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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항상 나를 반겨준 것은 두 갈래로 내 키의 두 배도 넘었던 당간지주였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때는 이게 무엇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당간지주를 이용하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당간지주 사이로 공을 차 넣는 게임으로 방과후를 장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당간지주는 나의 개선문이요, 고인돌이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사찰 입구에 설치되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 곳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많은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터로 짐작되고 있다.

 

지주는 약 70㎝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는데, 이 두 지주의 사이가 당간이 들어갈 부분이다. 특별한 장식없이 소박하며, 중간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금 굵어졌고, 밑부분에 이르러는 더욱 굵어진 모습이다. 깃대를 고정시켜주는 홈이 안쪽 윗부분에 파여져 있다.

 

이곳에 함께 있는 홍천희망리삼층석탑(보물 제79호)과 관련지어 볼 때, 거의 같은 시기인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1963년 보물 제 80호로 지정되었다.

 

"우리집 옆에 있어요"

 

희망리 당간지주는 홍천읍내의 큰길을 가로질러 홍천강둑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주변은 주택가이고 앞으로는 높은 제방이 가로막긴 했지만, 바로 제방 너머 홍천강을 바라보게 되었던 게 당간지주의 본래 모습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 근동 일대가 모두 여기 당간이 알리던 절터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땅을 파면 기와 조각이 나온다고 하니 아마도 이 근방 유수의 대찰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현재 당간의 위치나 주변으로 봐서 천변(川邊)사찰이며 평지가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다만 여기 절이 있던 당시에도 둑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지도 않은 큰 개천이 절과 너무 가깝게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만일 둑방이 없이 홍수를 만난다면 물은 여지없이 넘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생김새가 궁금하다

 

당간지주는 약 70cm 거리에서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마주보는 안팎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수수하다. 맨 윗부분에만 작은 호선(弧線)이 그려져 있고,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위쪽 한 곳에만 마련됬으며, 양 지주의 안쪽 윗면에 정방형의 간구가 있는 등 고려 중기에 흔히 보이던 생략된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기단과 간대가 본래 없지는 않았겠으나 석재조차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알 방법이 없고 현재의 기단은 새로 단장해 마련한 듯 방형의 넓적한 공간에 자갈이 촘촘히 깔려 있다. 그 안에 5cm 키의 당간지주를 세웠다.

 

이렇게 좋은 문화제를 손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의 집 앞에도 이러한 문화제가 있을 것이다. 평소 그냥 놓치기 쉬웠던 문화제, 그 문화제가 다시 빛을 발하게 하는 건 후세의 우리의 몫일 것이다.


태그:#홍천, #홍천희망리당간지주, #홍천 당간지주, #당간지주, #김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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