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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늬를 가진 기린 네 마리가 있었다. 그 중 세 마리는 목이 길어 나뭇잎을 따 먹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목이 짧아 나뭇잎을 따 먹을 수 없었다.

 

세 마리의 기린이 맛있게 나뭇잎을 따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러보던 한 마리의 목 짧은 기린은 이내 고개를 푸욱 거꾸러뜨렸고 움츠러들었다.

 

고개 숙인 기린의 목과 몸집이 점점점 작아지더니 '그르릉' 한 마리의 목 짧은 기린은 화려한 무늬를 가진 한 마리의 표범이 되었다.

 

위 글은 설치 미술가 김범(1963~)의 애니메이션 작품 '10개의 움직이는 그림들' 중 <표범의 기원>을 글로 설명한 것이다. 작가는 표범과 기린의 털 무늬가 흡사한 것에 착안해 대상들의 '입장'과 '관계', 현상에 대한 인식의 가변성, 인간의 본성적 갈등과 불안 등을 아찔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표현해 냈다.

 

설치미술가로 잘 알려진 김범은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디어아트 21' 등의 여러

단체전에 참가하면서 미국과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작가다.

 

 

위 작품은 <자신을 새라고 배운 돌>이다. 앵무새나 부엉이 같이 몸집이 큰 새가 앉으면 어울릴 법한 굵은 나뭇가지에 커다란 돌 하나가 올려져 있다. 그러나 저게 돌이 맞냐고 묻는다면 참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벽면에 부착된 모니터가 상영한 비디오에 따르면 그 돌은 자신 스스로를 새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해당 비디오에는 중년 남성 한명과 돌이 등장하는데 중년 남성은 돌에게 그가 새임을 끊임없이 교육한다. 그리고 그 돌을 여러 나뭇가지에 앉히며 '새'로서 나뭇가지에 앉는 법을 가르쳤다.

 

전시관에서 나뭇가지에 앉은 이 돌, 아니 새, 아아니 이 돌을 보는데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분명히 돌이 맞긴 한데, 새라고 교육 받은 이 돌을 보고 있자니 진짜 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돌은 진짜 새인지도 모른다.

 

이밖에도 <말타는 말>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생명을 잃은 사물들> 등. 김범의 개인전 '김범'에는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던 사물들에 대한 고정관념의 네모진 모퉁이를 사정없이 깎아내며 새로운 관점과 신선한 시각을 불어넣는 작품들로 만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신과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모니터를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가? 이 모니터가 실은, 자기 자신이 모니터임을 교육받고 이곳에 온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번 김범 개인전은 오는 8월 1일까지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계속된다.


태그:#김범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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