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본소득 정책을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이 지사는 이날 "차기 정부 임기 내에 청년에게는 연 200만 원, 그 외 전국민에게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본소득 정책을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이 지사는 이날 "차기 정부 임기 내에 청년에게는 연 200만 원, 그 외 전국민에게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기본소득을 도입해서, 부족한 소비를 늘려 경제를 살리고, 누구나 최소한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지난 1일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온라인 영상을 통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14분에 달하는 이 출마 선언에서 기본소득 언급은 단 한 문장에 그쳤다. 대선 출마 선언 이후,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정책인 기본소득을 뒤로 제쳐두는 듯한 태도를 보여 왔다. '경제성장'과 '공정' 같은, 구체적 정책수단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정책목표에 적합한 단어들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눈다는 기본소득의 요체는 완전히 생략된 채 경제성장과 소비 진작을 위한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기본소득을 짤막하게 다룰 뿐이었다. 이후 토론회나 인터뷰에서도 기본소득이 자신의 제1공약은 아니기에 최우선으로 추진하지는 않겠다며 논쟁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후보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줬을 뿐만 아니라 선거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킨 도화선이 됐다. 

기본소득 대항을 준비하던 보수주의자들 :
안심소득(오세훈), 음의 소득세(윤석열), 공정소득(유승민), 최소소득보장(윤희숙)

 
왼쪽부터 오세훈 서울시장,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 유승민 전 의원,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
 왼쪽부터 오세훈 서울시장,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 유승민 전 의원,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작년부터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롯한 일군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소득에 위기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오세훈 시장은 아무리 보수라도 양극화 문제를 무시하고서는 집권하기 어렵다는 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기본소득을 내세운 진보진영의 복지체제가 유권자 내부에서 다수파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20세기 중반 유럽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들처럼 장기 집권하는 시나리오에 공포를 느꼈던 듯하다. 잇따른 선거 패배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공포에 휩싸인 이들은 보수주의의 세계관에서 상상할 수 있는 아이디어 중 가장 급진적인 복지대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안심소득'이라고 불리는 아이디어다.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설계한 이 제도는 중위소득 이하 가구에 실제 소득과 중위소득 차액의 절반을 지급한다. 예를 들어, 4인가구의 경우 중위소득(60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에게 (6000만 원 - 가구소득) × 50%를 현금으로 지원하는 파격적인 정책이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기존 복지의 통폐합 외 필요한 20조 이상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일언반구 언급하지 못하는 조악함이 두드러지기는 한다. 그러나 복지라는 단어에 조건반사처럼 '무상복지로 경제 파탄 났다'며 '베네수엘라'를 주문처럼 외쳐 왔던 한국의 보수가 이런 대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윤석열 캠프 1호 영입인사인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은 한국형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제도를 선보인 사람이다. 그의 모델은 안심소득과 똑같은 구조로 설계되었지만 각종 국가예산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진전된 책임감을 보여 준다.

기획재정부 예산통으로서 각 부처에서 올라온 예산을 가차 없이 칼질한 전문가답게 정부 기능을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올려 썰어내 버린다. 그 무자비한 칼질은 침대에 누운 대한민국 정부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리긴 하겠지만, 시민들 생계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그 정도의 무자비함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지금까지의 우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각오임은 틀림없다.

실체가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은 공정소득, 윤희숙 의원은 최소소득보장이라는 계획을 언급한 바 있다. 역시 음의 소득세와 유사한 형태의 복지정책으로 추측된다. 이 모두는 양극화 해결이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는 분위기 하에서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가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을 선점해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한국정치에서 예외적인 현상이다. 

