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편집자말] |
추석이 설레지 않는 당신에게, 혜미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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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곁의 페미니즘 ·
아홉번째 편지: 추석이 설레지 않는 당신께
뜨거웠던 여름도 가고 곧 추석이네요. 제가 근무하는 세밧사(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에서 연대단체들과 주거권·건강권 등 토론회 준비, 모금사업 등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성큼 가을이 온 것 같아요. 당신의 여름은 어땠는지 듣고 싶습니다. 지난번 갔던 망원시장 근처 채식식당에서 밥 한 끼와 맥주 한 잔을 함께해도 좋겠고요.
성애님이
지난 편지( http://omn.kr/1v1hb )에서 말한 난민들도, 이 급격한 계절 변화처럼 아마 엄청난 일상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겠죠. 그런데 이분들의 한국 입국 이후엔 난민 소식 자체보다 '반 이슬람' 맥락의 뉴스가 더 많아진 것 같아요. 특히 개신교를 다루는 언론에서 이슬람교의 그늘진 부분을 잇달아 기사로 내보내는데, 읽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이슬람교 문화 중 여성 인권을 억압하는 부분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종교법이라며 합리화하는, 여성의 교육·취업을 막고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교 때문에 난민 입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은 이미 1992년에 UN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바 있어요. 그렇기에 한국은 '법적'으로 난민을 수용할 의무가 있는 국가고,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요. 그걸 자꾸 사회적 합의 운운하면서 미루는 모습이 개탄스럽습니다. 주어진 법적·인도적 책임을 다하고, 한국에 온 난민들이 안정적으로 살 기반을 만드는 것. 이게 정치가 해야 할 일 아닐까요.
탄산대첩, 남녀경쟁? 괴이한 프레임 속 고립되는 시민들
저는 사실 요즘 정치 뉴스가 너무 재미없어요. 기사를 볼 때마다 우울해지곤 합니다. 내년엔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란 큰 이슈가 있는데도요. 이번 대선이 '탄산대첩(콜라-사이다 싸움)'이라느니 이대남과 이대녀의 '표심경쟁'을 해야 한다느니... 괴이한 구도를 만드는 게 지금의 여의도 캠프정치인 것 같아요. 민생(民生), 시민들의 생활과 생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치인들은 보이지 않네요.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모두가 벼랑 끝에 내몰리는 것 같아요. 제가 사는 동네에서도 꽤 큰 맥줏집이 허물어졌고, 한번 가봐야지 했던 태국음식점은 생긴 지 3개월도 안 돼 문을 닫았어요. 그 빈자리를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점차 채워가고요.
서울 마포구의 한 50대 자영업자분이 생활고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를 보셨나요. 자기 살던 집을 내놔서 직원들 월급을 줬다고 하죠. 저녁마다 문 닫아야 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은 한국 시민으로 대체 어떤 권리를 보장받으며 사는 건지 궁금해져요.
정부가 어쩌다 한 번씩 시혜적으로 뿌리는 재난지원금이면 다 괜찮을까요? '사람이 먼저'라던 문재인 정부, 이렇게 계속 거리두기만 강화하는 게 최선일까 싶어 답답해집니다. 원래 한가위 앞두고는 다들 몸도 마음도 풍요로웠던 것 같은데, 어쩐지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가는 것처럼 보이네요(관련 기사:
16일 자영업자들 합동분향소 설치..."알려지지 않은 죽음 더 있어").
성애님, 자영업자 중에서도 여성은 특히 더 사각지대에 있다고 합니다.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무급가족종사자'로 취급된대요. 한 명의 노동자가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사업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패싱돼 노동자로서의 권리나 대우는 바랄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무급가족종사자' 여성들은 산재·고용보험 가입은커녕 그보다 더 난감한 형편에 처해 있게 되고, 이는 노후보장제도인 국민연금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이런 구조가 결국 여성 노인의 빈곤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고요.
반쪽짜리 대선, 페미니즘 모르는 대통령...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대선 후보들 캠프에선 여성의 얼굴을 찾기 어려워요. 성평등 공약들은 이슈조차 되지 않고 있고요. 대선 후보 중에 여성 후보는 몇 명이나 있나요? 반쪽짜리 대통령 선거를 2022년에도 봐야 한다니, 벌써 암울해집니다.
독일 메르켈 총리가 "페미니즘은 사회와 삶 전반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것"이라며 "네, 저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해요. 아직도 한국에선, 특히 일부 남성 정치인들은 자신의 무지가 권력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제 '페미니즘을 제대로 모르는', 혹은 '페미니즘을 몰라도 되는' 대통령은 만나고 싶지 않아요. 여성·청소년·노인 등 소수자들은 빼놓고 기득권과 주류만을 위하는 정치, 그런 편협한 정치로는 저를 포함한 2030 세대들의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요.
노동하고 정치하는 여성들 또한 시민의 얼굴인데, 왜 여성의 정치는 늘 '정체성 정치'라고 규정되고 손가락질 받는 걸까요. 권한도 없는 몇 자리 내주고 생색내는 보여주기 정치가 아니라, 교차성을 인정하고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간절히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도 찾아보면 있을 거라 믿어요. 다양하고 새로운 정치의 기운을 내보이는 동료들 말이에요. 답답한 하루지만, 외롭지 않게끔 소리 내어 서로를 응원하며 발맞춰 걸어봐야겠어요. 앉아서 낙담만 할 게 아니라 손잡고 함께 나아갈 때, 바라고 희망하는 사회가 좀더 가까워지리라 믿습니다.
▲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한국에선 여성이 남성 노동자에 비해 30% 임금을 적게 받는다고 하죠. 책 <여성 노동 가족>, 임금 노동이 여성해방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여성노동의 역사가 궁금한 당신께 추천합니다. 두껍지만 눈길 가는 부분만 읽어도 도움이 돼요.
2021년 9월 14일
늘 뇌에 힘주고 사느라 피곤할 당신에게, 혜미 드림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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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는 처음이라. 마포에 살고, 녹색 정치를 하며, 사회 정책에 관심있게 움직이는 사람. 셰어하우스에 살며 분리수거를 잘 하고싶은 페미니스트. 삶과 이상을 잇고-짓고 싶은 사람. 날기싫은 비행기와 춤추고 싶은 멋쟁이 토마토를 간신히 연주할 수 있는 우쿨렐레 초보. 토마토 음식으로 해장하는 사람.
<유성애>
아픈 몸을 사는 사람, 편집노동자. 스스로 장애인-비장애인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 한 팔 두 다리가 부러졌던 경험이, 의도치 않게 여자로 태어나 살며 겪었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소외된 사람들 목소리에 마음이 더 기운다. 성평등한 국회, 성평등한 오늘을 꿈꾸는 페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