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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대구 중앙도서관 전시실에서 저의 사진전인 '정만진 백령도 사진전'을 엽니다. 아직 백령도에 가보지 못하신 분, 멀어서 대구까지 사진 졸전을 보러 올 수 없는 벗들을 위해 <오마이뉴스> 지상 사진전도 엽니다. 작품이 많아 3회에 나누어서 게재할까 합니다.

7월 27일은 휴전일입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하였지요. 그래서 아직도 휴전 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휴전을 넘어 종전으로, 나아가 통일로 가야겠습니다. 그러니까 7월 27일에 사진전을 여는 것은,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휴전을 한 날, 나아가 종전을 선언한 날, 마침내 통일을 이룬 날도 기억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뜻입니다.

김상용은 '왜 사냐면/ 웃지요'라고 읊조렸습니다만, 왜 백령도 사진전인가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격파한 고구려 군사들이 주둔하던 섬, 서해에서 가장 서북단에 있는 섬, 북한 장산곶과 불과 12km밖에 아니 떨어진 섬, 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를 앞바다로 거느린 섬, 또한 심청이 다시 살아나 이 세상 모든 맹인들의 눈을 두루 뜨게 만든 섬, 그리하여 민족자존과 상생, 통일의 기운을 상징하는 섬, 바로 백령도! 이만 하면 그 혼자만을 위해 사진전을 열어줄 만한 대단한 섬이 아니겠느냐!"

▲ 작품번호 1. 백령도 가는 길-1
ⓒ 정만진
인천에서 백령도까지 가는 데는 '초' 쾌속정으로도 4시간 이상 걸린다.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날듯이 달려가는 배의 기세는 서[黃]해의 '푸른' 물을 아주 새하얗게 바꾸어버린다. 배의 고물에선 태극기가 나부낀다. 출입문에는 '운항 중에는 난간에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이 붙어 있었지만, 객실 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바람과 안개, 부서지는 파도를 즐기며 서해 한복판에 서 있었다.

▲ 작품번호 2. 백령도 가는 길- 2
ⓒ 정만진
배는 섬으로 간다? 그렇지 않다. 배는 뭍으로 간다? 역시 그렇지 않다. 배는 섬에서든 뭍에서든 언제나 바다로 간다. 섬이나 뭍이 목적지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가는 길, 그것이 인생이다. 물보라가 있고, 섬이나 뭍이 보이고, 그러나 배는 보이지 않는 길, 바다만 있는 길, 그것이 사람의 길이다.

▲ 작품번호 3. 백령도 가는 길-3
ⓒ 정만진
안개가 자욱하다. 이래서야 백령도까지 갈 수 있을까?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의심해 왔다. 고통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카뮈는 진작 그것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다. "나무는 허다한 고통을 겪은 후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겨울은 늘 봄 속에서 끝나는 법이다." 안개, 멀미, 구토, 권태……, 이런 시간들이 곧 백령도 여행이다.

▲ 작품번호 4. 사곶 사빈의 안개-1
ⓒ 정만진
사곶 사빈(沙濱). 옹진군지는 이곳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있다. '사빈'이란 '모래땅' 정도의 뜻이다. 모래밭이나 모래사장이 아니라 모래땅이라…… 마을 이름도 그렇다.

모래 사(沙)에 땅 곶(串)이다. 그냥 모래가 아니라는 뜻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시멘트처럼 단단하여 비행기도 뜨고 내릴 수 있는 천연비행장이다. 세계에 단 두 곳뿐이다. 인천에서 출발한 지 네 시간만에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사곶 천연비행장이 있는 용기포 항구에 도착했다.

▲ 작품번호 5. 사곶 사빈의 안개-2
ⓒ 정만진
사곶 해수욕장은 폭 150m, 길이 4km에 이르는 천연 비행장이다. 이곳에 비행기가 처음으로 뜨고 내린 건 '한국전쟁' 때이다. 전쟁이 사곶해변을 천연기념물(제319호)로 만들어준 셈이다.

이렇게 비행기가 자연스레 뜨고 내릴 수 있는 모래땅은 세계에 단 두 곳밖에 없는데, 다른 한 곳은 이탈리아의 나폴리 해변이라 한다. 하지만, 나폴리 해안은 폭이 좁고 길이가 짧아서 사곶 해변과는 견줄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 작품번호 6. 사곶 사빈의 안개-3
ⓒ 정만진
사곶 해변은 여름철에 해수욕장으로 쓰이는데, 절반은 일반인이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군인들이 사용한다고 한다. 군인들은 이곳에서 해수욕을 하는 게 아니라 훈련을 한다. 군인들이 민간인에 비해 견줄 수 없을 만큼 고생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모래가 덕지덕지 묻지 않고, 바닷물까지 깔린 모래땅이 너무나 편편한데다 바위 같은 돌출물이 전혀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에게는 아주 좋은 해수욕장이다.