애매한 태도가 불러온 퇴행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 예비후보인 이낙연 의원, 정세균 전 국무총리,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박용진 의원.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 예비후보인 이낙연 의원, 정세균 전 국무총리,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박용진 의원.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을 슬며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바람에 우파는 괜스레 안심소득이니 공정소득이니 하는 카드를 꺼내들 필요가 없게 됐다. 위험을 무릅쓰고 보수의 정체성을 의심받을 만한 포지션을 취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급기야 세금을 걷어서 나눠줄 바에야 걷지 않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전히 윤석열의 메시지는 완고한 보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보수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유승민 전 의원은 자신의 1번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웠고, 윤희숙 의원은 노조 척결을 부르짖는다. 홍준표 의원은 사형집행이나 고시부활처럼 '행복했던 80년대'를 추억하는 수준이 한계로 보인다. 하태경 의원은 페미니즘이라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해 돌격하는 돈키호테 이상 역할은 해내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낙연 전 대표는 혁신성장으로 중산층을 만들어내고 '신복지'로 불안정성을 제거하고자 한다. 박용진 의원은 법인세 감면이 출마 일성이다. 둘을 합친 게 바로 2012년 박근혜다. 창조경제와 줄푸세로 중산층 70% 사회 이룩하고 경제민주화로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겠다는 계획과 딱히 차별성은 없어 보인다.

한편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과 조국의 반사체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랜 기간을 노회한 정객으로 살아온 정세균 전 총리는 노련한 관리자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들에게는 사회경제적 대안이라는 게 영 입에 붙지 않는 모양새다.

이재명 지사조차 경제성장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기본소득을 후순위로 미루는 순간, 민주당 내 후보들의 노선 차이는 사실상 소멸해 버렸다. 정통성 논쟁이나 도덕성 검증이 경선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바지 내릴까요'나 욕설 담긴 녹음파일, 누가 노무현 탄핵에 찬성했는가, 같은 문제들 말이다. 

'기본소득으로의 회귀'가 의미하는 것

그러나 풍향이 바뀌고 있다.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 이별을 고하고, 일인당 연간 100만 원 기본소득과 재원 마련 계획을 제시했다. 당장 민주당 경선에서 기본소득과 국토보유세, 탄소세와 같은 파격적 조세제도가 지저분한 가십성 쟁점들을 한켠으로 밀어낼 가능성이 생겼다. 다른 민주당 후보들도 자신의 대안을 통해 이재명 지사와 대결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눈여겨볼 부분은 보수조차도 기본소득에 대항하기 위해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재분배 수단을 꺼내들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보수의 대안들, 즉 안심소득, 공정소득, 최저소득보장, 한국형 음의 소득세 등이 줄줄이 등판하게 될 것이다.

이는 바닥을 끌어올리는 효과로 볼 수 있다. 보수조차도 이제는 무상급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듯, 어떤 정치세력도 현재의 양극화를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 없이 해소하기 어렵다는 일단의 동의가 성사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번 대선은 헌정사 최초로 경제시스템의 분배 문제를 둘러싼 건곤일척의 정책투쟁 선거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기본소득(이재명) vs 음의 소득세(보수야당) vs 사회복지 우선주의(이낙연) vs 일자리 보장제(정의당) 같은 구도로 예선과 본선에서 격돌하는 양상이 벌어질 것이다. 과거의 선거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이해와 정의 감각에 기초해 정책을 판단하고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22일 기본소득 정책 발표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 들어서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22일 기본소득 정책 발표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 들어서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동시에 이재명 지사에게 이 길은 모험일 수 있다. 집권여당의 유력 후보가 안정감과 온건함이라는 덕목을 버리고 무책임한 포퓰리스트나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신념을 내세우는 선택은 흔하지 않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높이는 선택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중도층들은 대체로 좌파에게는 우파의 안정감을, 우파에게는 좌파의 개혁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새로운 유권자 블록을 형성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는 이르다. 그럼에도 이재명 지사의 선택은 이번 대선이 2012년의 재림이 아닌 새로운 구도와 전망을 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부터는 그의 실력에 달려 있다.

태그:#기본소득, #안심소득, #공정소득, #음의 소득세
댓글4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