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의 아픈 상처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로 기록됐습니다. 동그라미는 총탄 자국, 세모는 총알이 박혀있는 상태, 네모는 애매모호한 흔적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여수 이야포에서 민간인을 향해 총기 난사가 일어났던 미군폭격사건은 아직 네모조차 그리기 어렵습니다. 피해자는 있으나 세모와 동그라미 같은 물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은 작은 섬마을(안도)의 아픔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입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는 뼈아픈 교훈이기 때문에 노근리의 세모와 동그라미 같은 증거를 찾아서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합니다."
'여수 이야포에 평화의 꽃을 피우겠다'면서 노근리 미군폭격사건 현장 견학을 다녀온 정신출 여수시의원의 소회다.
지난 5일이다. 여수시의회 이야포미군폭격사건특별위원회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평화공원으로 현장답사를 다녀왔다. <여수넷통뉴스>도 그 여정에 동행했다. 이들은 노근리특별법 제정과정을 알아보고 노근리 평화공원과 미군폭격사건 현장인 쌍굴다리를 돌아봤다.
노근리 진상조사 하며 총알 박힌 자국 표시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이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전용진 사무처장의 설명에 따르면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 등의 하얀 표식은 1999년부터 1년간 한국과 미국이 진상조사를 하며 총알이 박힌 자국을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세모는 총탄이 여기에 박혀있는 거고 이 동그라미는 총탄이 맞고 튕겨 나간 거예요. 그리고 네모가 또 있어요. 네모는 뭐냐 하면 이게 긴가민가한 거... 이게 뭐 정확하게 어떤 규정하기 어려워요.
여기 철도 아래가 그 당시에 도로예요. 조금 확장된 거지만 철도가 지나고 이렇게 도로가 지나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든지 적군의 진격을 막는 아주 좋은 장소에요 아무튼 여기서 공중 사격이 있고 또 피난민들이 앞쪽 배수로하고 여기에 숨어들어 있어요. (중략) '모아놓고 죽이려고 했다'는 것과 '우발적이었다'는 의견이 서로 갈립니다."
전 사무처장은 덧붙여 "노근리사건은 많은 사건에 개입한 미국이 유일하게 대통령 유감 표명을 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날 노근리 현장답사에 함께 한 여수 뉴젠리더십 대안학교 학생의 소감이다.
"저는 뉴젠리더십 고등학교 1학년 윤동규입니다. 오늘 노근리 폭격 사건 현장에 왔는데 총탄이 그렇게 돌에 깊숙이 박혀있는 거 보고 사람들이 저렇게 강한 총격을 맞으면서 죽었다는 것에 참 마음이 아팠고, 역사관에서 노근리 폭격 사건과 관련된 동영상을 봤거든요. 동영상에서도 진짜 사람들이 죽고 또 그전에도 미군한테 계속 압박받고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전쟁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포 특별법 제정에 모두 한마음 되고자 왔다"
여수시의회 이야포특위 박성미 위원장은 의회 현장 활동 의의에 대한 물음에 대해 우리 지역인 안도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라며 "중앙정부를 향해서 제2의 노근리 사건으로 보고 특별법 제정에 모두 한마음이 되고자 오늘 현장에 왔다"고 말했다.
"저희가 제7대 특위 활동 이후에 이제 2기 의원님들하고 오늘 여섯 분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1기 때 함께 했던 의원님들이 함께하셨고요, 또 추진위원님들하고 우리 대안학교 학생들하고 아주 뜻깊은 역사적인 장소에 와서 저 또한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진상규명하고 명예회복이라는 말은 하고 있지만, 지역사회에서 아직 이야포와 미군폭격사건 두룩여 횡간도에 관련된 내용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오늘 여기에 온 것은 30년에 걸쳐서 꾸준히 노력했던 분들이 아직도 현장에 계시고 자녀분이 이사장님으로 계시는 인권교육의 장, 평화의 현장에 와서 우리가 많이 보고 느끼고 듣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앞으로 이야포미군폭격에 관련된 분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다짐도 하는 시간을 갖고자 왔거든요. 우리 모든 활동의 결론은 특별법 제정이잖아요. 그래야지만 배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건데요.
이제 노근리는 특별법에 의해서 배보상에 대한 논의까지 이루어지고 있는데 저희는 자체적인 여수시 조례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잖아요. 저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중앙정부를 향해서 제2의 노근리 사건으로 보고 특별법 제정에 모두 한마음이 되고자 오늘 현장에 왔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상을 통해 알아본 노근리 사건의 진실은?
노근리국제평화재단 교육관이다. 영상에 담긴 목소리가 전하는 노근리의 진실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의 트라우마 터널을 지나 평화와 화해의 문 앞에 섰습니다. 70년 전 우리 혈육들은 죽었습니다. 젖먹이 어린 아들도,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예쁜 딸도, 정을 나누던 우리의 이웃도 모두 죽었습니다.
전체 희생자의 72%가 어린이, 여성, 노인이었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사격 명령이나 다름없는 피난민 통제 정책을 한미 양국이 함께 결정함으로써 발생한 첫 번째 비극이었습니다. 한미 양국의 이러한 무책임한 결정과 공조는 문서로 드러났습니다."
미 공군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200여명 사상자 발생
1950년 7월 26일 한국전쟁 중 충북 영동군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소개 명령이 떨어지자 미 육군의 유도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그날부터 나흘간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오랜 시간 은폐됐던 이 사건이 1960년 한 피해자의 진정서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의 부친 정은용씨 역시 또 다른 피해자다. 그는 피해 사실을 기록한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1994년 출간한다. 이 소설을 접한 AP통신 기자의 보도(1999년)에 의해 주목을 받는다. 그렇게 진상이 밝혀지고 나서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이 시작됐다.
