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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이 31일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인 서울 통인동 대로에서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짊어진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카레덮밥 4160 그릇을 준비해 제공하고 있다.
▲ 세월호 가족들의 심야식당 세월호 가족들이 31일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인 서울 통인동 대로에서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짊어진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카레덮밥 4160 그릇을 준비해 제공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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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흐르는 따끈한 흰 쌀밥 위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올랐다. 몸에 좋은 약재료인 강황 가루와 함께 당근·감자들을 썰어 넣어 만든 황금빛 카레가 밥 위로 얹히고, 붉게 잘 익은 김치가 고명처럼 카레 밥 옆에 먹음직스럽게 놓였다. 노란 겉옷을 입은 세월호 유가족 학부모들은 이렇게 담긴 카레 덮밥을 촛불 시민들에게 나눠 주며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사고 초기엔 경황이 없어서 대접할 생각도 못 했거든요. 늘 여러 시민분들께 받기만 했는데 오늘은 따뜻한 밥 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딴 거 없어요, '밥 먹고 힘내서 같이 싸우자' 그 얘기에요(웃음)" - 단원고 2학년 8반 고 이재욱군 어머니 홍영미씨

2016년 마지막 촛불집회(10차)인 '송박영신(送朴迎新,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음) 범국민행동의 날'이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12월 31일 밤 10시 반,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 후 지금껏 함께 애써온 시민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게 행사 취지다. 이를 위해 450인분 카레가 담겨 있는 커다란 솥 10개(120L)와 천막 10개가 준비됐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000일 가까이 잊지 않고 함께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자 합니다.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감사의 마음 탓에 항상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많은 분의 도움으로 2016년 마지막 날 가족들이 모여 심야식당을 열게 되었습니다. 춥지만 뜨거운 2016년의 거리, 따뜻한 밥 한 끼가 1000만 촛불들에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같이 힘내요." (행사 안내문)

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10차 촛불집회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10차 촛불집회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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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10차 촛불집회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행사 직전 유가족들의 모습.
 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10차 촛불집회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행사 직전 유가족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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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2학년 4반 고 임경빈군의 어머니 전인숙(44세)씨는 이날 오전부터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지하 느티나무홀에서 카레 재료를 볶고 다듬으며 행사를 준비했다. 전씨는 "앞서 도와주시는 분들과 회의를 하다가 '밥을 해서 나눠 먹으면 어떻겠느냐'라는 얘기가 나왔다. 시민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자는 것"이라며 "4160명분의 노란색 카레 덮밥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덕분에 이날 촛불 집회·행진에 참여한 4200여 명 시민은 길가에 삼삼오오 모여 세월호 가족들이 건넨 카레밥을 먹으며 언 몸을 녹였다.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도 그중 한명이었다. 컵밥을 손에 든 그는 "너무 맛있어서 한 그릇 더 먹고 싶다"며 "전 세계 어느 집회에서 4160명이 모여 밥을 먹겠나. 이건 세월호 가족과 봉사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설명했다.

"유족이 주인공, 우리는 그림자"... 용산참사 유가족도 자원봉사자로 참여

보기엔 간단한 카레 덮밥이라도 4200여 명분 음식을 한꺼번에 만드는 일은 간단치 않다. 식재료 구매부터 채소 손질, 조리, 식기 마련 등 준비 과정에만 300여 명 자원봉사자가 함께 했다. 기획 단계부터 하면 최소 3주 전부터 준비했다는 게 후원단체 측 설명이다. 행사 당일에도 봉사자들은 1시간여 예비 교육을 받은 뒤 배식·운반·질서유지팀 등으로 나뉘어 투입됐다.

2016년 마지막 촛불집회였던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촛불 시민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취지다. 행사를 준비 중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2016년 마지막 촛불집회였던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촛불 시민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취지다. 행사를 준비 중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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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10차 촛불집회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행사를 준비 중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광화문 10차 촛불집회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행사를 준비 중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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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 심야식당' 행사에는 서촌주민들·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평등세상을향한집밥 등 50여개 단체가 참여했고, 200여 명 개인이 십시일반 성금을 보탰다고 한다. 4000명 넘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과 그릇, 장소(천막)를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담당한 수백 명 봉사자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우리는 그림자고, 세월호 가족들이 주인공"이라며 앞에 나서지 않았다.

연대는 또 다른 연대를 낳는다.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 봉사자 중에는 용산 참사 유가족인 유영숙(고 윤용헌씨 부인·58세)씨도 있었다. 조리를 돕던 유씨는 "저희도 힘들 때 시민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버틸 수 있었다"며 "그때 저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저와 비슷하게, 가족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분들 슬픔을 이렇게나마 위로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유씨의 말이다.

