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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면'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된, 따라서 경북 김천시에서도 개발보다는 보존을 먼저 생각하는 그곳이 바로 증산면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시인들이 증산을 찾아 시상을 떠올리고, 그 시(詩)들은 수도천과 옥동천의 맑은 물을 따라 대가천에서 합류하여 우리 가슴으로 밀려든다.

하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곳 자연풍경에 취하면 한 편의 시 정도는 쉽게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오늘 나는 산간오지 증산으로 앞서 간 시인들의 발자취를 좇아본다.

▲ 증산면에서 동류하는 대가천의 맑고 깊은 물이 무심한 세월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 장동언
삶의 길은 따뜻하다. 그것도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들은 더욱 따뜻하다. 숲이 한껏 부풀어 있고 한적한 들녘,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논에서 농부가 토닥토닥 일을 하는 풍경은 정말이지 따뜻하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몸을 부대끼는 이곳은 한 때 우리 조상들의 척박하고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이 아니던가. 한 뼘의 땅을 생명처럼 일굴 수밖에 없었을 가난, 따라서 이곳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땀과 눈물을 바쳐왔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보내며 서둘러 증산으로 향하니 마을들은 물 맑은 대가천을 끼고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고이 잠들어 있는 듯 그렇게 산비탈에 포근하게 붙어있었다. 냇물 위로 스멀스멀 물무늬가 다가온다, 투영되는 것은 모두가 쪽빛 자연이다. 그래, 정말 자연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증산에 가까워질수록 가벼워지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속으로 안온하게 스며드는 자유, 어느새 나는 서글퍼지도록 자유를 만끽하는 내츄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김천의 최남단 오지면 증산(甑山)

증산면은 거대한 육산의 수도산(1317m)과 단지봉(1321m), 목통령, 형제봉(1022m) 등 세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해발 350m 이상의 산간지역이다. 총면적(75.21㎞)의 86.3%가 임야로 구성되어 있고, 북의 황정 및 부항리에서 발원된 남암천과 서의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 그리고 남의 황점 및 장전리에서 비롯된 목통천이 흘러 면소재지 아래에서 합수, 옥류천을 이루어 성주군으로 동류한다.

겨울철 심설산행과 가을 억새산행지로 급부상하는 수도산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유학자 정구선생이 노래한 무흘구곡의 일부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들은 이미 호젓한 가족피서지로서 정평이 나있는지 오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두 유명사찰(청암사와 수도암)이 불령산 자락에 부처처럼 앉아 있고, 먼 옛날 이 두 사찰조차 암자로 거느렸던 대찰(大刹)쌍계사의 절터가 문화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하여 관련 학술인들이 문화재 답사겸 즐겨 찾는 곳 또한 증산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마음속에 내재된 여행지를 이야기하지만, 이곳은 국내 어떤 빼어난 미항과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대지에 하루분의 짐을 푸는 일은 얼마나 평온한 축복인가.

증산면에 접어들면서 맨 먼저 만난 수승대, 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가벼운 포만감을 느끼며 자연의 향기를 들이켰다. 옥동천의 맑은 물이 목동천과 만나 대가천으로 합류하는 중심에 유유히 떠있는 커다란 바위 한 조각, 그것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유하고 싶었던 풍경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건 성급한 위로이겠는가.

수승대 뒤로 '물놀이 금지'라는 현수막이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오지만, 그러나 글귀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에 집중하고 있다. 한여름 휴가지의 정겨운 풍경, 여행이 이렇게 위로가 되는 건 어쩌면 계산된 공간을 버림으로 해서 소유할 수 있는 작은 여유의 보장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눈앞의 풍경과 사랑을 나눌 때 그리움도 저만큼 물러서고 그저 평화만 끊임없이 반복되며 말갛게 품속으로 스며든다.

