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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학기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확 풀린 날씨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를 벗어난다. 집으로 가기를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외지생활을 거듭할수록 이토록 집이 그리운 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하다. 마냥 자유를 누리다가 자유가 어느덧 흠칫 무서워지는 순간이다.

 

항상 집에 갈 때면 버스를 많이 갈아타야 한다. 시골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길로 접어들 때면 항상 버스에는 사람이 많다. 앉아서 집에 돌아가는 적이 거의 없다. 주로 고향을 지키고 계신 어르신들이 많기에, 장날이면 시내로 나가시는 할머니들이 특히 많기에 버스는 항상 자리가 없다.

 

오늘은 버스에 낯선 얼굴이 보인다. 당당히 팔뚝에 '해군사관학교'라 적혀있는 제복을 입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과 동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과 서있다. 휴가를 나온 듯, 마중을 나온 가족과 함께 서있는 모습이다.

 

동생은 오빠의 사관학교 모자가 멋있는지 이리 저리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오빠에게 씌워보기도 한다. 오빠가 자랑스러운 것 같다. 버스에 타서도, 내리면서도 여인은 아들의 모자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자랑스러움이 온 몸에 배어 있다.

 

내린 곳을 보니 우리 집보다 더욱 더 시골이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사를 짓는 이곳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는 많지 않다. 명문대를 가거나,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곳으로 가는 것. 그나마도 쉽지 않다. 명문대에 합격할 점수지만 여건이 만만치 않아 길을 돌리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형편상 일반대에 가기 힘든 아이들은 이렇듯 사관학교에 간다. 물론 예전과 같지 않다지만 사관학교는 사관학교다. 여전히 점수가 높다. 가기도 힘들지만 합격하면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한층 덜어지는 곳. 그 길을 통해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노린다. 아마도 버스 안의 여인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느낌이었으리라. 모자를 꼭 움켜잡은 손에서 볼 수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장교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입시지옥의 본질이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다. 계층간 막혀있는 벽 중에서 유일하게 벽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사다리. 바로 수능 한 방의 인생역전이다. 앞에서 아무리 공교육정상화, 평준화, 입시위주 교육 철폐를 목이 터져라 부르짖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런 이야기들은 그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부받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다. 그네들이 무식해서도 아니고, 이기적이어서도 아니다.

 

계층간 벽이 막혀있고, 중하위 계층은 상위계층으로 올라가기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부라는 수단은 위 계층으로 쉽게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재 교육정책이 저 사다리를 점점 잘라내고 있더라도, 단 하나의 나무막대기가 남을 때까지 우리 교육은 이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서민들은 포기할 수가 없다. 자신의 자녀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원하고,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밤마다 아이들을 학교에 묶어놓고 학대를 하는 현재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분상승의 기회가 더욱 좁아짐으로, 강남 아이들을 따라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전인적 인간도 중요하고, 바른 인성을 갖춘 인간도 중요하다. 아니 그것이 교육의 최대 목적이다. 그렇지만 자기 아이가 전인적 인간이 되고 바른 인성을 갖추었는데, 자신이 살아온 지난 고통의 나날을 그대로 겪는다면? 그래서 우리나라의 입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극심한 가난을 겪었던 어르신들이 박정희를 존경하듯, 그분들에게는 민주화보다는 당장의 끼니해결이 더 큰 문제였기에 대의민주주의, 민주화, 인권 따위 보다는 당장의 경제 성장이 더 큰 행복이었을 것이다.(물론 경제성장이 박정희의 공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 공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것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고, 현재 입시의 부정이 힘든 것이다. 당장 굶어죽을 상황에서 밥 잘 먹게 해준다는데 민주화가 무슨 소용이고, 공부 안하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전인교육이 무슨 소용일까.

 

이 닫힌 계층구조가 해결되지 않고는, 어떤 정책을 쓰더라도 입시위주의 교육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지금 같은 공교육의 파행이 계속될 것이다. 실업계-인문계-특목고 등으로 나뉘는 고교의 서열이 그대로 인생의 서열을 결정할 것이다. 아마도 나중엔 초등학교도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으며,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과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곳에서는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크기에(수백 날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용산유가족들, 우리나라는 여전히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다들 앞 다투어 자신의 아이들을 입시지옥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어 보이기에.

 

위에서는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계속 걷어차고 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영어유치원-사립초-국제중-특목고-명문대로 이어지는 그네들만이 탑승할 수 있는 최신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일반 서민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모조리 치워버릴 것이다. 아마도 이 사다리가 전부 사라지게 되면 이 나라가 조금은 변할 것 같다. 사다리의 부재와 동시에 교육은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나면 무언가 새로운 희망의 싹이 틀 것 같다. 그렇게 믿는다.

 

가위로 잘라내기 전까진 풀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교육은 심하게 헝클어져 있다.


태그:#입시,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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