"세월호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용산 참사(2009년 1월 20일)가 발생한 지 벌써 8주기가 다 돼가지만, (참사로) 가족들 사라진 빈자리는 그대로거든요. 가족 잃은 슬픔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데, 어제오늘 제가 돕는 게 세월호 유가족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카레 덮밥을 나누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기획·주도한 것은 자하문로 '통인동커피공방'의 대표 박철우씨다. 박씨는 "앞서 (회의에서) 어머니들이 먼저 카레를 얘기하셨다. 한 어머니는 '더는 카레를 만들어줄 아이가 없다'는 얘기를 하시기도 해 마음이 참 아팠다"며 "오늘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들이 서로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니 지켜보는 마음도 찡하더라"고 말했다.

박씨에 따르면 4160명분 카레 덮밥을 만들기 위해 당근·감자 등 380kg 채소 재료와 400kg 쌀 등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는 "정말 역동적인 2016년이었다"며 "내년에는 조속한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을 통해 세월호 진실이 꼭 떠오르길 바란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저녁을 다 같이 보낼 수 있는 2017년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시민들 "가족들 조금만 더 힘내주길"... 유가족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다"

노란 옷을 입고 희생학생들 명찰을 목에 건 세월호 가족 100여 명은 10개 천막에 골고루 분포돼 시민들과 만났다. 아홉 살 아들과 함께 컵밥을 받아든 아버지 윤명노(44세·경기 안양 거주)씨는 "안산에 지인들이 많아서 세월호 참사가 남 일 같지 않다. 올해엔 세월호가 꼭 인양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홉 살 아들과 함께 컵밥을 받아든 아버지 윤명노(44세·경기 안양 거주·오른쪽)씨는 "올해엔 세월호가 꼭 인양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홉 살 아들과 함께 컵밥을 받아든 아버지 윤명노(44세·경기 안양 거주·오른쪽)씨는 "올해엔 세월호가 꼭 인양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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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 후 지금껏 함께 애써온 시민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취지다.
 2016년 12월 31일 밤 10시 반,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이 촛불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심야식당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 후 지금껏 함께 애써온 시민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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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컵밥을 한 그릇 다 비운 이봉규(46세·남·경기 평택 거주)씨는 가방에서 검은색 쓰레기봉투를 꺼내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정리하기도 했다. 이씨는 "최근에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끝이 좀 보이는 것 같다. 배가 인양되면 진실 규명에 더 도움이 될 거다. 그때까지 유가족분들이 조금만 더 힘내주셨으면 한다"라고 부탁했다.

심야식당 행사는 성황리에 진행돼 4160인분 카레 덮밥은 배식을 시작한 지 30여 분 만에 동이 났다. 취객 한 명이 난입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일 외에는 큰 불상사도 없었다. 행사 종료 후 세월호 가족들과 봉사자들은 서로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한 유족 어머니는 "이제라도 주는 기쁨을 알게 돼 감사하다"며 봉사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도 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첫날을 모두 길거리에서 맞은 세월호 유족들의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단원고 2학년 4반 고 김동혁군의 아버지 김영래씨는 '철저한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을 꼽았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2017년에는 아이들의 억울함이 낱낱이 밝혀지길 바란다"는 설명이다.

김군의 어머니 김성실씨는 "꼭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이 다시 제정됐으면 좋겠다"라고 새해 소망을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 및 관련 시민 단체들은 과거 제정된 세월호 특별법과는 달리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된 새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씨는 이어 "진상규명이 제대로 돼서, 아이들이 학교를 (명예)졸업했듯이 이제 우리(유족)도 졸업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미수습자를 잊지 말자는 바람도 나왔다. 단원고 2학년 3반 고 유예은양의 아버지 유경근씨(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는 "세월호를 반드시 인양해서 미수습자를 찾아야 한다"며 "그래서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왜 제대로 구조하지 않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 그간 많은 국민과 우리 가족들이 느꼈던 분노와 서러움들이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는 앞서 올해 내로 세월호 인양이 완료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인양 작업은 결국 해를 넘기게 됐다. 세월호 생존학생 아버지인 장동원(46세)씨에 따르면 인양 날짜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장씨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온전한 모습으로 선체를 인양해야만 미수습자를 찾고 진상을 규명하는 게 가능하다"라고 강조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992일(만 2년 8개월 16일)째, 오는 1월 9일은 1000일째가 된다. 참사 후 지금껏 단원고 학생들 포함 295명 시신이 수습됐지만, 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인·고창석·양승진·이영숙·권재근·권혁규 등 9명은 여전히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날 광화문 촛불집회 무대에 선 미수습자 허다윤양의 어머니 박은미씨는 마이크를 잡고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 9명이, 제 딸이 있다"며 흐느꼈다.


태그:#세월호 심야식당, #세월호 카레덮밥, #세월호 미수습자, #동거차도 미수습자, #세월호 참사 10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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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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