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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한 대단지 아파트 정문 앞에 택배 차량이 주차돼 있다.
▲ 아파트 앞 덩그러니 주차된 택배 차량 수원의 한 대단지 아파트 정문 앞에 택배 차량이 주차돼 있다.
ⓒ 박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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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낮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앞, 택배차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다. 35분쯤 지났을까, 회색 조끼에 빨간 챙이 달린 모자를 쓴 택배 기사 이아무개씨가 빈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이씨는 다시 손수레에 크고 작은 박스 20여 개를 실었다. 아파트 1개 동에 배달해야 할 양이라고 했다. 이 아파트는 26개 동으로 이뤄진 대단지다.

이날 수원의 낮 최고 기온은 33.7도. 이씨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택배차를 아파트 동 앞에 주차하고 물건을 옮기면 손수레를 끌고 수백 미터씩 여러 차례 왕복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이씨는 "이 아파트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택배차를 몰고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며 "지하주차장으로 다니라는데, 얘(택배 차량)는 짐칸이 높아서 지하로 갈 수 없다, (택배를 배달하는 게) 너무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누리꾼 공분 산 한 장의 사진, 사실일까?

지난 3일 인터넷 커뮤니티 <딴지일보>에 올라온 사진이다.
▲ 노란색 반송 스티커 지난 3일 인터넷 커뮤니티 <딴지일보>에 올라온 사진이다.
ⓒ 박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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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기사는 노예가 아닙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택배 반송 스티커' 사진이 화제가 됐다. 택배 상자에 붙어 있는 노란색 반송 스티커에는 'CJ대한통운, 한진택배, 현대택배, 로젠택배는 단지 안으로 택배 차량을 들여보내 주지 않는 아파트에 물건을 배송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택배 차량이 아파트 단지 내로 진입하지 못하면 물건 배송에 어려움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누리꾼들은 "택배 기사가 짐꾼인줄 아냐", "그 넓은 아파트 단지를 어떻게 걸어서 배달하냐", "아파트의 갑질에 어이가 없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며 택배 기사를 두둔하는 한편 택배 차량의 출입을 금지한 아파트 주민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언론도 앞다퉈 '택배 기사의 반란'을 기사로 다뤘다. 하지만 문제의 '택배 반송 스티커'가 실제 존재하는지, 어느 아파트에서 문제가 된 것이지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상 이 노란색 반송 스티커는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만, 택배 차량 진입을 금지하는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대단지 아파트에서 택배를 배달하는 기사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노란색 반송 스티커' 사실 아닐 가능성 크지만...

표에서 '5J61-1'은 부산광역시 진구를 나타낸다.
▲ A택배회사의 지역코드표 표에서 '5J61-1'은 부산광역시 진구를 나타낸다.
ⓒ 박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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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사진 속 노란색 스티커가 부착된 택배 상자는 A택배 회사의 남부산(부산 진구) 지점으로 반송되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사진 속 노란색 스티커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5J61-1'이라는 문자는 스티커에 언급된 4개 택배 회사 중 A 택배 회사가 택배 분류 시 부산광역시 진구를 나타낼 때 쓰는 지역 코드 번호였기 때문이다.

A사 남부산 지점의 한 관계자는 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지역 코드가 맞지만, 부산 진구 지역에는 택배 기사가 배송을 거부하는 곳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사진 속 물건은 부산에서 다른 지역으로 보내진 물건으로 보인다"며 "아마 노란색 스티커는 다른 지역에 있는 택배 기사가 붙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물건을 반송시킬 때는 배송 온 곳의 지역 코드를 쓰게 돼 있는데, 사진 속 택배 상자에는 '5J61-1'이 적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즉, 다른 지역의 택배 기사가 부산 진구에서 온 택배를 다시 부산 진구로 반송 시키기 위해 '5J61-1'를 기재했다는 말이 된다. 만약 '배송 거부' 사례가 진짜라면, 부산 진구가 아니라 다른 지역일 거라는 설명이었다.

또 이 관계자는 "만약 사진이 사실이라면 스티커가 붙은 해당 물건이 부산 진구로 왔어야 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노란 스티커가 달린 물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진 속 노란 스티커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부천에서 일하는 택배 기사 정아무개씨도 사진 속 노란 스티커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정씨는 "물건을 '꺾으려면'(반송하려면) 송장이랑 지역 코드가 보이게 해야 하는데, 그 사진을 보면 스티커가 송장이랑 지역 코드를 다 가려버렸다"며 "이건 반송하려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수원의 택배 대리점 팀장 정아무개씨 역시 "배송 거부는 윗선의 허락 없이는 어렵다"며 "또 어차피 나중에 가서는 '을'인 택배 기사는 결국 배송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택배기사가 임의로 배송을 거부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얘기이다.

