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994년부터 공식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난민 수용률은 세계 최하위로 2020년까지 난민 신청 6만 4357건 가운데 난민 인정자는 1022명, 인도적 체류허가자는 2217명이다. 2015~2018년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1~3% 수준으로 유럽연합 회원국의 평균 난민 인정률 34%(2018년 기준)에 비해 무척 낮은 수준이다.
난민 인정을 받거나 인도적 체류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제까지 총 3천여 명에 불과하니 한국에서의 난민 신분 획득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다른 난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우선 그들은 난민 신청자라는 신분으로 살아간다. 이들은 난민 불인정을 받고 몇 번의 과정을 겪지만 난민 인정이나 인도적 체류자 신분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최종적으로 행정심판에서 난민 불인정을 받으면 외국인등록증을 출입국사무소에 반납하고 출국유예 허가통지서를 받고 한시적 스탬프를 받아 연장하며 살아가게 된다. 대부분 3개월마다 갱신하는데 문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삶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노동을 하다가 적발되면 외국인보호소에 영치되거나 자진 혹은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다.
한국에서 난민이 화두가 된 것은 2018년 여름, 제주에 500여 명의 예멘 난민 유입을 통해서이다. 당시 한국 사회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정부와 제주도는 우왕좌왕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그러는 사이 난민 인정 찬반을 둘러싸고 종교, 시민 단체 간의 대립과 맞물려 근거 없는 이슬람 혐오증과 반이민 정서의 심화 등 사회 갈등이 확산되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난민에 대한 인종주의 경향을 확인하는 사건이 되었다. 특히 한국 개신교 일부의 반이슬람 반난민 정서가 확산되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는 난민법 개정 및 폐지를 주장하는 청원에 71만 명 이상 동의하는 등 난민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과 여론을 추동한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경계선상에서 살아가는 난민
도대체 어떤 이유로 예멘인들은 난민행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냉전시기 한국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던 예멘은 1990년 5월 21일 통일 선언을 하고 이듬해 통일 헌법을 제정했지만 이념 차이와 권력 배분으로 인한 갈등으로 1994년 2월부터 내전이 시작된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수니파 세력과 가까웠던 북예멘은 내전 발발 5개월 만에 남예멘 분리주의 세력의 거점인 아덴(구 남예멘의 수도)을 점령, 일방적 승리로 통일 공화국을 재수립하고 남예멘 기존 세력을 정치 제도권에서 완전히 퇴출시킨다. 이후 예멘은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강압 통치하에 분리주의 잔당 세력, 알카에다 극단주의 세력 및 시아파 반군 세력들의 저항을 위력으로 눌렀다.
그러던 중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이집트, 리비아 등과 함께 예멘으로도 확산되어 결국 2012년 2월 27일 살레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압두라부 만수르 하디 현 대통령에게 권력이 이양된다. 하지만 이에 저항하는 후티 반군은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도 사나까지 점령하면서 내전이 본격화된다.
수도 사나에 진입한 후티 반군은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무력 점령한다. 수세에 몰린 예멘 정부는 남부지역의 아덴으로 임시정부를 정하고, 하디 대통령은 2015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한다. 이후 후티 반군은 타이즈를 비롯한 예멘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정부군과 대치하며 내전은 외세의 개입과 함께 본격적으로 격화된다. 2021년 예멘 내전으로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사망한 예멘인들은 유엔 추산 37만 7천 명에 달한다.
이 땅에 온 예멘 난민들은 대부분 젊다. 그들이 난민행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내전의 한 가운데 내몰리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이다. 나라가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서 일자리가 없고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 난민들은 여러 얼굴로 살아간다. 그중에서 가장 처지가 어려운 난민은 아무런 증빙서류조차 없이 최소한의 신분보장이 전혀 없는 가운데 하루하루 버텨내는 이들이다. 출국유예명령서 한 장만 소유하고 버텨내는 이들, 경계선상에서 곡예를 하며 살아가는 난민을 만나면 가슴이 정지된다.
살해위협에 예멘 떠나 한국으로
1993년 예멘의 남부 아브얀에서 출생한 아케드(가명)씨는 2남 1녀 중 둘째다. 아덴 대학을 다니던 그는 내전의 격화로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아덴은 후티 반군에 대한 시위가 격화되던 곳이었다. 그는 신문사에 취직하여 후티 반군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살해 위협을 받게 된다. 2년여 동안 위협적인 상황에 있던 그는 부모의 권유로 예멘을 떠나 말레이시아를 경유해 2014년 6월 18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리곤 난민신청을 한다.
