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평소 갖고 있던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인다. 멋있는 풍경, 맛있는 음식, 상쾌한 체험, 그리고 오래된 유적 등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흥미롭거나 궁금했던 대상을 찾아 오랜 시간 그 곳에 머물고, 느끼고, 기록한다.
사진을 좋아하는 나 또한, 여행을 하면서 흥미롭게 느끼는 대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길거리에 앉아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관찰하다보면, 수 많은 사연과 부딪치게 되고, 셀 수 없는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가끔씩은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정의하는 여행의 진정한 매력이다.
인도는 개표를 열차 안에서 한다. 따라서 별도의 개찰구는 없으며 역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인도의 기차역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의 눈에 흥미롭게 비춰지는 것은 역에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않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과 이곳 저곳에서 여행객들에게 구걸하는 앵벌이들이다.
인도를 처음 여행하는 소위 문명국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눈살을 찡그릴 수도 있고, 저개발 국가의 일반적 모습으로 한 번쯤 넘겨버릴 수 있지만, 인도를 여러 번 가 본 사람은 예전보다 많이 깨끗해진 역이나 공항의 모습에 무척 당황하게 된다. 예전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질서가 난무한 곳이 바로 인도였다. 하지만 2009년의 인도는 놀랍도록 깨끗하다. 해가 갈 수록 인도엔 변화의 가속도가 붙고있다.
하지만 변화의 와중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곳 사람들의 잔잔한 정서이다. 특히 역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이별과 만남이 수없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보면 무척 재미있다. 나 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데이트족, 이별이 서러워 아쉬워 하는 사람들, 만남이 설레 어쩔줄 모르는 사람들,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역에는 그 곳에 모인 사람만큼이나 많은 곡절로 항상 시끌벅절하다.
예전에 인도 여행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릭샤왈라에 대해 안좋은 기억 하나 둘 쯤은 가지고 있다. 그들의 바가지 상술이 그만큼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심한 바가지를 씌우는 릭샤왈라는 만나지 못했다. 물론 아직도 자국민과 외국인에 대하여 차별 요금을 받기는 하지만 사기 수준의 바가지를 씌우는 왈라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인도의 택시 오토릭샤. 어느덧 진정한 택시의 임무를 다 하고 있었다. 아직 외국인에게 조금 비싼 요금을 받기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도 빠른 시간 안에 표준요금을 받게 될 날이 찾아올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일단은 반갑기도 하겠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재미가 많이 줄어들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릭샤왈라들과 흥정을 하다보면 그들과 없던 정도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다.
산뜻한 델리, 그리고 도심을 가득 메운 온갖 탈 것들. 남인도에서 출발해 이틀간의 여정을 거쳐 델리에 도착해 보니 인도를 움직이는 중심부답게 모든것이 활기가 넘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심각한 대기오염이지만 이 또한 인도정부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으로 점차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인도의 수도는 어디? 라는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뉴델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뉴델리는 영국사람들이 델리 안에 지은 신시가지를 말 하는 것이다. 코넛 플레이스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뻗은 도로가 건설되어 있으며 정치와 행정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 수도가 바로 뉴델리이다.
인도의 중심부답게 코넛플레이스는 깨끗하다. 이 곳에는 부랑자와 소도 없으며, 서민의 발인 사이클 릭샤도 들어올 수 없다. 거리는 누군가 항상 청소를 한다. 정식 청소부는 물론이고, 레스토랑이나 상점의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항상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상당히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이다. 고급 레스토랑의 화장실을 들어가면,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무릎을 꿇은 채 화장실 청소를 하는 청소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화장실 청소가 끝나기 무섭게 가게 앞 도로 청소도 한다. 청소부들은 정말 하루종일 청소만 한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사, 수드라는 인도의 주요 카스트다. 이 중에서 수드라는 이번 생에 처음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이다. 열심히 업을 쌓으면 다음생에 바이사로 태어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도에는 이 네 개의 카스트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위해 한 개의 카스트를 더 만들어도 될 듯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힌두 법전이 카스트를 네 개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수드라에도 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바로 불가촉천민들이다. 이번 생에 처음 사람으로 태어난 수드라보다 못한 이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너무 불결해서 함부로 스칠 수 없는 종류의 미물이다. 인도사회에서 그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청소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 계층의 사람들이다.