A사 홍보과장은 "어찌 된 일인지 더 파악해봐야 한다"면서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만들어낸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을', 택배 기사

이아무개씨가 아파트 단지 내로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손수레에 상자를 옮겨 싣고 있다.
▲ 손수레에 배송할 물건을 옮겨 싣는 이아무개씨 이아무개씨가 아파트 단지 내로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손수레에 상자를 옮겨 싣고 있다.
ⓒ 박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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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스티커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 안의 내용도 다 거짓일까? 그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택배 차량을 단지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아파트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아파트에 배송을 거부하는 택배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수원의 B아파트(3500여 세대)는 택배 차량을 지하주차장으로만 가게 했다. 잠실에 있는 C아파트(5600여 세대)의 1단지에서는 택배 차량이 지하주차장과 큰 도로만 사용할 수 있게 했고, 2단지에서는 지하주차장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수원의 B 아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이아무개씨는 아파트 정문에 택배 차량을 대놓고 물건을 배송했다.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는 접이식 손수레를 이용해 택배 물건을 아파트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식이었다. 손수레에 실을 수 있는 물건의 양이 한계가 있다 보니, 아파트 1개 동이 끝나면 다시 물건을 실으러 택배 차량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씨는 1번 게이트에서 배달이 끝나면 차를 타고 2번 게이트로, 3번 게이트로 옮겨갔다. 다음 배달할 아파트 동이랑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그렇게 싣고 온 물건이 다 없어질 때까지 게이트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배송하고 있었다.

이씨가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이유는 아파트 측에서 아이들의 안전과 치안의 문제로 차량을 지상으로 다니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택배 차량은 탑차 높이 때문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지 못해 정문 바깥에다 세워두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씨는 "당연히 힘들죠, 그래도 지금은 비수기라 덜해요, 겨울에 물건 많을 때는 오후 12시 넘어야 끝난다니까요"라며 불만을 털어놨다.

이씨는 택배 차량을 길가에다 대놓기 때문에 주차위반 '딱지'를 끊기도 한다. 그는 "그냥 도로에 차를 대놓으니까 여러 번 끊겼죠"라며 "'딱지' 끊기면 일단 사정을 해요, 그래도 안 되면 저희가 부담해야 돼요, 뭐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할 말 많아요, 근데 뭐 어쩌겠어요, 저희가 '을'인데 안 할 순 없잖아요, 해야죠"라며 화제가 된 노란 스티커를 붙인 택배 기사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그 사람도 자기 생계를 걸고 한 일일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배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니 몇몇 택배 업체는 택배 차량 높이를 낮추기 위해 탑차를 개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차량 개조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용적률이 낮아져 짐을 실을 공간이 줄어든다.

택배 기사 뒤로 보이는 26개동 대단지 아파트가 보인다.
▲ 26개동 대단지 아파트 정문 앞 택배 기사 뒤로 보이는 26개동 대단지 아파트가 보인다.
ⓒ 박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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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입주민의 반응은 '썰렁'

잠실 C 아파트의 한 주민은 "아니 (택배 기사는) 돈 받고 하는 건데 그게 문제가 되나, 또 그 차들 다 들어오게 하면 택배차가 한둘도 아니고 엄청 많잖아요? 다 들어오게 하면 위험해서 어떻게 살라고"라며 택배 차량 출입을 꺼렸다.

반면, 잠실 C 아파트의 또 다른 주민 박아무개씨는 "지하주차장 높이가 좀 높았으면 좋았을 텐데, 택배 기사들도 힘들잖아, 얼마나 힘들어 저기서 왔다 갔다 하려고 하면"이라며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경옥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소비를 더 많이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면서 "미국 택배 회사의 경우 문 앞까지 배송해 주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서비스를 할 경우 그냥 우편물 함에 두는 것보다 비싸게 받는다, 우리도 앞으로 그렇게 서비스를 차등화 시키는 것밖에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덧붙이는 글 | 박현광 기자는 <오마이뉴스> 22기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택배, #배송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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