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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핵 6자회담이 지난 2월 13일 6개국의 합의로 타결된 가운데, 이날 오후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폐막 회의에 앞서 참가국 수석대표들이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얼마 전부터 외교부 당국자들 사이에는 "반 발짝 뒤에서(a half step behind)"라는 말이 심심찮게 돌고 있습니다. 급물살을 타는 북미 관계와 맞물려 남북 관계는 '반 발짝 뒤에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핵 위기의 본질을 북미 관계에 있다고 파악한 노 대통령이, 베를린 회동과 2·13 합의 도출을 보면서 "남북 관계가 서둘러 갈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이같은 뜻을 통일외교안보 담당자들에게 밝혔다고 합니다.

외교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안보정책 조정회의 등을 통해 충실하게 정책에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청와대 역시 2·13 합의 '초기 이행조치' 기간인 다음달 14일까지, 북측의 약속 이행에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남북관계를 '반 발짝 뒤에서' 따라가게 해도 될까요? 그리고 북미 모두 순조롭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면서 4월 14일을 지내면, 그 뒤에는 남북 관계를 북미 관계와 '어깨를 나란히' 진행시킬 수 있을까요?

1. '반 발짝 뒤에서' 따라가다보면 '어깨 나란히' 되나요?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싶은 게, 지난해 가을 이후 부시 미국 대통령의 모습니다. 북한에 '악의 축'이라는 낙인을 찍고 한사코 화해와 협상을 거부하더니, "김정일 위원장과 종전 선언을 할 수 있다"면서 이제는 '악의 축'과 국교 정상화를 할 수도 있다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가히 '두 얼굴의 사나이'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도 이 정도는 아니다 싶을 정도입니다.

무엇이 부시 대통령을 바꿔놓았을까? 이라크와 이란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고 그에 따라 중간 선거에서 참패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고, 거기에 북의 핵실험도 무시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현 상황에서 관심은, 북미가 핵 문제를 풀고, '혁명의 수도' 평양과 '자본주의 대제국의 심장부' 워싱턴에 각자의 대사관을 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한반도 평화 체제'에 합의할 수 있느냐도 핵심 과제일 것입니다.

우여곡절은 피할 수 없겠지만, 현재의 흐름으로 보면 '핵 폐기'와 '국교 정상화'를 주고받는 대타협에 이를 것입니다. 가장 주목하는 근거는, 부시 대통령의 자세 변화입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그가 지난해 가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럼스펠드·로버트 조시프 같은 골수 신보수주의자(네오콘)의 퇴진, 체니 부통령의 입지 축소, 그리고 8년 임기 동안 치적이 없을 수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절박한 사정, 내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공화당의 입지 등이 배경으로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두 얼굴의 사나이' 부시 대통령

또하나 눈여겨 볼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판단입니다. 지난 2000년 김 위원장은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추진하면서 국교 정상화를 눈 앞에 뒀다가 실패한 바 있습니다. 2차 핵 위기를 겪고 있는 김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과 일을 내겠다고 결심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 결심의 속도와 폭은 좀 더 지켜볼 일입니다. 아직까지는 김 위원장이 조심스럽게 부시 대통령의 속내를 확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결심의 시점이 신중론자들의 예상보다 빠를 수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북미 관계 정상화기 이뤄질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습니다.

이같은 전망에 대한 반론들도 강력합니다. 북미의 불신이 워낙 깊다는 점, 고농축 우라늄 HEU 문제, 대선을 의식한 미국 민주당의 견제 가능성, 테러 지원국 명단 삭제와 적성국 교역법 적용 배제 과정에서 미 의회의 태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미 핵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 최고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1993년 1차 북미 핵위기 당시 미국은 북폭까지 검토했다가 결국은 클린턴 대통령의 결심으로 북미 기본 합의체결까지 나갔습니다. 지금은 부시 대통령이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을 보이며 북과의 관계 정상화 논의 수준까지 끌고왔습니다.

테러 지원국 명단 삭제나 적성국 교역법 적용 배제 문제의 경우, 미 의회가 기준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승인이나 동의 사안은 아니며, 미 행정부 즉 대통령의 권한에 따라 이뤄집니다. HEU 문제 역시 BDA 문제처럼 몇 가지 우회로가 제시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최근 들어 미국의 입장이 완강하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2. 북한·미국·일본·중국·러시아의 손익 계산서

이번에는 궁극적인 핵 폐기와 국교 정상화를 이룬 북한과 미국, 중국이 과연 무엇을 얻는가를 따져보겠습니다. 이는 이후 남북 관계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문제를 생각하는 데 기본이 됩니다.