아케드씨는 난민신청서를 내고 1년 반이 지난 2016년 1월 18일, 한 시간 반 남짓 아랍어로 진행된 난민신청 인터뷰를 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케드씨는 몇 가지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인터뷰에서 말한 자신의 진술과 조서에 남겨진 사실이 정반대로 기술되어 있는 것 아닌가. 난민조서에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신청인이 난민 신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싶었고 체류목적으로 난민신청을 했어요. 저는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어 난민신청제도를 이용했습니다. 저는 난민 신청하기 위해 난민신청사유를 거짓으로 지어서 작성했습니다. 제가 후티그룹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예멘을 떠날 정도의 위협은 아닙니다."
- 신청인은 예멘에서 특별한 위협받은 사건이 있었나요?
"없습니다. 전에 얘기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저는 전혀 위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신청인이 귀국 시 박해나 위협을 받을 수 있나요?
"제가 예멘으로 귀국해도 위협이나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제가 한국에서 일을 하기 위하여 체류목적으로 난민신청을 했습니다."
- 신청인의 가족은 안전하게 지내고 있나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케드씨에 대한 조서 내용에는 많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자신의 난민행이 반군으로부터의 살해 위협이었음에도 난민조서에는 "전혀 위협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자신이 떠나고 석 달 후인 2014년 6월 7일 폭격으로 집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가족이 모두 몰살당했음에도 조서에는 "잘 지내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의 난민신청서에 네 가족의 사망 날자가 동일한 날자로 명기되어 있다.
또한 다시 예멘으로 가도 "위협이나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고 "단지 일을 하기 위해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첨부한 2014년 4월 1일자와 4월 7일자 예멘 아타리크 신문기사에 의하면, 기자인 아케드씨에 대한 살해 협박 규탄과 함께 세계 언론의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그의 난민신청서에도 그가 예멘으로 돌아가면 살해당할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 후 한 달이 지난 2월 19일 그는 난민 불인정 통보를 받는다. 다시 이의신청을 하였지만 8월 5일 기각 통보를 받는다.
아케드씨는 2017년 7월 11일 화성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네 개의 손가락을 잃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그 후 6개월 동안 의료비자를 받았지만 만기가 되어 2019년 4월 난민신청을 다시 하였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출국유예명령서라는 종이 한 장이었다. 3개월씩 스탬프를 받아 가면서 '버텨내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아케드씨의 난민조서는 아랍어로 난민 인터뷰 하는 과정에서 사실과 달리 기술된 대표적인 예다.
한국디아코니아는 2019년 아랍어로 인터뷰를 하였지만 난민 불인정을 받고 출국유예명령서 한 장으로 버티는 난민들의 사정을 접하고 한 달간 시민들로부터 탄원서 700여 장을 받아 청와대와 법무부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결과 2015년 9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아랍어로 난민 인터뷰를 한 난민들 가운데 난민 불인정을 받고 외국인등록증도 없이 살아가던 이들이 외국인등록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케드씨의 간절한 바람
2020년 여름, 난민 사회적 기업인 수원 YD케밥하우스에 아케드씨가 찾아왔다. 다음 날 그와 함께 안산시 출입국사무소로 가서 항의를 했고 다행히 며칠 후 외국인등록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가 기거하는 안산 원곡동의 5층 좁은 옥탑방을 방문하였다. 한 사람이 누우면 공간이 거의 없는 좁은 방에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안산과 수원의 직업소개소 수십 군데를 방문하여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심한 부상을 입은 그를 채용하는 곳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얼마 후 구사일생으로 공장에 취업되어 일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신체의 장애로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그를 공익변호사와 연계하여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한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하중이 있는 작업을 거의 일년이 넘도록 하며 한쪽 어깨와 팔에 이상이 와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며 얼마 전 찾아온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는 난민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지금도 예멘 상황이 나쁩니다. 작년 여름, 고향 방송국에서 일하던 기자가 반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난민 인정을 받아 안전한 삶을 한국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먼저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곤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일을 하고 싶습니다."
난민법 제2조 제1호는 난민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아케드씨는 난민협약 제1조 및 난민의정서 제1조에서 규정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히 근거 있는 공포"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정지된다. 기자로 살아가다가 반군의 살해위협으로 황급히 떠나야 했던 그의 가족이 얼마 후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한국에 온 후 공장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하여 손가락 네 개가 절단되었다. 외국인 신분증을 반납하고 유령처럼 살아가다가 반년에 한 번씩 체류연장을 하며 살아간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난민 인정을 다시 시도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하다. 최근 들어 부쩍 예멘 내전 소식이 지상파를 타고 전해온다. 가슴을 졸이며 살아가는 아케드씨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말한다.
"난민 인터뷰 조서의 내용은 내가 말한 내용이 아닙니다. 난민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안전한 곳, 이곳 한국에서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