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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고 했다. 과거는 오늘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창이다.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사람, 민족은 같은 고통을 다시 겪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과거의 영광도 고통도 오늘날 다시 우리 모습을 볼 수 있는 보물이다.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우리의 모습이 사라졌던가? 나는 계룡산의 무속촌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 한다. 청계천이라는 거대한 어항을 만들면서 지하에 묻혀버린 600년 왕도의 자취를 안타까워한다. 이른바 '4대강 살리기'라는 공사로 파해쳐지고 묻혀버리고 있는 선사문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화재 지표조사라도 제대로 하고는 있는 것일까?

노무현 정부 때 행정수도의 이전을 헌법위반이라고 판단한 헌법재판소의 고매한 법관들의 생각을 아는가? 명백히 성문헌법을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불문헌법상 우리의 수도는 서울이고, 서울을 떠나 수도를 옮기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매한 재판관들은 알까? 600년 수도 서울에 남아있는 전통의 자취는 어디에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오키나와 사람들의 일본 복귀 운동과 자취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군과 미군에 점령된 자기들의 땅을 되찾는 운동을 꾸준히 벌이는 한편 미군기지를 바라다보는 망루를 지어 관광자원화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면서 본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전쟁의 상처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전쟁터로 만들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가진 땅을 강제로 점령하여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일본 본토를 수비하는 첨병기지로 만들었다. 당연한 결과로 미군은 일본 본토 진격에 앞서 오키나와를 먼저 점령하여야 했다. 오키나와는 미군의 원단폭격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전이 끝난 후 점령군 미군은 과거 일본군이 강점하고 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땅을 강점하여 군사기지를 확장하였다. 일례로 가데나 기지는 일본군이 만든 나카 비행장을 약 40배로 확대하였다. 야구장의 500배나 되는 가데나 기지는 15개 마을을 삼켜버렸다. 오키나와전이 끝나고 약 7년 동안 미군은 사용하고 있는 광대한 군용기지의 사용료를 단 1엔도 내지 않았다.

가카즈고대(嘉數高台)에서는 후텐마 기지를 바라볼 수 있다. 망원경까지 마련되어 있다. 사진은 후텐마 기지의 항공사진이다.
▲ 가데나 기지(비행장) 가카즈고대(嘉數高台)에서는 후텐마 기지를 바라볼 수 있다. 망원경까지 마련되어 있다. 사진은 후텐마 기지의 항공사진이다.
ⓒ 김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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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즈고대(嘉數高台)
기노완 시에 위치한 가카즈고대공원은 오키나와전 당시 격전지로, 아직까지 일본군이 사용한 '토치카'가 남아 있다. 현재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공원 내에는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는 후텐마 기지가 내려다보인다. 망원경으로 볼 수도 있고 마음대로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가카즈고대에는 과거 일본군이 사용했던 토치카가 남아 있다. 또, 오키나와전 당시 일본 각지에서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를 기리는 비와 함께 강제동원되어 전투 중 사망한 조선인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천황의 영광을 기리는 본토 사람들의 희생을 위로하는 비와 이국 조선인의 희생을 위로하는 비가 함께 존재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누구건 오키나와 전쟁 중에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이며, 이와 같은 희생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가카즈고대 공원에 보존되어 있는 일본군 토치카. 미군의 폭격을 맞아 입구가 부서져 있다.
▲ 일본군 토치카 가카즈고대 공원에 보존되어 있는 일본군 토치카. 미군의 폭격을 맞아 입구가 부서져 있다.
ⓒ 김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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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즈고대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 위령탑.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집되어 이곳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 청구의 탑 가카즈고대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 위령탑.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집되어 이곳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 김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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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가 보이는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데나 기지
▲ 가데나 기지(비행장) '안보가 보이는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데나 기지
ⓒ 김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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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데나 공군기지
극동 최대의 공군기지이다. 하네다 공항의 약 2배의 크기. 전투기 200기가 상주하고 있다. 항공모함 3척의 전투력이다. 구 일본 육군 항공대의 중비행장으로 건설되어, 전쟁 후 미군이 접수하였다. 주변지역은 일상적 소음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소음 경감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안보가 보이는 언덕'은 가데나 기지를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작은 언덕으로, 광대한 미군 기지와 이착륙하는 전투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오키나와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미일안보조약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망원경이 비치되어 100엔을 투입하면 기지를 상세히 볼 수 있다. 우리가 갔던 날 사진 마니아들이 전투기의 이착륙 모습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고 있었다. 높은 담과 철조망으로 가려진 우리 군대의 기지와는 많이 달라서 당혹하였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군사기지를 망원경으로 보거나 사진을 찍는다면 간첩으로 몰리기 십상일 것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요지부동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택한 것은 궁여지책,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였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과거 자신들을 강점하여 고통을 안겨준 일본에 복귀를 요구하다니. 오키나와가 일본 복귀를 원하는 것은 일본평화헌법이었다.

