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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사람은 누굴까?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첫째는 건강하고 활기차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이다. 연봉은 낮지만 행복지수는 높은 사람들, 소유와 증식보다는 비움과 증여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 돈은 수단일 뿐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재산증식을 위해 이사를 거듭하는 삶보다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

이들은 늘 생각하고 연대하고 행동한다. 지켜보고 투표하고 거리로 나선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은 통제, 관리가 안 되는 문제아들이다. 협박과 회유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사람들이 두렵다. 언제 어느 때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들은 "기억나지 않는" 문제들을 낱낱이 기억해 책임을 물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단 한 번이라는 인생. 그 인생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되면 그렇게 안 될 방법이 있나? 부모가 되어 본 사람들은 안다. 아이가 손가락이라도 베여 피가 나면 어떤 심정이 되는지. 학교로 쳐들어와 자식 문제로 교사에게 폭행을 휘두르는 부모의 기사를 볼 때, 그 행동에 공감할 순 없지만 그 심리가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 부모라는 존재.

그런 부모들의 눈앞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 게다가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을 통한 재발방지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단식하고 삭발하고 행진해야 하는 이 지옥 같은 세상. 아이들의 생명 앞에서조차 이념 논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언론과 정치판을 봤을 때,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어야 당연하지 않나? 그래서 권력자들은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가족들이 두렵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집결하자 경찰이 물대포와 차벽으로 가로막고 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집결하자 경찰이 물대포와 차벽으로 가로막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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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일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는 대한민국. 세월호 관련 문화제에 굳건한 삼중차벽이 다시 나타났을 때 공간 디자이너인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윈스턴 처칠이 했던 유명한 말이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이 말에 의하면 건축공간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상당 부분 조정할 수 있고 이는 비단 건축 공간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머무는 대부분의 공간에 해당된다. 도시나 건축, 실내공간을 관찰하다보면 처칠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 공간의 문제점을 긍정적으로 해결한 곳에는 인구수나 구성원의 변화가 전혀 없음에도,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거나 때론 범죄율을 낮아지는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의 형태를 통해 공간을 의뢰한 사람이나 디자인을 한 사람의 심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 공간이 우리를 배려하는지 배척하는지, 자유롭게 하는지 통제하는지, 위로하는지 협박하는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은 공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대중을 통제하려 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일수록 필요 이상으로 규모가 크고 권위적인 형태를 가진 건축물을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늘 그것이 두려움에 대한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해 왔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과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의 일이 일어날 때, 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일어날 때 두려움을 느낀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면 과도하게 상대방을 겁박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겁박의 크기는 두려움의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분향소로 향하는 시민들이 왜 두려운가

서울광장에서 문화제를 마치고 광화문 분향소로 향하는 길에 나타난 삼중 차벽. 그것은 차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자의 두려움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민들의 안녕을 방해하고 있다. 도로점령은 불법이니 곧 해산하라"는 경찰의 반복적인 안내방송은 그 두려움을 청각적으로도 들려줬다.

화염병이 아닌 국화꽃을 들고, 희생된 아이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딸과 함께 분향소로 향하는 시민들이 왜 두려운가?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 속이지 말고, 두려움의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두려움의 정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해야 알 수 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 보길 바란다. 지금은 살아 있는 우리 모두, 결코 멀지 않은 미래에 이미 별이 된 세월호의 아이들과 같은 길 건너가 하늘나라에서 만난다. 그 때도 두렵고 싶은가?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건국대학교 디자인대학 실내디자인학과 교수입니다.



태그:#두려움, #삼중차벽, #절대권력자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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