인본주의 관점에서 볼 때 말이 안되는 논리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마저 서로 다르고, 반드시 깨끗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도사람들이다. 성문법보다 무서운 것이 관습법이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정착을 하면 어지간히 개선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사회를 이끌어가는 카스트제도는 앞으로 인도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개선해야 할 숙제인듯 하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배낭여행자들은 빠하르간지라는 여행자 거리에 행낭을 푼다. 중급 이하의 숙소와 지저분한 거리의 풍경으로 인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은 질겁을 하기도 하지만, 일단 맘 먹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다보면 없는 게 없고 나름대로 재미있는 곳이 바로 빠하르간지다.
이 곳은 그야말로 사람사는 냄새가 물신 풍기는 동네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악다구니를 쓰는 온갖 상인들과, 그들에게 절대로 가만히 앉아서 손해보지 않겠다는 전세계 여행자들의 대단한 기싸움이 매일같이 펼쳐지는 삶의 현장이다.
거리 한켠에는 이 생존경쟁에 자기도 빠질 수 없다는 듯, 어디서나 참견을 하며 눈치없이 끼어드는 인도의 부랑소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빠하르간지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삶의 욕구가 적절한 형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울리는 모습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
빠하르간지를 오가는 자전거릭샤들의 삐걱거리는 기계음, 간단한 먹거리며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과 손님들의 즐거운 흥정, 배낭을 둘러메고 거리 이곳저곳을 헤매는 전세계 인종들의 자랑스런 모국어, 그리고 달려드는 파리를 열심히 쫒는 소들의 꼬리질에 이르기까지 그 곳에선 어디를 가나 진지한 삶을 향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냥 흘러가는 그 곳의 하루지만, 잘 관찰하면 빠하르간지는 아주 훌륭한 관광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눈여겨 바라보며 그들의 사연을 추측하는 즐거운 상상이란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델리를 비롯한 중북부 인도에선 멋진 터번을 쓴 시크교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처음 터번을 보았을 때는 '그저 멋으로 썼겠거니'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그들의 종교에서 기인한 전통의 하나였다. 시크교도들의 터번은 일생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는 그들의 머리카락을 상투처럼 비틀어 감싸고 보호하는 도구이다.
인도사람들은 시크교도을 펀자비라 부르기도 한다. 인도의 펀잡주를 중심으로 세를 이루는 시크교도들을 부르는 말이다. 흰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만을 모아 만든 종교인 시크교. 그래서 시크교에는 카스트가 없으며 유일신을 믿는다.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시크교도들 중의 상당수는 인도사회를 주무르는 큰 부자들이다.
전통과 근대, 그리고 탈근대와 현대가 공존을 이루며 화합하는 사회.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어찌보면 혼돈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굴러가는 사회. 그것이 내가 본 인도사회이다.
인구 12억이 어울리며 잘 사는 나라. 다양한 습속과 취향이 적당히 어울린 대륙에서, 새로운 세대는 그들 나름의 전통을 각자의 방식으로 계승하며 인도를 발전시킨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대충 훓어 본 인도. 그래서 약간의 오류도 없지않아 있지만, 어쨌든 인도는 서서히 변하고 있는 중이다.
짧기만 했던 인도여행. 허술하기 짝이없는 여행 계획속에 과감하게 떠난 여행이었지만, 광활한 대륙의 순수한 인도인들은 때 묻지 않은 그들의 삶을 내게 보여주었다. 물론 내가 보고싶은 면만 보고, 듣고싶은 것만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도시의 매너리즘에 빠진 내게 한 번 쯤 진지한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었고, 삶에 대한 즐거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진지하게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 나는 그것을 인도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생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