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를 비판하면 빨갱이가 된다. 전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정권은 대부분 붕괴됐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정부는 상당수가 권위주의적 독재 정권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와 독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른다. 이 말에는 마법같은 효과가 있다. 진영이 나뉘고 사람들은 갈등한다.
진영 논리는 기본적인 상식도 부정한다. 참사로 인해 모인 유가족 단체와 시민단체 주장까지 좌파 발언으로 묶인다. 반대 진영에서는 자신들을 친일파라고 부른다고 화를 낸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빨갱이라는 말에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친일파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빨갱이는 불법과 합법,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빨갱이를 외치며 공격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잡았고, 빨갱이로 불리는 사람들은 감옥으로 갔다. 당시 빨갱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들은 다수가 친일파였다. 해방 이후, 반민족 행위로 감옥에 갈 사람들이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은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민심을 이산시킨다"고 주장했다. 친일파들은 '반공 국민대회'를 열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든 제헌국회 의원들에게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공산당 프락치"라고 말했다. 친일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법을 집행하는 반민특위에게 빨갱이 프레임을 씌웠다. 이승만의 반공 유전자는 끈질기게 한국 사회에 자리 잡았다. 그때마다 친일파는 '좌파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정당성을 얻었다.
대통령이 13번 바뀌었음에도 '친일 청산=좌파' 공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70여 년이 흘렀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빨갱이나 좌파라는 말을 시위 현장과 정치 공간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 정도되면, 신화가 될 법하다. 이 신화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반민특위의 좌절'부터 시작한다
왜 친일파는 좌파 청산을 선택했을까?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빨갱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권력을 갖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지난 5월 23일 <친일파와 반민특위, 나는 이렇게 본다>의 저자 이강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만나 '반민특위와 친일파 청산' 문제와 해결책, 우리나라 청년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들어봤다.
친일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무엇인가요?
"친일파 청산을 위해 제헌국회가 1948년 10월 22일 설치한 특별위원회입니다. 제헌국회가 만든 법률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설립 초기만 해도 박흥식, 이광수, 김연수 등 거물 친일파를 잡아들이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친일파가 장악한 이승만 정부의 공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와해의 길을 걸게 됩니다. 친일경찰 노덕술과 최운하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뒤,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결국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반민특위의 활동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친일 청산은 되려 후퇴합니다. 결국 공소 시효를 1949년 8월 말까지로 단축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제 반민특위는 유명무실해졌습니다.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 되면서 반민특위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반민특위 조사 대상 7000여 명 중 제대로 조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682명, 그 중 7명만이 실형을 살았습니다. 그마저도 1951년 2월 국무회무회의에서 '반민법에 의한 판결은 모두 효력을 상실한다'고 해서 결국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는 입법을 통해 반민법을 제정했다. 반민특위는 독립된 기구로 운영했다. 특별위원회가 된 이유는 해방 당시 법 체계와 친일파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체포한 친일 경찰 노덕술을 '반공투사', '법 기술자'라고 칭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반공만 주장하면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친일파도 상관없다는, 아니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권력 의지였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경찰은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검찰은 반민특위에 적극적인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갔다. 그 의원들을 남로당원과 접선한 '국회 프락치'라며 조작 기소했다.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만든 순간이었다. 이 모든 일은 여전히 친일파가 남아있던 사법 기관이 주도했다. 친일 '법 기술자들'이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독립기구 반민특위를 제거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 연구위원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곧 법 기술자들에 의해 공정과 상식이 붕괴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해 연구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반민특위를 연구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관심있던 분야는 반공 이데올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 조치로 많은 사람이 투옥됐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면 반국가적인 행위가 되고, 공산주의자가 되는 시절이었죠. 지금은 대부분 무죄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습니다. 정부 비판 할 수 있잖습니까? 선거로 뽑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언제 생겼고,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보는 연구는 중요합니다. 아직도 반공 이데올로기는 강한 힘으로 한국 사회를 꿰뚫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한국 전쟁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전에 나왔습니다. 만든 사람도 따로 있죠. 저는 그 기원을 친일파에서 찾았습니다."
- 친일파와 반공 이데올로기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친일파 청산은 좌파만의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초로 친일파를 규정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죽여도 된다는 '7가살'을 보도했습니다. 친일경찰과 총독부 관리, 밀정 등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통과될 때 반대한 사람은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를 옹호하던 6명의 의원뿐이었습니다. 임시정부에서부터 추진해온 친일파 청산을 오직 좌파만 주장한 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일파가 반대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사용했죠. 친일 사법 기관은 독립 운동가에게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들의 수사와 기소 과정에는 고문과 조작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이 있습니다."
- 친일파 청산과 반민특위에 대해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친일파 청산을 논의하는 이유는 미래 때문입니다. 역사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가 현재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정합니다. 역사 평가를 위해서는 상식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지 않다고 평가하고 나쁜 것을 좋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가치관대로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한국은 과거청산을 한 적 없습니다. 반민특위는 일찍이 해산 되었고 반민특위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논리는 여전히 반복되고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은 임시정부의 주요한 정신이며 정책입니다. 우리 헌법은 임시정부가 만든 정신을 따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것은 반헌법적 행위로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꾸준한 관심과 교육만이 해결책
- 일제의 잔재가 법조계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검사동일체' 원칙이 있습니다. 검찰은 독립 기관인 동시에 검찰총장을 중심으로 모든 검사가 통일된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원칙입니다. 사건에 관한 조사와 방향이 검찰총장 한 명의 지시에 의해 똑같이 정해집니다. 검찰에서는 이 원칙이 이미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그 문화는 남아있어요. 사법 기관 개혁을 할 때는 일제 잔재 청산을 하나의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기소를 비롯한 모든 조직 운영이 하나로 돼 있는 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전혀 바뀌지 않은 검찰의 운영 방식입니다. 사람도, 조직도 바뀐 게 없습니다. 검찰의 인식은 해방 직후 친일 법 기술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 친일파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있을까요?
"우선 교육이 필요합니다. 사례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자세히 나누고 기관 내 교육 기관을 설립해 교육해야 합니다. 국민과 언론의 관심도 필요합니다. 정확한 정보와 사실 관계가 제공되지 않으면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습니다.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도록 하려면 관심을 갖고 촉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위해 전문가 집단의 진상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겠죠. 친일진상규명위를 통해 친일파 1006명 명단이 발표 됐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유럽처럼 위원회를 만들어 꾸준히 조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앞으로 다른 책도 출판하고 여러 대중 강연도 참여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배운 지식을 일반 시민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특히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겠어요."
-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문제의식을 갖길 바랍니다. 사회 문제를 표면만 보고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 번쯤 의심하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하길 바라요. 그리고 역사 공부를 해야죠. 역사는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역사에 대한 작은 관심이 모여 한국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