차량의 속도를 천천히 유지하였건만 싱그런 여름풍경은 어느 사이 뒤로 밀리고 작은 다리 앞의 산그늘에 드리워진 정자 하나가 홀연히 스크랩된다. 바로 옥류동에 내재한 옥류각, 하면 여기서부터 무흘구곡은 다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7언 절구의 소재가 된 무흘구곡(武屹九曲)

무흘구곡이란 대가천의 맑은 물과 주변 계곡의 기암괴석, 수목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님(1543∼1620)이 중국 남송(南宋)시대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7언 절구의 시를 지어 노래한 시 속의 장소를 일컫는다. 본래 무흘(武屹)은 증산면 평촌리 장뜰(장평)에서 수도암(修道庵)으로 가는 길옆에 있던 작은 마을인데 폐동되었으며, 지금은 그저 한강선생님이 머물렀던 무흘재(武屹齋)만이 외롭게 남아있을 뿐이다.

천하의 산중에 어느 곳이 가장 신령스러울까 / 인간 세상에서 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 없다네 / 주부자께서 일찍이 깃들었던 곳 /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

계곡과 숲을 안고 있어 사색하고 명상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무흘구곡은 인근 성주군에 1∼5곡이, 김천시 증산면에 6∼9곡이 소재하고 있다.

무흘 제6곡 옥류동(玉流洞)

▲ 옥이 깨어져 흐르는 듯한 옥류동의 맑은 물 너머로 옥류각이 표표히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 장동언
광해왕 때 한강 선생님이 이곳에 유람을 왔다가 불령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흰 암반 위를 흐를 때 옥이 깨어져 흐르는 듯하다고 옥류동이라 이름 지었으며, 이곳으로부터 동쪽에는 일천제곱미터가 넘는 광대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벗인 허미수가 풍류를 즐기며 썼다는 옥류동(玉流洞)이라는 글씨가 반듯하게 암각되어 있었다.

웅장한 듯 소박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하는 옥류동, 진정 한강 선생님뿐 아니라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으리라.

육곡은 띠집이 짤막한 물 구비를 베고 있어 / 어지러운 세상사 몇 겹으로 막았던고 / 높은 사람들 한 번 가더니 지금 어딧나 / 바람 달만이 남아 만고에 한가롭네

옥류동을 만나면서 느낀 괜한 흥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순간 나는 차의 속도를 높이며 상류지역의 평촌리로 향했다. 만월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무흘 제7곡 만월담(滿月潭/선녀바위)

▲ 여섯 그루의 소나무가 서있는 만월담에도 지난날 폭우의 흔적은 곳곳에서 보여 진다.
ⓒ 장동언
증산면 평촌리에서 수도리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장평(장뜰)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100m 정도를 더 벗어나니 우측 계곡에 여섯 그루의 소나무가 보인다. 바로 만월담이었다.

소나무가 서 있는 곳, 그 아래는 병풍이 둘러쳐진 듯 곡선으로 휘어진 바위가 아랫도리를 물속에 깊게 묻은 채 우뚝 서 있었고, 그 바위엔 맑은 계곡물이 부딪치면서 용소가 형성되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만월담, 그것은 모양과 빛깔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내 탁한 마음에 묘한 끌림을 일게 했다.

칠곡 층층한 봉우리 돌 여울을 둘렀으니 / 이러한 경치 일찍이 보지 못 하였네 / 산신령 일이 좋아 잠자는 학 놀라게 하니 / 소나무 이슬 무단히 얼굴에 떨어져 차갑네

많은 생각을 밀어올렸던 만월담을 뒤로 하고 아쉽게 와룡암으로 발길을 돌린다.

청아한 물소리에 행인의 발길이 멈춰지는 수도계곡(修道)

오롯한 여러 형상의 바위를 비집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 그것은 인간의 심중에 내재한 하찮은 탐욕을 모두 씻어내려는 듯 때론 웅장하게 때론 부드럽게 자연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른 바위 위를 걸어 계곡 아래로 내려가 물속에 손을 담가 본다. 단 1분도 버틸 수 없는 차가운 물, 그래서였을까. 아무리 들러보아도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고기가 살지 않는 원인을 너무 맑음으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면 그건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맑음과 차가움을 동시에 안고 있는 그만의 고독한 세계는 아니었을까.