대일평화조약 제3조로 반영구적으로 오키나와를 지배할 권리를 가진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과의 동맹국 관계를 고려하여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였다. 그러나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의 기능을 그대로 둔다는 조건이었다. 현재 일본은 오키나와 미군의 유지비로 약 2조 원을 분담한다고 한다.

오키나와 전쟁의 상흔들

슈리성 앞의 일본군 제32군 사령부 동굴

일본군은 오키나와전 당시 과거 류큐왕국의 궁성인 슈리성 앞에 동굴을 파고 군사령부를 차렸다. 이 때문에 미군의 집중 포격을 받아 슈리성이 전소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일본천황의 궁성이나 쿄토의 동대사 앞이라면 일본군이 군사령부로 삼을 수 있었을까?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하여 오키나와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이 때부터 오키나와는 전 국토가 기지가 되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기지건설로 땅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급기야는 강제로 집단 학살당하기까지 하였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전 당시 슈리성 앞에 동굴을 파고 군사령부를 차렸다.
▲ 과거 일본군 제32군 사령부 동굴 일본군은 오키나와전 당시 슈리성 앞에 동굴을 파고 군사령부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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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병원동굴

정식명칭은 오키나와 육군병원이다. 외과와 3개의 내과가 있었고, 히메유리 학도대가 이곳 병원에 동원되었다. 미군 상륙 이후 부상병이 많아지자 부상정도에 따라 대응하였으며, 악품이 모자라 마취 없이 수술을 했다. 육군병원에 철퇴명령이 떨어지자 중환자에게 청산가리를 배포하여 자결을 강요하여 많은 일본군이 사망했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파서 만든 동굴로 오키나와 전 당시 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다.
▲ 육군병원동굴 사람의 손으로 직접 파서 만든 동굴로 오키나와 전 당시 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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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치라가마

가마란 동굴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이다. 아부치라가마는 길이가 270미터에 이르는 석회동굴이다. 1944년 당시 타마스쿠촌 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9사단이 가마를 측량하여, 공병대가 정비하였다. 입구, 통로, 병사, 위안소를 만들었고 우물과 취사장, 발전시설도 만들었다. 이후 전투지휘소가 된 가마에 식량, 의류 등을 옮겼다.

전투가 점차 격렬해지자 인근 주민 204명이 식량을 가지고 이곳으로 피난하였다. 미군 상륙 후에는 하에바루육군병원에 수용하지 못한 천 여명의 부상병이 옮겨왔다. 미군의 투항선전이 계속되는 중에 가마에 찾아오는 주민과 식략을 찾으러 오는 주민을 스파이 혐의로 사살하였다. 종전이 다가올 무렵 일본군은 죽에 청산가리를 타서 집단 학살하였다. 1300여 명의 일본군과 주민 등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주민 100여 명과 일본군 7명 뿐이었다.

이것이 일본군이 자랑하는 천황폐하를 위한 충성스러운 옥쇄의 진실이다.

동굴 견학을 안내하는 이가 우리가 가진 모든 불을 끄게  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약 3분을 어둠 속에 있었다. 그래도 아무런 빛도 없다. 바로 옆 동료의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절대 암흑이라고 하던가? 이런 어둠 속에서 오키나와 사람들과 일본군은 60여일을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길이가 270미터에 이르는 석회동굴이다.
▲ 아부치라가마 길이가 270미터에 이르는 석회동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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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치라가마 안내실에는 평화의 염원이 가득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평화를 염원하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아부치라가마 기념관의 어린이 전시 작품
▲ 전쟁은 안돼! 아부치라가마 기념관의 어린이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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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라가마 기념관의 평화를 염원하는 어린이 작품들
▲ 평화의 염원들 오부치라가마 기념관의 평화를 염원하는 어린이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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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공원과 한국인 위령탑

평화공원은 오키나와전의 최대 격전지인 마부니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미군의 공격에 몰려 남쪽 끝 마부니에 닿은 일본군과 주민들은 태평양의 거센 파도가 이는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오키나와평화기념자료관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실물자료와 증언, 사진패널 등의 전시를 통해 비참한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마부니 언덕에서 바라본 평화기념공원과 필자
▲ 평화기념공원 마부니 언덕에서 바라본 평화기념공원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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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관에는 파도 모양의 평화의 초석이 있다. 이 평화의 초석에는 국적, 군인, 민간인 구별이 없이 오키나와전 희생자의 이름이 각명되어 있다.