사진은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사곶 사빈 전체를 찍은 것이데, 모래땅보다는 안개가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사람세상에도 그런 일은 많다.

▲ 작품번호 7. 사곶 사빈의 안개-4
ⓒ 정만진
안갯속의 사곶 해변. 멀리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처음에는 해무(海霧)가 짙은 것을 원망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처럼 안개가 짙지 않다면 언제 이런 풍광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릴 만큼 단단한 모래밭이라는 건 밟아보면 아는 일이지만, 햇살이 환한 모래사장 풍경은 다른 곳에 가서도 볼 수 있는 일 아닌가. 오늘 정말 안개가 잘 끼었다. 그것도 이렇게 잔뜩…….

▲ 작품번호 8. 사곶 사빈의 안개-5
ⓒ 정만진
사람들이 '비행기처럼' 모래땅 위로 몰려들었다. 정말 발이 들어가지 않는다. 신기하다. 트럭이 그냥 고속도로를 달리듯 모래 위를 오가고 있다. 옹진군지는 곡괭이로도 파이지 않는 모래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 신기한 모래땅이다. 어른들이 저렇게 모래를 밟으며 낭만을 즐기는 것도 '신기한' 풍경이다.

▲ 작품번호 9. 안개, 배
ⓒ 정만진
인천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만에 백령도에 도착했다. 흔히 용기포 항구라고 부르는 작은 포구이다. 옛날 명칭은 용기원이다. 그래서 포구 바로 뒤의 산이름이 '용기원산'이다. 원(院)이라 불렀다는 것은 옛날에 중앙 정부의 관원이 와서 묵었다는 뜻일 게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도착했으니 이곳에 머무르며 일을 본 것이야 당연하다. 그나저나, 짙은 해무에 가려 한 치 앞도 안 보이니 이윽고 절경(絶景)이 보인다. 지금까지는 뛰어난 경치가 절경인 줄 알았는데, 오늘부터는 다른 어수선한 것들을 주변에서 끊어주면[絶] 그가 곧 경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작품번호 10. 안개, 마을회관
ⓒ 정만진
고향을 보는 것 같다. '마을회관' 네 글자의 느낌이 더 이상 대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정취를 선사해준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붕 위로 (아니, 본래부터 '집웅'이 없는 건물인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전깃줄이 지나가는 것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풍경사진을 찍을 때마다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바로 전깃줄이다.

카메라로 볼 때는 없었는데 사진을 뽑아보면 그게 나타나니, '돌아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그 전깃줄이 정말 아름답다. 저 전깃줄이 없으면 이 사진이 되겠는가. 아무리 안개가 도와준다 해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길러야겠다. 그것이 행복이다.

▲ 작품번호 11. 안개, 이정표
ⓒ 정만진
이정표는 길을 찾게 해주는 '친절'이다. 그런데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이정표는 아름답다. 날씨가 화창하면 그저 그랬을 것이다.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고 했던가. 심청각, 사자바위, 중화교회, 두무진. 이 네 곳에 가보라고 권하는 이정표의 내용보다 나는 문득 안개가 더 고맙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자바위는 별무신통이고, 중화교회는 출입금지 되어 있었다.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은 그저 '안개'에 불과하고 자연의 안개가 다만 아름다움을 생산할 뿐이다.

▲ 작품번호 12. 안개, 천연비행장-1
ⓒ 정만진
이 아득한 느낌, 혹은 이 아늑한 느낌을 또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파도의 사연이 세월의 흔적처럼 곱게 새겨져 있다. 아무도 없으니 더욱 아찔한 풍경이 되었다. 배를 타고 서해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달려온 보람을 만끽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촬영할 수 있는 기자재를 소유하지 아니한 나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 작품번호 13. 안개, 천연비행장-2
ⓒ 정만진
저 멀리 사람이 보인다. 사람은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멀리 보이는 게 훨씬 아름답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젠 늙었는가 싶다. 아이들은 바로 앞에서 움직이는 게 정말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가. 어쨌든, 이제는 마침내 풍경 속의 한 부분처럼 멋지게 녹아든 저 사람들은 저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특히 허리를 구부린 저 빨간 모자를 쓴 아가씨는……?

▲ 작품번호 14. 천연비행장 풍경-1
ⓒ 정만진
아름다운 해변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내가 바닷가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살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우리나라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프랑스 등지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도 그냥 눈으로만 휘휘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로 쓰는 사람은 해변처럼 아름답다. 카메라를 바짝 모래 가까이 가져가 아름다운 그 무엇을 찍는 모습이 아름다워 내가 다시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 작품번호 15. 천연비행장 풍경-2
ⓒ 정만진
파도는 스쳐 지나갔지만 모래에는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가자 내게 많은 상처가 남은 것처럼…….

#백령도#지상 전시회#사곶#안개#천연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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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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