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유명을 달리한 이후 여러 의견과 평가나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오마이뉴스>는 권병덕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평가는 앞으로도 다양하게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은 박원순이라는 인물이나 그의 사망사건에 대해 총체적으로 살펴보지는 않는다.
다만 박원순이 만들고 남긴 것이 무엇인지 내가 파악한 범위에서 정리-나열하고자 한다. 나는 박원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기에 그가 남긴 것은 내가 당장 떠올리는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공인이기에 일체의 호칭은 생략한다.
[#1] 진보적 역사가
박원순은 모종의 사건(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단국대 사학과로 옮긴 뒤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이후 정선등기소장과 대구지검 검사를 거치며 여러 경로로 현대사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다. 특히 검사 재직시절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많이 모았다고 한다.
박원순이 수집한 해방전후사 사료들이 기초가 되어 80년대 초중반 서중석, 이이화, 임헌영, 원경 스님 등이 모여 이른바 해방3년사 세미나를 시작했다. 이 세미나 모임이 주축이 되어 1986년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연구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가 출범했다. 박원순은 역문연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박원순은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라며 연구소 활동에 전면에 나서기를 꺼려했지만, 막상 형편이 어려운 연구소 사정을 위해 사재를 털어 사옥을 구입해 그간 모은 장서들과 함께 연구소에 기증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대부분의 운동단체가 월세 내기에도 빠듯했던 1989년이었다. 오늘날에도 역사문제연구소는 한국사 연구에서 논쟁의 역할을 자임하며 역사학의 진보적 지평을 넓히고 있다.
[#2] 법률가와 국가보안법 연구
법률가로서 박원순의 대표적인 저작은 <국가보안법연구>라 할 수 있다. 80년대 국가보안법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주요 법률적 근거로 작동했고 관련 사건도 많아졌다. 자연히 국가보안법에 대한 사회의 문제의식도 높아지고 있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3권 총 12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에서 박원순은 국가보안법의 성립과정과 역할을 추적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론의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 박원순은 이후 후속작으로 2008년에 완간된 <야만시대의 기록 - 고문의 한국현대사>를 펴내기도 했다.
박원순은 2011년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 반드시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입장을 여러 번 내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원순의 <국가보안법 연구>는 다작으로 알려진 박원순의 저작 중 그를 가장 대표하는 책이자 진보적 법학의 최전선에서 시대와 맞선 흔적이라 할 수 있다.
[#3] 여성인권운동가
박원순의 인권변호사 선배였던 조영래를 대표하는 사건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라면 박원순을 대표하는 사건은 1992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현재 신 교수 성희롱 사건으로 명명됨) 일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공해 문제, 여성 문제 등 이념이 쇠퇴하는 90년대에 들어서자 오래된 새 모순에 부딪혔다.
서울대 화학과 신정휴 교수가 조교에게 오랫동안 신체접촉을 강요했다. 조교가 이를 거부하자 신 교수는 우 조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박원순을 비롯하여 김창국, 이종걸, 배금자 변호사 등이 우 조교의 변론을 맡았다. 6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우 조교에 대한 신 교수의 성희롱이 인정되었다.
아직 많은 사람이 '성희롱'이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은 성희롱은 나쁜 것이며 처벌받는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현 양성평등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성희롱 개념도 법제화되었다. 형법상으로도 직장 내 성희롱의 처벌이 가능해졌다.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에 우 조교의 공동변호인인 박원순, 이종걸, 최은순 변호사를 선정했다. 박원순은 이후에도 양성쓰기 운동이나 호주제 폐지운동에 동참하며 인권변호사로서 여성인권 향상에 매진해왔다. 이렇게 성희롱은 명백한 불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회사, 즉 생산 현장의 문화도 빠르게 변해갔다.
[#4] 시민운동의 재편
1994년 창립한 참여연대의 문제의식은 87년 이후 열린 시민사회라는 공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으로 대표되는 기존 시민운동에 대한 문제제기기도 했다. 조희연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적 시민운동'이 필요하다는 것. 이 도원결의에 박원순을 비롯한 인권변호사 그룹, 조희연으로 대표되는 진보적 소장학자들, 김기식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 출신 그룹이 함께 했다.
시민운동가로서 박원순이 남긴 유산을 짧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박원순이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재임하던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의 활동은 시민의 권력 감시와 시민의 권리 찾기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검사제 도입, 낙천낙선운동이 전자라면 소액주주운동이나 작은권리찾기운동으로 대표되는 활동이 후자일 것이다.
특히 소액주주운동은 이후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의라는 비판을 받으며 진보 진영의 경제민주화 논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 논쟁 구도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90년대 한국 시민운동의 폭발적 성장은 정당정치와 노동운동의 미성숙이 만든 공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미지로 상징되던 시민운동은 박원순 이후 시나브로 정당정치에 수렴되어 갔다.
[#5] 기부문화와 나눔문화
2002년 참여연대를 떠난 박원순의 새로운 시도는 '아름다운재단'을 통한 기부문화 확산이었다. 동시에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나눔문화를 확산하는 데 주력했다. 잘 알려진 네이버 해피빈이 이 시절에 만들어진 유산이다.