먼저 북은 숙원인 미국으로부터의 안전 보장을 담보할 수 있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경제 체제에 들어가,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 개발은행(ADB) 등으로부터 경제 지원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미국 등 외국 기업들의 투자 유치 가능성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요약하면, 국제 사회의 변방에서 외톨이로 지내온 사회주의 변종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미국의 보증을 받으며 당당하게 '보통 국가' '정상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북한은 일본과도 국교 정상화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일본의 아베 총리가 오는 7월의 선거를 의식해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지만,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정책을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북한에는 100억 달러 규모의 현금과 현물이 들어갑니다. 지난 2002년 북일 정상회담 즈음에 양국은 10년 동안 이 정도 규모의 배상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합니다.

중국은 북한이 미국의 영향권에 넘어가지 않도록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강조할 것이고, 중국 자본의 북한 진출도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은 러시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에는 자신의 몸값을 더욱 올릴 수 있는 전략적 고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체제 안정과 경제 발전의 기반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정상국가'로 탈바꿈하는 북한, 다양한 중국 견제 가능해진 미국

미국 역시 크게 밑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핵 물질 또는 핵 무기의 이전 가능성을 크게 줄였습니다. 한·미·일 동맹에 대한 적대 세력의 중립화(또는 우군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중국 견제 전략이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또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강화하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여기에 이라크와 이란 핵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특히 이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리비아 모델'이 아닌 '북한 모델'을 적용할 가능성도 갖게 됐습니다.

이와 함께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20세기 냉전의 마지막 산물인 북한 문제를 풀어냈다는 외교적 업적을 챙기게 됐습니다. 미 공화당은 내년 대선에서 민주당에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게 됩니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경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이뤄냈다는 점, 그리고 외교적인 힘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망치한인 우방국 북한이 미국의 영향권에 노출됐다는 부분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정치·외교·경제적 역량을 동원해 견제할 것입니다. 한국을 지렛대로 활용하려 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인데, 이 점은 장래 한국의 외교적 숙제가 될 것입니다.

3. 한국, 북에게도 미국에게도 '팽'당할 수 있다

▲ 지난 1월 24일 이재정 통일부 장관(맨 오른쪽)이 김동근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장(가운데), 북한의 주동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과 함께 선죽교를 만져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태경
한국의 손익대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먼저 북미 핵 문제의 중압감, 특히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코리아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어, 국제 신용평가의 상향 조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 정치적으로도 대북 포용 정책을 둘러싼 국론 분열을 없앨 수 있습니다. 또 남북 관계를 발전시킬 계기를 마련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남북 관계가 발전할 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남북 관계 발전의 불균형이 깊어지거나, 자칫 오히려 정체 내지는 후퇴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대북 포용 정책을 통한 남북관계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북측의 국내외 여건 때문이었다는 점입니다.

북은 1990년대 초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다 미국의 방해로 좌절되면서 역으로 1차 핵 위기를 겪었습니다. 1994년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 냈지만 별다른 진전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고, 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체제 위기가 치솟았습니다. 여기서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과의 관계 개선을 하나의 돌파구로 삼은 것입니다.

문제는 북미가 관계 정상화를 이룬 이후, 남북의 전략적 여건이 너무나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고 남측이 쌀·비료 지원을 끊고 미국 편에 서서 압박해왔다고 생각하는 북으로서는, 더 이상 남측이 크게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미국 통한 북한 접근'은 자멸의 길

그렇다고 북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 공단 건설 사업 등을 접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좀더 좋은 조건을 요구할 가능성이 큽니다. 금강산 관광 대가를 올리겠다거나, 개성 공단 건설 속도를 조절하자거나 임금 등을 재조정하자는 등 남측을 압박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사회문화 교류는 현 수준에서 유지하거나 점차 축소하려 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을 기할 수 있게 된 마당에 체제를 이완할 수 있는 남북 교류를 제한하려 할 것입니다.

결국, 경협과 사회문화 교류를 통해 조금씩 북의 변화를 유인하고 정치·군사적 쟁점을 타결해 남북통일(또는 통합)을 이룬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남측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뾰족한 수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북측이 남측에 전적으로 의존할 정도로 '충분히' 퍼주지 못했기 때문에, 북이 배짱을 퉁겨도 맞춤한 수단이 없습니다.

