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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니' 경계를 넘어 활동가(ifis32@gmail.com)가 참여연대 월간지 <참여사회>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www.peoplepower21.org) 참여연대측과 필자의 양해를 구해 전문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 한 레바논 가족이 1일 남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의 포격을 피해 아이타론 마을에서 벤트 즈바일로 피난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찾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자기 민족은 파시즘의 희생자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파시즘뿐만 아니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로 고통 받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건국의 바탕이 된 시오니즘 운동이 반유대주의와 협력했는지 어쨌는지에 관한 논란을 제외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그 정치 논리와 행태를 가지고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학살극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숨값 저울질

지난 6월 25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군인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이스라엘 군인 1명이 억류되는 사건이 벌어졌고,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수감자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6월 28일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도로와 다리, 건물들을 파괴하고 사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정부 장관과 국회의원들도 납치(!) 당했고, 애꿎은 사람들만 피난을 떠나거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 13일 레바논의 베이루트 국제공항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은 후 연료 탱크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자, 여기서 여러분들은 이번 일이 왜 벌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지지하시던 분들도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납치를 먼저 한 것은 잘못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가 길라드 샬리트라는 '1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억류된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만큼,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9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도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길라드 샬리트가 억류되기 전에 이미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 받고, 가족들에게 주검으로 돌아갔었는데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시작을 최소한(그야말로 최소한) 이스라엘이 납치한 9천 명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거죠.

그도 아니면 하다못해 길라드 샬리트 상병이 억류되기 바로 얼마 전에 벌어졌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과 그로 인한 학살만이라도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업을 깨기 위해 투입된 전경들에게 돌을 던졌다고 해서 '거 봐라. 재들은 파업한다면서 폭력이나 일삼는 무리들일 뿐이야. 공권력이 강력하게 응징해야 돼'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구조를 설명하지 않고 특정 단면만 잘라서 제 멋 대로 설명하는 <조선일보>식 해석의 오류에 빠지는 거지요.

그리고 많은 이들의 무의식은 타인의 죽음을 대할 때 목숨값을 저울질 합니다. 흑인보다는 백인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죽음보다는 이스라엘인들의 죽음이 더욱 큰 일이라는 태도를 갖게 되는 거죠. 수천, 수만의 죽음보다 내 손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가 더욱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말입니다.

때로는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

▲ 폐허로 변해버린 레바논의 모습.
ⓒ 연합뉴스
가끔 저 자신에게 던져보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역사의 진보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래"입니다. 그렇다고 진보라는 것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개인이 길을 갈 때도 자신은 똑바로 걷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삐뚤빼뚤하게 선을 긋는데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입장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굽힘 없는 직선으로 이어지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는 것은 역사가 때로는 거꾸로 갈 때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난 7월 12일부터 이스라엘이 레바논 지역을 무력 공격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겁에 질린 레바논인들이 시리아로, 유럽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습니다. 두 눈 그대로 뜬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과 그 아래서 일고 있는 주검의 바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첫 전쟁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시작됩니다. 1948년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자 레바논은 아랍 연합군의 일부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관계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라면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 난민입니다. 시오니스트들이 건국 과정에서 그리고 지금도 원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을 아랍인 없는 순수 유대지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48년 1차 중동전쟁, 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수십 만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외부로 내쫓았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난민 1세대와 자손들은 지금 레바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되고, 이스라엘은 해방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게 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이 요르단 왕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레바논으로 대거 이주한 1970년대부터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주요한 공격 목표가 되었습니다.

1982년의 대학살은 전쟁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진면목(?)을 아주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는 장맛비가 내리듯 이스라엘의 포탄이 쏟아졌고 수만 명의 힘없는 목숨들은 하느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우파 기독교인들은 샤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하여 또다시 수천의 영혼이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 한 남자가 14일 베이루트 남부지역에서 레바논의 시아파 민병조직 헤즈볼라 거점에 대한 이스라엘 공습으로 크게 부숴진 건물 앞에 서 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와 충돌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 2명이 납치되고 8명이 사망한 후 이들에 대한 보복을 강화해 13일 베이루트 공항과 헤즈볼라 TV방송국에 포격을 가했으며 남부 레바논 공습으로 22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 로이터/연합뉴스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권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초토화시킨 것뿐만 아니라 레바논 남부지역을 강제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팔레스타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에 수십 년 째 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 것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구조적인 모순 때문입니다.

얼마 전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정전의 조건으로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모든 것은 헤즈볼라가 시작한 것이며, 끝내는 것도 헤즈볼라에 달렸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전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북한에 대해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무장해제를 요구한다면 북한이 무장해제를 하겠습니까? 한쪽에서 끊임없이 적대 정책을 내세우며 전쟁을 불러일으키는데 다른 한쪽보고 총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협상의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총을 내려놓아야 할 쪽은 헤즈볼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과 미국입니다. 이스라엘이 공격의 명분으로 헤즈볼라가 억류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인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명분일 뿐 입니다.

실제로 노리는 것은 최소한으로 헤즈볼라 붕괴에서 더 나아가 레바논 정부를 친이스라엘, 친미 정부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욱 나아간다면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던 이란과 시리아를 압박하는 것일 겁니다.

여기에 덧붙여 더욱 황당(?)한 사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군부 등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전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전쟁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하마스에게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하고, 헤즈볼라에게 무장해제를 하라고 요구하지만 실제로 두 조직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그들로서는 일면 낭패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력한 적이 있어야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일 수 있고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울 때가 평화로울 때

▲ 30일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은 레바논 카나 마을의 모습. 적십자대원과 시민 구조대가 먼지에 싸인 어린아이 시신을 무너진 집의 파편 속에서 꺼내 옮기고 있다. 레바논 적십자 관계자는 "이 마을에서 56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이 중에 34명은 어린이"라고 말했다.
ⓒ A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마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와 레바논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에겐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선거로 선출되었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은 적을 필요로 하며 적이 보이면 제거하러 나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미국도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헤즈볼라와 하마스가 총을 내려놓으면 평화가 올까요? 아마 총성이 없으면 짜릿함이 떨어지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별로 다루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그 지역에 별 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저의 결론은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무장해제를 한다고 해서 이 지역에 평화가 오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곳에 평화가 찾아올 수는 없으니까요.

따라서 이번 사태의 해결도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중단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지역 지배 중단과 팔레스타인 해방, 주변 국가의 민주화와 지역 평화를 위한 지역 내 연대 등 구조적인 해결 방향을 찾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들이야 죽든 말든 나만 더 재미난 영화 보고, 더 좋은 차 굴리면 그만이라는 삶도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름이 해를 가리면 내 얼굴에도 그늘이 지기 때문이지요. 나 자신을 포함한 인류의 평화는 정지되고 고립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연대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 '경계를 넘어' 홈페이지는 http://ifis.or.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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