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
류근의 시 '풍금'이 떠올려준 사람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제자들 전화나 문자가 꽤 와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올해는 좀 달랐다. 류근 시인이 페이스북에 '풍금'이란 시를 올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배 곯고 집에 올 때
얘야, 이리 오너라
살구꽃 그늘 아래 나를 숨기며
하루 굶은 도시락 먹여주시던
우리 선생님
아니에요 아녀요 배 불러요
아무리 내빼어도 다 모른 척
꽃이 피었구나
이 노래 들어보렴
이 노래 들어보렴
창가 풍금을 켜며 괜찮다
아가, 괜찮다 불러주시던
선생님 생각나네
그 풍금 생각나네
남의 자식 교육에는 그렇게 헌신하면서…
류근 시인의 시에 내가 단 댓글에도 공감하는 이가 꽤 많았다.
그런 선생님이 참 많았던 시절입니다. 저희 아버지 얘길해서 민망하지만 시골학교 6학년 담임 때 촌놈들 안동에 중학교 보내려고 방학 때도 합숙을 하며 과외수업을 했습니다. 학부모들이 중학교 보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으니 당연히 공짜였죠.
저희 집은 학교에서 멀다고 학교 앞 농가의 사랑방을 빌려 수업을 했는데 아버지가 가끔 집에 와서 반찬을 가져가셨고, 신경통이 심하던 어머니 대신 더러는 저학년이던 제가 눈 덮인 왕복 시오리 길을 걸어서 반찬 배달을 했죠. 엄하기만 한 아버지가 한번은 초가집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아무 말없이 제 손을 끌어다 불을 쬐게 하셨죠.
스승의 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시를 보니 눈물이 핑 도네요. 저희 형제들은 한번도 가르친 적이 없으면서 남의 자식은 그렇게 열정을 다해 가르치셨는지......
풍금도 잘 치셨습니다. 운동회 날엔 풍금을 운동장에 내놓고 행진곡 풍의 동요를 치셨는데 약한 풍금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운동장이 조용해졌죠. 살아가면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연주를 더러 봤지만 내 맘속 아버지의 풍금치는 모습만큼 위대하지는 않았습니다. ㅠㅠ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산수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는데, 발단은 분수를 소수로, 소수를 분수로 바꾸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거였다. 실은 담임선생님 자신이 그걸 할 줄 몰랐기 때문이지만 아버지(이경원)는 한번도 나를 가르쳐준 적이 없다.
고교로 올라가자 수학시간은 누적된 학력 결손으로 지옥처럼 괴로웠고 모의고사에서 '빵점'을 받는 때가 많았다. 수학을 기초로 하는 물리·화학도 바닥이었다. 도대체 전과목으로 수십만 또래 학생의 재능을 평가하고 그 줄이 평생 이어지는 현실에 분노하며 교실에 앉아있었으니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그나마 문과 과목은 잘하는 게 아까웠던지, 수학선생님은 공통수학 중에서도 인수분해만 외우다시피 하라고 조언했다. 내가 지망하는 대학에는 한 과목이라도 영(0)점을 받으면 과락하는 제도가 있었기에 웬만하면 풀 수 있는 인수분해를 기본 문제로 출제했기 때문이다.
"제 논문은 불효의 대가입니다"
작고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내 마음속에서 부모를 영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임종을 못한 탓이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과 불법 증여 문제 등을 비판하다가 <한겨레> 경영진도 부담스러워하자 사표 던지고 유학 떠날 때 아버지는 "이제 다시 보겠냐"며 사별하듯 눈물을 흘렸다. 며칠 전 페이스북 친구가 병수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기에 댓글을 달았다.
그래도 오래 곁에 계시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영국 유학중 치매 앓던 어머니 돌아가시고, 병 수발하던 아버지가 "이제 내 책임은 다 면했다"고 하셨는데, 영국으로 복귀한 지 달포 만에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학위논문 '감사의 글'에 '이 논문은 불효의 대가'라고 썼더니 그 유명한 석학 제임스 커렌(James Curran) 교수가 자신도 울었다면서 제자를 의심한 얘기를 하더군요. 과제를 못 내서 핑계 대는 줄 알았다면서. ㅠㅠ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제임스 커렌 교수는, 영어회화가 미숙해 논문지도를 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제자에게 6년간 한 번도 짜증을 낸 적이 없었다. 세계 언론학계에서 살아있는 최고 석학이라 할 수 있는 그였지만 "나도 한국어로 말을 못 하는데 당신이 영어 때문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격려했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미디어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분석한 <미디어와 경제위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는데, 세계적 출판사인 라우틀리지(Routledge) 미디어 분야 편집인을 겸하던 그는 논문을 책으로 내자고 제의했다. 논문체제를 허물고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되도록 원고를 고쳐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영어가 지긋지긋했고 귀국 후 바로 제천 시골 세명대에 저널리즘스쿨을 설립해 원장실 야전침대 태세로 들어가는 바람에 마감 없는 일은 계속 밀렸고 끝내 원고를 보내지 못했다. '숙제'를 못 했으니 연락하기도 민망했고 우울증의 한 원인이 됐다.
대부분 스승께 연락도 못 드렸으니…
2008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이어 MBC저널리즘스쿨과 제주에 한미리스쿨을 설립해 지금까지 범언론계에 기자·피디 등 290명을 배출했지만 연락이 끊어진 이도 많다. 처음 교수가 되어 야전침대에서 자며 밤낮없이 학생들을 지도할 때 경력 긴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너무 정붙이지 말라"고 했다. 결국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거였다.
나 역시 취업 후 연락이 끊어진 학생들에게 '제 살기 바빠서 그렇겠지'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섭섭할 때가 있다. 그러다 문득 돌이켜보니 나 역시 대부분 스승에게 연락조차 드리지 못한 제자가 아니던가?
지혜는 노동과 자연에서 배운다
5학년 때 담임은 농림학교 출신이었는데 공부보다 일 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옮겨간 지 얼마 안 된 학교 곳곳에 나무와 꽃과 잔디를 심고 온상을 관리하는 데 늘 5학년을 동원해 야속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제주에 온 뒤 빠져든 텃밭과 정원 가꾸기의 기초와 취미가 그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지식은 책과 강의를 통해 배우지만 지혜는 노동과 자연에서 배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화언론인양성과정은 식재료비 정도만 받고 생활공동체로 운영된다. 학생들은 틈틈이 화덕 솥뚜껑에 삼겹살을 굽기 위해 장작을 패고 설거지 당번도 한다. 용돈이 필요한 학생들에게는 근처 감귤농장에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녹색평론> 읽기를 함께하면서 김종철과 데이비드 소로의 사상도 배웠다. 감귤농장 노동체험은 <녹색평론> 여름호에 실린다. 나의 생활 태도와 알량한 지식마저 스승으로부터 온 것이고, 옳건 그르건 그것은 다시 제자에게 전수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