미국에게 북미관계와 남북 관계의 보조를 맞춰달라고 '속도조절론'을 요청해도 미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만에 하나 미국이 동조하더라도 북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남측 내부에서는 정부 안에서나 정치권에서 "미국을 우회로로 해서 북측에 접근하자"는 주장이 나올 가능성이 짙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구조적으로 보장, 강화해주게 됩니다. 특히 미국이 '분단된 한반도를 통한 동북아 패권'을 중요한 세계전략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은 자멸적입니다.

4. 한반도 평화체제, 한국의 '나홀로' 외침

▲ 개성공단에 입주한 성화물산(주)에서 일하는 북측 여성근로자.
ⓒ 오마이뉴스 유창재
이런 우려는 북미 관계 정상화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체적인 얼개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한다, 북미가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정도의 그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미 평화 협정과 함께, 남북의 군사적 긴장 완화입니다. 이 사안은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나 장성급 회담에서 다뤄야 하는데, 북이 과연 남측과 진지하게 논의할지, 지금으로선 불투명합니다.

북한에게 통일이 필요한가

물론 미국과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까지 수립한 북이, 남측과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푸는 데 소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북은 굳이 남측과 정치·군사 협상을 벌여가며 골머리를 썩힐 이유가 없다는 우려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정치와 군사 분야의 협상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체제 안정을 이뤄낸 북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인지 지극히 불확실합니다.

아주 장기적으로 체제의 상처를 수습하고 남측과 경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통일 문제를 들고 나오겠지만, 그 시점이 적어도 20~30년 안쪽은 아닐 것입니다. 북이 통일이나 민족 공조를 들고나온 것은, 대체로 자신의 내외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미국이 과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정말로 중요한 전략적 과제로 삼고 있느냐도 따져 봐야 합니다. 종전 협정에 서명할 수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핵폐기 유도 제스처인지 정말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도에서 나온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비핵화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장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같은 입장은,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중·일·러 4강의 한반도 정책은 자신의 국익이 크게 침해당하지 않는 '세력 균형론'에 맞춰져 있습니다.

한반도, 남북 문제에서 국제 문제로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는 한국만의 외로운 외침이 될 수 있습니다. 북측 역시 분위기를 봐가면서 약간의 성의만 표시하는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북미 관계 정상화가 한반도 문제를 고착화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전까지 한반도 문제는 남북의 문제가 아닌 국제 문제로 취급됐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주변 4강의 입김을 다소나마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제2차 북미 핵 위기 해결 주도권을 미국과 중국 등 국제 사회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한반도 문제 역시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기득권 네트워크 속에, 언제 풀릴지 예측 불허가 됐습니다. 또 북이 실제적으로 남북 통일을 진지하게 고민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게 됐습니다.

▲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5. 평양에서 일어나는 일 미국에 들어서 되겠나

현재 한국 정부를 보면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해방 이후 50년 넘게 미국에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정권의 성격과는 크게 상관없이) 정책 담당자들의 다수는 국익에 따라 미국을 바꾸려는 시도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지금으로서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핵문제의 조기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북 관계를 '반 발짝 뒤에서' 진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런 수준의 남북 관계로는 핵 시설의 불능화(북 표현으로는 '무력화')와 그 이후 완전한 핵 폐기, 북미 관계 정상화의 속도에 맞출 수 없습니다.

평양에 미국 대사관이 워싱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이 들어가면, 서울과 평양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표부 개설을 이뤄내야 합니다. 평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국을 통해 듣는 황당한 상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합니다. 북측에 미국과 일본, 중국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며 막을 일은 아니지만, 두 손 들고 환영하거나 손가락 빨면서 지켜볼 일도 절대로 아닙니다.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은 북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해서도 전략적 지렛대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동북아의 지역 구도 속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통일에 대한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지극히 불행한 일을 겪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2일, 제20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마친 정부 당국자는 의미있는 말을 던졌습니다. 장관급 회담과 6자회담을 비교하면서 "북측 권호웅 단장은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북측 제대로 협상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남북 최고의 공식적 당국간 채널인 장관급 회담의 위상입니다.