이후 시민사회의 싱크탱크를 표방한 '희망제작소'를 창립하는 등 시민운동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면서도 시민사회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썼다. 기업의 사회공헌을 이끌어 내며, 네거티브형 운동에서 포지티브형 운동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기 국정원의 사찰 피해를 폭로하면서 박원순은 정치와 시국에 대한 발언과 행보를 늘리게 된다.
[#6] 의지의 행정가
2011년 서울시장 박원순의 등장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과 대통령 재임 시절 자신에게 부여된 행정적 권한을 최대한 과감하게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원순 역시 한편으로 이명박 못지않은 과감함이 있었다. 온화하다는 인상과 평가를 뒤집는 행보였다.
당선 직후 오세훈 전임 시장이 막아놓았던 무상급식을 추진했고, 공약으로 내세운 반값 등록금도 시장이 이사장을 겸임하는 서울시립대를 통해 관철시켰다. 서울시에서 근무하는 수천 명의 비정규직도 정규직화시켰다. 이명박과 박원순의 충격적 등장은 정치란 결국 실행하려는 정치가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정치란 의지를 가지고 하면 되며 할 수 있다는 박원순의 지방정부모델은 이후 민주당 집권 지자체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패배주의가 만연해있고 지역에서는 오히려 한나라당과 다를 게 없다는 평가를 자주 듣던 민주당이었다. 2선 3선을 거치며 박원순의 저돌적 스타일은 많이 변화되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민주당 지방정치의 모델과 과감한 정치 스타일을 제시했다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7] 사회혁신의 설계자
박원순 서울시정의 핵심 키워드인 '사회혁신'은 매우 모호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박원순 시정을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사회를 뭔가 바꾼다는 것인데, 그것이 혁명이나 개혁의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들고 가다듬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인다고 이해하면 될까.
그렇기에 박원순은 시장재임 초기부터 이명박 오세훈과 같이 토건으로 랜드마크를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 못을 박았다. 대신 그 역량이 투입된 것은 도시재생이나 마을재생과 같은 지역 공동체 사업들, 청년수당이나 은퇴자 재취업 프로그램과 같은 것들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정에서 생성된 수많은 미시적 프로그램은 지금도 시민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8] 운동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11년 박원순의 등장이 사회운동 전반에 준 영향은 무엇보다 수많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서울시 공무원이 되거나 관련 기관에 가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사회단체의 중견 활동가들이 서울시에 들어갔고, 또 이러한 경력과 경험을 통해 중앙정부나 다른 지방정부로 들어가기도 했다.
자연스레 사회단체와 지방정부 간의 관계도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지방정부 운영에 진보적 의제가 빠르게 형성되었고, 관료주의의 무력함을 환기하는 기제가 되었다. 하지만 과거 권위주의 시절 무수한 외곽단체들처럼 민주당 지방정부 아래서 사회단체들이 관변단체화 되어가는 현상도 있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해서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나 스스로가 이를 논할 자격이 별로 없다. 다만 2018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박영선 후보가 이른바 '시피아'(시민단체+마피아)를 문제 삼자 그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청와대로 갔다고 답했다.
박원순이 시도한 것은 어쩌면 자신을 중심으로 민주당을 혁신해 나갈 새로운 조직적 결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들 청와대로 갔다는 박원순의 자조처럼 그들이 친문 그룹 같은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박원순의 원심력 안에 머무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9] 스타일의 정치
'원순씨'로 상징되던 파워블로거 박원순이 있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한국 정치에서 인터넷을 도입한 시초였다면 박원순을 이를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정치인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블로그와 트위터-페이스북을 오가며 수많은 사람과 직접 소통하기도 했고, 수해 등 긴급상황에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현장 상황을 중계하기도 했다.
시정만큼이나 선거운동도 파격적이었다. 후보자의 얼굴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포스터, 유세차량을 운용하지 않고 배낭과 운동화를 신고 걸어 다니며 시민들을 만나는 모습들은 끊임없이 논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박원순의 소통 스타일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지만 이와 같은 스타일의 정치가 민주당의 주류, 한편으로 한국 정치인의 주류적인 스타일이 되어갔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제 모든 정치인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10] 다시, 직장 내 성희롱
마지막으로 박원순이 남긴 것. 인권변호사로서, 시민운동가로서 사회에 끊임없이 문제제기했던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서 그조차 자유롭지 않았다는 역설일 것이다. 박원순의 사망으로부터 시작된 이 논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가장 무겁고 힘든 유산을 우리에게 넘겼다.
이 글은 박원순에 대한 엄정하고 객관적인 포지션을 취하며 쓴 글은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추모도 비난도 쉽게 하기 힘든 이 상황에서 박원순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나를 먼저 살펴보고 싶었다.
나는 유물론자로서 사후세계를 믿지 않기에 그에게 명계의 복을 빌지는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처음으로 만난 운동가가 그였고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았기에 오랫동안 추억할 것이다. 박원순의 삶에서 그에게 상처받은 분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며 이들에게도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내가 그가 남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말하고 싶다.
나 같은 이들의 메마른 마지막 셈들을 뒤로 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누군가 홀로 마지막까지 남아 상을 치우고 부르다 만 노래를 고쳐 부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