평화기념관의 평화의 초석이다.
▲ 파도모양의 평화의 초석 평화기념관의 평화의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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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나뉘어 각명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분단의 아픔이 보인다. 조선인 희생자의 초석은 최근에도 추가로 각명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빈 공간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평화기념공원에 각명된 남한 지역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들.
▲ 남한 지역 희생자 초석 평화기념공원에 각명된 남한 지역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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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공원에 각명된 북한 지역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희생자 초석 평화기념공원에 각명된 북한 지역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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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공원에는 오키나와전에서 사망한 한국인들의 영령을 모시는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 이 위령탑의 비문에는 '학살'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으며, 탑은 한국 각지에서 모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당초 이 기념탑은 조총련계 조선인들이 기획을 하였는데 박정희가 이 소식을 알고 서둘러 먼저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념과 체제경쟁이 전쟁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하는 데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인 위령탑 공원 안내
▲ 한국인 위령탑 공원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인 위령탑 공원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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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공원 일각에 있는 오키나와전 희생 한국인 위령탑.
▲ 한국인 위령탑 평화기념공원 일각에 있는 오키나와전 희생 한국인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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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모양의 위령탑 제석에는 누군가 놓고 간 꽃이 보인다. 우리 일행은 미처 꽃을 준비하지 못했다. 다만 송구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자고. 다시는 전쟁을 겪지 말자고, 평화를 다짐하면서.

탑 앞의 화살표는 조국을 향하고 있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조국을 죽어서나마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히메유리의 탑과 히메유리평화기념관

오키나와여자사범학교와 현립제일고등학교의 학생 그리고 교직원들로 구성되어 오키나와전에 간호병으로 동원된 '히메유리 학도대'의 전사한 204명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으며, 뒤편으로 히메유리평화기념관이 있다. 히메유리 학도대는 오키나와육군병원에 간호병으로 동원되었고, 부상병 간호, 수술보조, 절단부의나 사체 처리 등을 담당했다.

어린 여학생들은 처음에는 절단된 팔다리를 보고 경악하였으나 나중에는 이 팔은 아무개의 것이고, 이 다리는 아무개의 것이라고 서로 속삭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학생들 역시 종전 무렵 강제로 집단 학살당했다.

오키나와 교사들은 지금 반성하고 있다. 만약 당시에 교사들이 목숨걸고 학생들의 전쟁 동원을 막았더라면 단 한 명의 희생자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히메유리 학도대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희생된 학생들의 위령탑
▲ 히메유리기념탑 히메유리 학도대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희생된 학생들의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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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견학을 마치고 나올 무렵 한 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3학기제라고 한다. 아직 방학이 아닌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온 모양이다. 자못 진지한 모습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수학여행을 와서 히메유리 학도대의 희생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
▲ 히메유리평화기념관의 학생들 수학여행을 와서 히메유리 학도대의 희생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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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노코의 미군기지 건설 반대

1995년에 설치된 SACO(오키나와 기지에 관한 미일 특별행동위원회)는 1997년 12월에 대체 기지 건설을 조건으로 후텐마 기지의 전면 반환을 약속했다. 그 대체 기지로 캠프슈와브의 앞바다인 헤노코 지역 연안을 매립한 헬리포트 건설이 계획되고 있다. 헤노코는 멸종 위기종인 듀공의 북쪽 한계 서식지이며, 산호초가 아름다운 바다다. 1997년부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해 지금까지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해 오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헤노코 마을의 해변에는 주민들이 천막을 치고 농성하고 있었다.

헤노코 마을 사람들은 미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농성을 8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었다.
▲ 2287일간의 농성 헤노코 마을 사람들은 미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농성을 8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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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격려하고 국제적인 연대도 꾀하고 있었다.