이같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하기보다는 남북 관계를 '반 발짝 뒤에서' 진행하라는 최고 지도자의 의중은, 참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민족주의자 노무현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초기 이행조치' 기한인 4월 14일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와 '어깨를 나란히' 진행된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반 발짝 뒤에서'가 효과가 있었다며 정책을 지속할 것을 주장할 수 있어 보입니다. 정부 부처간의 정책 경쟁에서 한 번 밀리면 따라잡기 힘든 속성이 있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입니다. 핵 문제가 결국은 북미 대결 구도 속에서 나온 것이고 북미가 풀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한 것까지는 정확했지만, 그렇다고 남북 관계의 독자성을 사실상 저버리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부는 남북 관계와 핵 문제 해결의 '선순환 구조'를 말하고 있는데, 정말로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는 남북 관계대로 유지, 발전시켜야 합니다. 지금처럼 남북 관계를 북미 관계의 하위 변수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강렬한 민족주의자 노무현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한반도 문제의 과도한 국제 문제화를 막는데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남북 관계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인식과 정책을 취재하고 경험하면서 "노무현은 결코 DJ가 아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퇴임 전까지는 이 말을 조금이라도 수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6. '반 발짝 앞서서' 가자

▲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 삼일째인 지난 1일 오후 이재정 남측수석대표와 권호웅 북측 수석대표가 모란봉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반 발짝 뒤에서'라는 정책 기조는, 당장 전환해야 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 발짝 앞서서' 남북 관계를 움직이겠다는 각오를 합니다.

구체적으로 남북 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20차 회담에서 합의했기 때문에 수정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쌀 지원과 경공업 원자재 제공 시점을 반드시 4월 14일 이후로 고집해야 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발점을 4월 14일 이전으로 하고 이후 상황을 보면서 순차적으로 진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할 경우 북과의 신뢰 구축에 적잖은 도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오는 5월 서울에서 열리는 21차 장관급 회담에서는, 북에 대한 지원과 교류를 한 축으로 하면서도 회담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평양과 서울에 상주 대표부 개설을 핵심 의제로 설정해 공동 보도문에 합의해야 합니다.

또 9·19 공동 성명과 2·13 합의에 따라 펼쳐질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의 한 축으로 남북 관계를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나 장성급 회담의 일정을 확정해야 합니다. 북측이 이 문제에 소극적이거나 회피할 경우, 설득하고 필요하다면 공세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경협 문제도 더 이상 주춤해선 안됩니다. 개성 공단 1단지의 추가 분양을 서두르고, 다음 단계의 공사에 가능한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북측 역시 개성 공단 건설을 서두르자는 입장을 보여왔던 만큼, 그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금강산 관광은 예정대로 올 봄 내금강 개방 등을 통해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또 단천의 민족자원 개발특구 사업이나 한강 하구 골재 채취 등 18차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했던 사안들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북측에 사회간접자본 개발 카드 등을 제시하면서 상주 대표부 개설, 국방장관 회담 등을 지원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올 국내 일부 언론과 정치권의 반발에는 설득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2·13 합의에 따라 핵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진입했고, 북미 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 남북 관계를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전략적 실패를 맛본다는 점 등을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특히 북의 핵 불능화에 맞춰 상응조치를 취하기로 한 점과, 대북 지원을 연결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합니다. '무조건 퍼주기'라는 황당한 비난에 맞서 '명분있는 지원'이라는 점을 국민들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에도 한국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북측과의 관계 개선과 국교 수립은 적극 지지하지만, 한국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남북 관계도 발전시키겠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올 상반기 안에 열릴 것으로 보이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정책을 지원하며, 미국도 한국의 대북 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특히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미국 측의 자세한 구상과 궁극적인 한반도 통일에 대한 전략을 맞춰봐야 합니다. 결코 한반도의 현상 유지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확고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문제의식이 지나쳤기를 바라지만

최근 이 문제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과도하게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자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지나쳤으면 좋겠습니다. 우려를 침소봉대했다는 결과가 나오길 바랍니다. 다만 이 글을 통해 던진 문제의식만은 결코 가볍게 다뤄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 전술적인 면까지 다루는 것은 주제넘은 것 아니냐는 부담도 있는데, 한 번 진지하게 접근해보자는 차원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이 글에 대한 적극적이고 논리적인 논쟁을 기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정환 기자는 KBS 남북관계 예비 전문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KBS 기자칼럼 '한반도 통신'(http://news.kbs.co.kr/reporter_column/jhki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반도, #북·미, #관계 정상화, #통일, #평화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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