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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에서 상대가 설정한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선거와 같은 정치활동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상대가 원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즉 상대가 제시한 누구에게나 좋게 들리는 '참 좋은 의제'에 매몰돼 프레임 안에서는 논리적 비판이든, 무조건적 동의든 이미 상대방의 홍보대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핵심은 '참 좋은 의제'를 제시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그 누구도 속마음이야 어쨌든 공식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의제를 제시한다면, 해당 의제에 대해 비판이나 동의의 반응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 외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프레임의 힘이다.

남북정상회담이 그렇다.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남한사회에 직격탄이 될 수 있는 핵위험을 완화시킬 수 있는 주춧돌을 놓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북한의 자원과 남한의 기술력을 결합할 수 있고, 우리가 북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철도길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득이다. 또한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도 실향민, 납북포로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참 좋은 말들의 향연'인 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동의하는 평화, 경제, 민족의 가치를 내세울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은 분명 '참 좋은 의제'임에 틀림없다. 이런 가치를 내세우는 대화 상대방에게 '대선을 앞두고 벌이는 정치쇼 아냐?'라고 묻는 것은 반 평화, 반 민족 세력으로 비춰지기 쉽고, 경제적으로도 해가 되는 집단으로 비춰지기 쉬운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게 싫어도 국민의 약 80%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말들의 향연인 이 정상회담 의제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신문의 고민이다. 눈엣가시 같은 노무현 전략가(?)가 또 한번 머리를 굴린 것이 분명한데, 원 포인트 헌법개정이나 다른 사안들과 달리 함부로 비판 또는 비난을 할 수가 없다.

여권의 '정권 재창출'이라는 빤한 의도가 보이지만, 전략가 노무현이 제시한 정상회담이라는 코끼리는 거대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해 상대방의 코끼리를 쓰다듬는 방법이외에는 다른 묘수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참 좋은 의제'를 제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한때 언론사의 지면과 화면의 반을 차지해 '기자실 통폐합' 반대를 외쳤던 사건이다. 정부는 취재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기자실 통폐합을 주장하고,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워 취재권 침해를 결사반대했던 사건이다.

정부는 자신들을 향해 비판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만 해대던 언론집단이 맘에 안 들던 차에 언론의 선진화라는 참 좋은 의제를 내세워 기자실 통폐합을 주장하고, 언론은 기자실이 축소되거나 없어지면 취재의 불편과 언론 전반의 목소리 약화를 우려해 늘 써먹어 더 이상 히든카드가 아닌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워 부딪친 사건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내세운 가치는 워낙 당위적인 가치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적었지만, 정부와 언론사는 비슷한 수준의 좋은 말을 내세워, 양쪽 집단이 공통적으로 수혜집단인 국민을 뒤로한 채, 도대체 왜 싸우는지 모를 자기들끼리만의 치고받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원래의 속마음을 숨긴 채 '평화, 민족, 선진화, 자유'로 대변되는 참 좋은 말들을 내세워, 정작 국민들을 위하다던 애초의 목소리와는 달리 국민을 배제한 채 자신들만의 목표를 향해 독단적인 발걸을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 열린 남북정상회담도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DJ를 제외한 최측근 인사들이 불법자금 송금으로 줄줄이 철창 신세를 졌고, 서로 좋은 말들을 내세우던 언론사와 정부도 국민들에게 '제 밥그릇 챙기기'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참 좋은 의제 설정에는 성공했지만, 이 참 좋은 의제설정 덕에 더 이상 비판할 수 없게 된 상대 세력과 국민을 든든한 후원자로만 생각하고, 애초 내세웠던 가치를 성사하는 대신 속에 품고 있던 가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들이다.

노 대통령도 의제 설정은 훌륭했다. 또한 건전한 비판의 목소리도 내기 힘든 형국이다. 이 참 좋은 의제가 '평화, 민족, 공존'이라는 가치 실현이 될 지, 단순히 여권의 '정권 재창출'이라는 모두가 우려하는 목적에만 이용될지 찬찬히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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