리속에 무엇이 들었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밥을 푸대접하는 사람이 이웃을, 남을, 다른 목숨붙이를 고이 돌보거나 대접할까요?

 

 ┌ 흰쌀 / 흰 쌀밥 - 흰밥
 └ 누런쌀 / 누런 쌀밥 - 누런밥

 

 낱말책을 보니 ‘흰쌀’은 올라 있습니다. ‘누런쌀’은 올라 있지 않습니다. ‘흰밥’이란 말도 보이는군요. 하지만 ‘누런밥’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농사꾼도 ‘백미-현미’라고 말할 뿐, ‘흰쌀-누런쌀’이라 말하는 분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농사짓는 분들부터 ‘희다-누렇다’라는 말을 쌀에 붙이는 이름에 잘 안 쓰니, 돈만 내고 쌀을 사먹는 도시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희다-누렇다’라는 말을 즐겨쓸까 싶기도 합니다. 한편, 돈으로 쌀을 사먹는 도시사람들이라 해도 ‘흰쌀-누런쌀’이라고 쓰면 훨씬 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꼭 국어사전에 나온 말만 써야 하나요. 국어사전에 안 실렸다고 우리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두 논밭에 엎드려 일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서로 부대끼며 자기 삶을 가꾸는 사람들임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가 쓰는 말도 우리 삶에서 비롯하는 말, 우리 삶에서 자연스레 샘솟는 말을 찾아서 쓸 때가 더 알뜰하고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그래, 저는 앞으로 ‘현미’ 아닌 ‘누런쌀’을 먹으려 합니다. 조금 앞서도 느즈막히 저녁밥을 지어서 고구마 숭숭 썰어 넣은 누런 쌀밥을 맛나게 한 그릇 비웠습니다.


태그:#우리말, #우리 말, #흰쌀, #백반,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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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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