무흘 제8곡 와룡암(臥龍岩)

▲ 골 깊은 수도계곡 그 한 켠에 자리한 와룡암이 거센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다.
ⓒ 장동언
바위형상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 와룡암 이다. 만월담에서 수도리 방향으로 수도계곡을 타고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헌데 내가 본 와룡암은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에 더 가까웠다고나 할까.

팔곡에서 가슴 헤치자 눈 더욱 트이고 / 냇물은 흐르는 듯 돌아오는 듯 / 연기와 구름 꽃과 새들 어울려 멋을 이루니 / 노니는 사람들 오고 간들 무엇을 상관하랴

방향을 바꿔가며 와룡암의 형상을 관찰하다가 다시 수도리로 향한다. 수도교를 지나고 계곡의 색다른 풍경들을 접하며 조금 더 올라가니 이번엔 웅장한 폭포소리가 마음을 빼앗는다. 용소폭포였다.

무흘 제9곡 용소(龍沼)폭포

▲ 용이 승천하듯 폭포의 웅장한 물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다.
ⓒ 장동언
소(沼)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명명된 용소폭포, 이 폭포의 높이는 17m이며 깊이는 명주실 타래가 다 들어갈 만큼 깊었다고 전해오나 현재는 3m 정도로 추정된다. 여기서 기우제를 올린 뒤에 용소가 울면 반드시 비가 내렸고, 그 울음소리는 10리 밖에서도 들릴 만큼 우렁찼다고 전해오건만. 그러나 장마 기간이라서인지 귀를 아무리 고쳐 세워도 용소의 울음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구곡에서 머리 돌이켜 다시 탄식하노니 / 내 마음은 산천만 좋아함이 아니로세 / 처음 샘 솟는 곳은 말하기 어려운 묘한 것이 있어 / 이를 두고 어찌 별천지를 물으랴

이렇게 무흘구곡을 쫓아 오다 보니 벌써 수도마을이다. 전날 수도암을 찾고자 했을 때 비가 내려 이곳 어느 분께 우산을 빌린 기억이 아련하게 살아온다. 수백 년이 된 구멍 뚫린 느티나무를 뒤로하고 천천히 가파른 길을 오르니 멀리에서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신비감 속의 사찰 수도암, 그러나 우기의 흐린 날씨 때문이었는지, 아님 안갯속에 휩싸여 있어서인지 분위기는 다소 몽환을 불러오고 있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피안의 정토 수도암(修道庵)

▲ 조용한 사찰 수도암의 아늑한 풍경사이로 구도자의 염불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 장동언
수도암은 수도산 상부에 있는 도량이다. 옛날 도선국사가 이 도량을 보고 앞으로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으며,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래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 있는 석불상과 석탑, 그리고 지형을 상징한 석물 등도 모두 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매우 조용하고 한적하여 암자까지 걸어 오르는 숲이 우거진 오솔길은 아늑한 정취를 더해 준다. 그리고 맑은 날 수도암 대적광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가야산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표현되고 있다.

완만한 능선의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수도산(修道山) 클라이밍

▲ 여성들도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수도산, 멀리 정상을 알리는 돌탑이 시야에 다가선다.
ⓒ 장동언
수도암의 비로전, 대적광전과 약광전을 둘러본 뒤 다시 수도산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수도산을 오르는 길은 주로 자연 그대로의 흙길이다.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목계단을 설치할 수도 있겠으나 자연미가 덜 하다는 것과 목계단 이용에 따른 무릎관절질환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시청 산림관련 담당자의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듯싶다.

오순도순 반겨주는 숲을 뒤로하고 계속하여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상을 향해 오른다. 산이 산을 안고 있는 풍경, 완만하고 느린 곡선으로 능선과 능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산길을 좇아 아득한 산자락을 더듬으니 수도산 그 품이 얼마나 넉넉하고 유한지 실감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지나온 길이 보이고 가야 할 길이 훤히 보여 산행을 한다고 했다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길과 마주하는 것 같아 그렇게 얘기한 것이 아닐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솔바람 또한 눅눅해지면
삼방산이며 형제봉이 저만치 아래서
실구름에 가려져 자꾸만 낮아집니다.

