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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날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아버지는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타들어가는 고기만 뒤적였다. 옆 테이블의 지분거리는 소리 때문에 행여 아버지가 못 들으셨을까봐 다시 말했다.

 

"아버지, 소 사면 큰일 날껍니다."

 

축사에 소만 들이면 됐는데, 미 쇠고기가 수입되다니

 

 

결혼 후 출가해서 도시로 나와 살던 아버지는 늘 귀향을 꿈꾸셨다. 그리고 소를 키우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의 꿈은 세 가지였는데, 소와 소를 키울 수 있는 축사 그리고 온 가족이 오순도순 살 수 있는 집이 그것이다. 셋방살이로 식솔을 거느려온 한 가장의 서러움과 가족들 향한 죄스러움이 고스란히 집과 땅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필시 아버지의 꿈에는 고향을 떠나면서 '내 기필코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던 사내대장부의 포부도 서려 있었을 것이다. 으레 남자들은 자기의 성공을 세상에 증명코자 한다. 이버지의 자기 증명이란 소를 키우는 것이었다. 농민의 자식에게 소보다 더 값어치 있는 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작년 1월 경. 아버지는 어렸을 적 나고 자란 동네 어귀에 땅을 샀다. 멀리 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그리고 당신 소유의 땅에 오랜 시간 모아온 돈을 모두 털어 축사를 지었다. 족히 100마리의 소도 들어갈 정도의 넓은 땅과 큰 축사였고, 축사 옆에 아담한 집도 지었다.

 

이제 남은 일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오픈카를 타고 금의환향하는 사람처럼, 소 떼를 몰고 생에 첫 울음을 뗐던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소가 축사에 들어오는 날은 실로 그림 같은 풍경이 될 거라 믿었다. 나도 아버지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같은 해 5월. 한미 FTA 체결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정국을 뒤흔들었다. 사료 값으로 시름하던 농민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불난 집에 기름통을 던져놓는 꼴이었다. 역정이 난 농민들은 행동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었다.

 

소 값이 돼지만도 못할 정도로 떨어지고 있었고, 사료 값은 두 배 이상이 뛰고 있었다. 만약 소를 키운다면 소가 사람을 잡아먹을 판국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축은 애완견보다도 못한 애물단지였다. 오죽했으면 8000여 명의 농민들이 여의도 광장에 모여들었을까.

 

5월 22일,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여의도로 집결했다. 당시 여의도는 사람으로 미어터졌고, 사람들은 분통이 터졌다. 평소 밭 갈고, 소 몰고, 트랙터를 운전하던 농민들의 손에는 피켓과 깃발이 들려 있었다.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논두렁처럼 깊게 패인 주름살이 여의도를 수놓았다. 그걸 진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참담했다. 더군다나 내겐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믿어라, 이명박이가 잘 해 줄 거다" 하시더니...

 

 

며칠 후 6월. 서울에 지인을 만나러온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따뜻한 밥 한 공기 사주겠으니 나오라고 전화를 하셨다. "밥이나 묵자." 한 걸음에 달려간 나는 아버지와 독대했다. 그것도 한우를 파는 고기 집에서.

 

불 판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기들은 내 입술이 말라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타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레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소를 사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만 했다. 마침 TV에서 FTA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저거 보세요. 소 사면 안 된다니까요."

 

밥을 한 술 뜨시던 아버지는 '킁' 하고 기침을 했다.

 

"믿어라, 이명박이가 잘 해 줄 거다. 저건 농민들이 잘 못한 기라. 저라고 막무가내로 나서면 저거들 욕심 채울려꼬 하는 거밖에 더 되나."

 

골이 너무 깊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의사소통으로 합의를 이끌어내기에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너무 틀렸다.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라면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할 테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고 벌이는 논쟁은 소모적인 논쟁이 될 공산이 컸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란 배신을 당하지 않는 이상 금이 가지 않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한 것이었다. 이미 농민들 일부는 망했고 일부는 망해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나는 이 말을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버지도 농민이자나요."

 

꿈 접고 중국 가신 아버지, 상처는 두고 오시길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농민이 아니다. 소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오던 축사는 결국 남의 손에 헐값에 넘어갔다. 농민이 되려던 당신의 꿈이 백일몽처럼 사라지고 나자, 아버지는 병든 닭처럼 말수가 줄고 고개 숙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더니 돌연 다시 사업을 하겠다며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어도 할 줄 모르면서 왜 가셨을까? 이왕 가셨으니 땅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셨던 만큼 넓은 대륙을 실컷 보고 오셨으면 한다. 행여 대륙 어딘가에 눈망울이 선하고 풍채가 당당한 소들이 있걸랑, 고놈들도 실컷 보고 오셨으면 한다.

 

그리고 나쁜 건 버리고 오시길 바란다. 가슴에 깊게 생겼던 상처는 반드시 버리시길. 그 상처는 지평선 너머에 고이 묻어두고 오시길 바란다. 상처가 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누구도 그 상처를 알아보지 못하게.


태그:#농민 ,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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