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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내의 유혹>(SBS)을 보기 시작한 것은 정교빈(변우민 분)이 바람을 피우는 부분부터였는데 처음엔 이야기를 질질 끌지 않아서 그리고 캐릭터들의 연기가 볼 만해서 중독자처럼 매일 그 시간에 TV 앞에 앉았다.

 

그러다가 한 남자의 주체할 수 없는 바람기, 하이톤을 자랑하는 시어머니의 앙칼진 모습, 어찌됐건 유부남이라도 차지하고 보려는 독한 여자, 납치에 살인교사, 복수로 이어지는 이 드라마의 스토리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TV가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난 왜 이렇게 잘 넘어가는 거야

 

이건 순전히 나의 경험이지만, 10대에는 스무살이 되면 <세남자 세여자>처럼 혹은 <논스톱>처럼 로맨틱한 대학생활을 누리다가, 졸업을 하고 나면 곧!바!로! 송윤아 같은 포스를 내뿜는 커리어우먼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어디 그뿐인가. 결혼은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나이인 26~28세 사이에 재력가 집안의 착한 아들과 결혼해서 신데렐라처럼 예쁘게 살 줄 알았다.

 

허나, 이러한 생각은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자신은 국제중을 거쳐 특목고에 간 다음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갈 것이라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 같은 허황된 망상일 뿐이었다. 뉴욕의 삶이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경험에 비춰 봤을 때 드라마와 현실은 이렇게 달랐다. <논스톱>을 꿈꾸던 대학생활의 낭만은 등록금 앞에서 '올스톱'됐다. 1%가 받는다는 장학금을 노려 보지만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한 어르신들을 이기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결국, 학기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고 20대 내내 그 돈을 갚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호텔리어> 속 송윤아 같은 커리어우먼의 일상을 꿈꾸던 직장 생활은 실제로는 '막장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치열하기만 했다. 그 누가 신입직원을 바로 커리어우먼으로 대접해 주겠는가! 정말 정말, 나는 순진했다.

 

나는 신입사원 시절 막내로 불리며 팥쥐 친구, 신데렐라 언니 같은 직장 선배들 틈에서 아등바등 했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찾아 이 직장 저 직장 전전하다가 다행히 적성에 맞는 직장에 안착해 3∼4년차가 되고 나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 후배들한테 치여 '참을 인' 자를 얼마나 새겨야 했던지.

 

연애는 또 어떤가. <내사랑 김삼순>의 '현빈', <상두야 학교가자>의 '비' 같은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대학시절 연애를 제대로 못 했다면 직장생활 하면서 선 또는 소개팅을 하기 마련인데 정말 이런 만남에서 인연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다가 주스로 갈아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못해서 사내연애라도 하는 날엔 '해피엔딩'은 커녕 '배드앤딩'으로 마무리되면서 둘 중 하나는 이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사내 커플'이라는 카페를 1년 정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500여 명의 회원 중에서 결혼에 골인한 커플은 2명 정도였다. 사내 커플이 얼마나 이뤄지기 어려운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별은 내가슴에>는 사내 커플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심어주는 드라마였다.

 

내가 <아내의 유혹>을 싫어하는 세가지 이유

 

이렇게 드라마와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30줄에 들어선 요즘, 그래서 더더욱 <아내의 유혹>이 무섭다.

 

첫째, 캐릭터들이 모두 비정상이다. 그들은 모두 화가 나 있거나, 매일 같이 비정상적인 사고를 반복한다. 서로에게 꽥꽥 소리를 지르고, 맘 속으로 칼을 갈고, 시아버지의 재산을 훔치고 시어머니의 옷을 벗겨 팔아먹겠다고 당차게(!) 외친다. 하다 못해 요즘엔 애리의 어린 아들까지도 못된 짓을 일삼는다. 정말 현실이 이렇다면 '엑소시스트'가 따로 없을 것이다. 드라마여서 다행이지.

 

하지만 이런 안도를 하고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어릴 때 드라마 속 삶을 현실의 삶과 일치시켰던 것처럼 이 드라마를 보는 지금의 10대들 혹은 20대 초반들이 시어머니는 다 그렇고, 남편은 바람을 쉽게 피우며, 복수는 언제든 나의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염려된다. 

 

둘째,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납치·살인·협박! 비디오 세대인 나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이 검은 그림자로 표현되는 질 나쁜 영화라고 보아왔다. 비디오를 틀 때마다 말이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경고도 없이 일일 드라마 속에서 납치·살인·협박을 보며 살고 있다. 

 

<전원일기>나 <초원의 언덕> 같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 아닌 '미움이 가득한 집' 이야기를 두고 최고의 시청률이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자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로 비디오를 보면서 더 강력한 것을 찾는 심리와 비슷한 것 아닐까? 

 

셋째, 돈 앞에 어른 없다. 돈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시부모님을 비롯한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에게 바락바락 대들다 못해 잡아먹을 것 같은 포스를 내뿜는 캐릭터들.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기본'조차 갖추지 않은 인물들이 자랑처럼 센 척하고 다닌다. 정말, 이 드라마는 20세 미만 시청 금지여야 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요즘 10대들이 버릇없다고 하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자라면서 시부모님 우습게 알고 그분들이 평생 일궈온 재산이나 노리고 노인들에게 소리치다 못해 훈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긴, 청소년의 17%가 10억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서 10년이라도 썩을 수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도 있었으니 드라마 만큼이나 현실도 막장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 먹는 시간에는 모난돌 양성 드라마를 지양했으면 좋겠다.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드라마가 가진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기분 나쁜 소식을 전하는 저녁 뉴스보다도 더 나쁜 것이 바로 막장 드라마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아내의 유혹, #막장드라마, #호환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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