수도산에 다 올랐다고 생각했었는데
손 내밀면
단지봉 마저 잡힐 듯 했었는데
그러나 신선대는 아직도 멀리에 있고
산인은 비봉을 향해
휴우- 휴우- 거친 숨소리만 내려놓습니다.

- 장현진 시인의 시 '수도산 산행' 중에서


수도산(불령산)은 해발 1317m로서 가야산을 분수령으로 한 육산이다. 정상까지의 코스가 대부분 공룡능선을 한 사뭇 완만한 편이며, 정상인 신선대를 오르면 가야산, 덕유산, 황악산, 금오산이 마치 손에 잡힐 듯한다.

그리움이 깃드는 해피트레킹

▲ 안개가 낀 8부 능선 임도엔 수백 년 된 적송과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여행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 장동언
다시 수도리로 하산하면서 만나게 된 증산의 해피트레킹 코스, 나는 무슨 힘에 이끌려서인지 임도를 따라 장장 4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긴 산책로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산이란 꼭 정상에 올라서야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힘들면 쉬었다 가고 노래도 부르고 조망도 하며 사색도 하고 그렇게 편안하게 즐기면서 산길을 걷는 것, 그것이 바로 트레킹이 아니겠는가(본래 트레킹은 소달구지를 타고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을 일컫지만, 등산에서는 전문적 등산이 아닌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산악답사산책여행정도를 의미한다).

한껏 부푼 숲, 해발 800m 이상의 고지대를 걷다 보니 자연의 미가 돈독한 그 아름다운 절경이 시야를 빼앗는다. 수많은 야생화가 꽃을 피우고 이름 모를 새들과 열매들의 유혹, 따라서 간혹 배낭을 내릴 때도 심심함보다는 되려 호기심 발동을 자제하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산이 내민 암묵의 허락으로 나의 해피트레킹은 그렇게 장장 14㎞나 이어졌다.

황점리의 원황점에 이르니 황토로 된 운치 있는 전원주택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반갑게 맞아주는 젊은 안주인의 안내로 잠시 그곳에 들려 더덕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다시 장전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목과 잘 어울리는 의연한 자태의 장전폭포(長田瀑布)

▲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장전폭포, 그 아래서 올려다 본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장동언
참외 하나를 우지직우지직 씹어 먹으며 십여 분쯤 걸었을까. 주위에서 웅장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황점천을 가로지르며 세로로 걸터앉아 있는 장전폭포였다. 폭포는 의연한 자태를 자랑이라도 하듯 시원한 물줄기를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폭포를 대하며 아쉬웠던 건 지난 태풍 '루사'로 인해 폭포가 많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 예컨대 태풍과 관련된 폭우의 힘은 실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만월담이며 장전폭포며 수백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던 그 아름다운 피조물들의 형상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으니, 그러나 이만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마음을 저며 본다.

폭포와 작별을 하고 장전리로 내려오니 멀리 하천을 지나 참숯가마가 보인다. 하루 500명 정도가 다녀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하게 주차해 있다. 참 좋은 장소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멍하니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차창으로 다소곳이 얼굴을 내미는 농부에게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고, 그 트럭을 얻어 탄 후 다시 평촌리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청암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벌써 4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절의 입구까지 태워준 농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하고 서둘러 청암사로 발길을 옮겼다. 사찰의 내부로 향하는 길엔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줄을 잇고 있었으며, 같은 사찰이라도 좀 전 거쳐 온 수도암과는 또 다른 정취가 묻어났다. 왜일까? 청암사가 여승들만 거주하는 곳이라 그런 것일까. 불영동천을 산책하는 학인스님들의 모습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역사의 애환이 담긴 천년고찰 청암사(靑巖寺)

▲ 사찰의 제1관문 일주문이 청암사로 출입하는 내게 세속의 죄를 모두 벗어두고 들어오라 한다.
ⓒ 장동언
청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통일신라 헌안왕 3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 (1647) 화재로 전소(全燒) 되었으나 당대의 강백이었던 벽암각성(碧巖覺性) 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혜원(虛靜慧遠) 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중건하였다고 한다.