헤노코 마을 사람들이 제주해군기지건설 반대 운동과 연대를 하고 있었다.
▲ 제주해군기지 반대 모임 방문 헤노코 마을 사람들이 제주해군기지건설 반대 운동과 연대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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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노코 마을의 주민이면서 전직 교사 출신이라는 노인은 아주 차분하게 헤노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멸종 위기종인 듀공의 서식지요, 산호초가 아름다운 바다를 죽일 수 없다는 것, 미군 기지 건설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평화적인 반대 운동을 지향한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단다. 구호를 외칠 때에도 손이 어깨 높이 이상을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는 정부당국 사람들이 오면 온 몸으로 저지하되, 그들이 목이 마르면 물을 떠다 주면서 대화를 계속 한다는 것이다.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 반대 모임을 이끌고 있는 주민
▲ 미군기지 건설 반대 모임의 주민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 반대 모임을 이끌고 있는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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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아주 활달한 아주머니가 헤노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있는 곳에서 필자와 흔쾌히 포즈를 취해 주었다.
▲ 헤노코 미군 기지 건설 반대현장에서 필자와 주민 성격이 아주 활달한 아주머니가 헤노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있는 곳에서 필자와 흔쾌히 포즈를 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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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염원을 담은 명정 앞에는 캠프 슈와브 미군기지.
▲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염원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염원을 담은 명정 앞에는 캠프 슈와브 미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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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비

오키나와전 당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시민단체가 '한의비 건립을 위한 모임'을 발족하여 자발적 모금을 통해 비를 세웠다. 1999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오키나와 강제징용 조선인 피해자들을 기리는 위령비를 세웠는데, 이 위령비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는 '쌍둥이 추모비'이다. 이 비는 오키나와의 조각가인 긴조 미노루씨가 조각했다.

조선인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가 자발적 모금으로 조성한 비
▲ 한의 비 조선인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가 자발적 모금으로 조성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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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징용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한의비문
▲ 한의 비문 조선인 강제징용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한의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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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탄촌청

요미탄촌의 촌청은 전쟁을 위한 훈련에 반대하고, 미군기지 철거와 반환을 요구하는 의미로 촌의회 만장일치로 미군 기지 안에 세워졌다. 청사 내에 '헌법9조의 비'도 세워졌다. 헌법9조는 바로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일본헌법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바로 그 조항이다.

미군기지 내에 건설된 요미탄촌청
▲ 요미탄촌청 미군기지 내에 건설된 요미탄촌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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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탄촌청이 기지내로 들어오면서, 기지내에 야구장이 만들어져 미군과 주민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보다는 학생들과 주민들이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기지 철거가 어렵다면 가능한 범위에서부터 차차 회복한다는 주민들의 슬기가 보인다. 촌청과 야구장 사이에는 광활한 도로가 있다. 이곳에 촌청과 야구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활주로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미군기의 활주로였던 도로. 주변에는 사탕수수 밭이 있다.
▲ 요미탄촌청의 구 활주로 미군기의 활주로였던 도로. 주변에는 사탕수수 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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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아열대기후로 사탕수수가 잘 자란다. 이곳의 옥수수는 우리나라의 억새와도 많이 닮았다.
▲ 요미탄촌청 활주로 옆의 사탕수수와 필자 오키나와는 아열대기후로 사탕수수가 잘 자란다. 이곳의 옥수수는 우리나라의 억새와도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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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일본의 침략과 종전 후 미군의 주둔.
오키나와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오키나와에는 11개의 미군기지에 약 3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주둔 미군은 주로 해병대이다. 해병은 방어가 주임무가 아니라 공격이 주임무이다. 미군의 주둔은 일본과 오키나와의 안전보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러시아 일부까지를 작전 반경으로 하는 군사적 요충지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차량은 운전석이 왼쪽에 있다. 군용 차량의 색상은 모래색이며, 차량의 하부구조는 자살 특공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운전자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설계되었다.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는 신속대응군이다.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출격하면 1시간 이내에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를 공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평화는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세계 평화인 것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와 일본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미군 기지의 철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깨닫도록 오키나와 역사 기행을 마련해준 동북아역사재단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4박5일간의 빡빡한 답사일정에도 지치지 않고 밤늦게까지 열띤 토론으로 답사의 의미를 새기게 해주신 답사 동료들께도 감사드린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우리 교사들이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의 화두를 안고 연재를 마친다.

오키나와전 당시 진지로 사용되었던 자키미 성적에서 답사단의 기념촬영
▲ 자키미 성적에서 오키나와전 당시 진지로 사용되었던 자키미 성적에서 답사단의 기념촬영
ⓒ 김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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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키나와, #미군,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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