사실 청암사는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당시 기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현재 이곳 승가대학엔 120여 명의 학인 스님들이 戒(계), 定(정), 慧(혜) 3학의 체계를 갖추어 불조의 혜명을 잇고 있다.

사람도 없는 텅 빈 버스에 덩그러니 몸 기대고
소재지 지나 평촌리에 다가서니
멀리 보이는 청암사가 어서오라 반갑게 손짓합니다.

소담스레 펼쳐진 길
천지가 윤택한 이 길을 멀뚱거리며 걷다보니
수백 년 소나무가 일제히 향을 보내와
길은 향기에 취하고 객조차 비틀거리게 만듭니다.

해탈교 지나고 일주문을 지나
청암사 내부에서 부처를 찾아보니
부처는 오늘도 그저 예전의 부처입니다.

- 정경임 시인의 시 '청암사 가는 길' 중에서


대웅전, 육화료, 진영각, 정법루 등 불자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낀 뒤 소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평촌솜씨마을'이라는 단아한 문구가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수도리로 향할 때엔 보이지 않더니만, 아마도 그땐 내가 무흘구곡만 염두에 두고 있어서 쉽게 푯말이 볼 수가 없었나 보다.

잠시 평촌식당에서 목을 축이다 말고 평촌솜씨마을에 대해 물으니 주인인 평촌이장이 박식하게 대답을 해준다. 이쯤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려 하였건만 그러나 그곳을 탐방하지 않는 것은 오늘 여정에 대한 직무유기가 될 것 같아 솜씨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지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우리 것을 체험할 수 있는 평촌 솜씨마을

평촌의 옛날솜씨마을은 2003년 처음 테마마을로 출발을 시작한 이래 현재는 체험 및 가족테마형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농촌휴양, 농촌문화 체험, 특산물 판매, 농촌민박 등 팜스테이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운영되고 있다. 연중 일만 명 정도의 방문객이 찾아올 만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이날도 멀리 인천에서 방문한 백여 명의 내방객들로 인해 내부는 북적거리고 있었다.

분주한 여정이었으나 증산면 전역을 다 돌아보기에는 부족했던, 따라서 나름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정이었다. 정작 1박 2일을 계산하였다면 말로만 듣던 수도리 내원계곡의 그 아름다운 풍경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며, 수도산에서 청암사로 향하는 등산로와 청암계곡, 그리고 장전리 숯가마 등도 체험해 볼 수 있지나 않았을까.

그러나 여정에 있어 완전한 충족보다는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다시 찾을 까닭이, 그리고 다음 기회를 기약할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많은 시인들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포개었을지도 모를 증산, 시원한 바람에 묻어오는 평화와 자유가 다 내 것인 양 넉넉함을 안고 돌아가는 길은 여여했다.

증산면을 찾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다 아름다운 여운 하나씩 달아주겠다는 이도화 면장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처럼 어떡할거나 이번 여정에서 나는 증산에 연민이 생겼으니…….

덧붙이는 글 | 여행 진행 코스 

● 수승대 → 무흘 제6곡 ~ 구곡 → 수도계곡 → 수도암 → 수도산클라이밍 → 해피트레킹 → 장전폭포 → 청암사 → 평촌솜씨마을 
※ 해피트레킹(체험)과 수도산클라이밍(등산), 평촌솜씨마을(체험), 참숯가마(체험) 등은 다소 시간이 소요되므로 꼼꼼한 계획이 필요하며, 특히 해피트레킹은 사전에 국유림관리소(구미)의 허가를 득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태그:#증산면, #무흘구곡, #정구선생, #임도산책, #수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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