선친과 함께 노근리사건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렸던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전한 노근리의 진실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신 정은용씨는 저희 선친이시고요. 생전에 저하고 한 23년여를 부자지간으로 또 동지로서 진상규명과 공원을 만드는 과정에 같이 하시다가 2014년도에 돌아가셨어요. 평생 고생만 하셨어요. 제가 올해 33년째거든요.
여러분들은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 수 있지만, 고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세상에 할 일들이 정말 많은데 그걸 선택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에요.
저희 선친이 아들과 딸을 잃었어요. 5살배기 저희 형님이, 두 살배기 저희 누님이 돌아가셨고요. 대전에 저희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는데 97세예요. 최고령 피해자예요.
아마 6.25 전쟁이 없었으면 제가 막내가 됐거나 아마 안 태어났을 것 같은데 부모님은 거기서 이제 아들딸을 다 잃고 제가 전후에 큰아들로 태어나 이 시대에 노근리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거죠. 그래서 33년째 이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데 비극의 일이죠. 저는 사실은 한국전쟁과 직접 관련 없지만, 가족이 피해를 입었어요."
"고마운 걸 우리가 알되 미국이 잘못한 거에 대해서 지적해야"
정구도 이사장은 노근리사건 및 특별법 제정 강의에서 "미군들이 우리의 강토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고마운 걸 우리가 알되 미국이 잘못한 거에 대해서 우리가 왜 지적을 못 해요"라며 반문했다.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보호해 주는 데 가장 일선에 섰던 것도 미군인 건 분명하잖아요. 그렇죠? 적어도 약 5만 명 이상 희생이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나라, 그 나라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데 미군들이 여기 와서 우리의 강토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고마운 걸 우리가 알되 미국이 잘못한 거에 대해서 우리가 왜 지적을 못 해요? 우리가 우방국과 가까운 혈맹이라면, 가까운 친구 사이라면, 친구의 잘못도 지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죠. 개인 간 관계도 그렇고, 국가 관계도 그렇죠."
정 이사장은 오랜 세월 동안 아버님을 통해서 역사책을 많이 읽고 노근리에 관련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근리사건을 다룬 논문과 책을 집필하는가 하면 4년 반을 넘게 내신과 외신에 알리기도 했다. 그 노력으로 AP통신에 특집으로 보도되는 성과도 얻었다. 그 기사는 미국 안팎에서 큰 논란을 불렀고 이듬해 노근리 사건을 보도한 기자가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기라도 한 듯 기뻤다고 했다.
"아버님을 통해서 역사책을 많이 읽고 노근리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까 중요성이 이미 파악이 되더라고요. 제가 그거 없이 무턱대고 시작했겠어요. 한 4년 반 내신과 외신에 알렸더니 AP기자가 왔는데 그때 저는 이미 많은 뉴스를 찾고 있었어요. 이 노근리 사건에 미군이 했다는 증거 자료를 찾아서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AP기자가 와서 보도하고 싶다고 매달렸어요. 그래서 제가 두 가지 얘기를 했어요.
첫 번째는 '이걸 정말 끝까지 보도할 수 있겠냐', 근데 하겠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퓰리처상 받으려고 하니까 그것부터가 이미 자격이 된 거죠. 끝까지 보도하겠다고 해서 고생을 엄청나게 했어요. 두 번째, 당신이 열심히 취재해서 큰 상 받으라고 제가 축복을 했어요. 퓰리처상을 받으라고 제가, 저는 이미 확신했기 때문에 그 기자한테.
그 기자가 6개월 취재해서 취재가 끝났는데 미국 AP본사가 이걸 보도 허용을 안 해요. 미국의 국익에 반하고 미국의 체면을 구기는 정말 망신살을 펼치고 정말 창피스러운 사건을 보도하려니 AP회장과 임원들이 못하게 막는 바람에 1년 동안 내부 전쟁을 했어요. 그래서 어렵게 보도를 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어야... 이야포 특위도 결국은 그거잖아요"
정 이사장은 가장 힘든 건 "미국사람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한국 사람은 흑백 논리로 반미주의자라 공격"한다며 그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이어 이야포 특위도 같은 맥락이라며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사람은 미안하다고 그러는데 한국 사람은 저보고 반미주의자, 친북 세력... 흑백 논리로 공격을 해대요. 저희 아버님이 한때 공직에 계셨고, 저도 한때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에요. 신분으로 따지면 사상이 가장 건전한 사람이에요.
피해 당사자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진상 규명해 달라 하고 보상해달라는 게 반미면, 반미 아닌 게 또 어디 있어요. 오히려 미국사람들이 와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 중에 공격해대는 사람이 있어 이게 제일 힘든 거예요.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저희 선친이 7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희 선친의 부고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실렸어요.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사실은 이야포 특위 등도 결국은 그거잖아요. 우리의 우군인데 친구 나라 와서 공격하고 거기다 어선이고 피난선이고 작살 내고 그 많은 이들이 돌아가셨잖아요. 전쟁이 없었다면 이야포 사건도 없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노근리)는 미군에서 이뤄진 전쟁 범죄 행위예요"
정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은 이념이 아닌 평화의 문제라고 했다. 이어 4박 5일 동안 노근리에서 자행된 미군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해 피해 당사자가 안 나서면 비굴한 행위라고 했다.
"이건 반전 평화의 문제이고 이념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이 지금 고쳐야 할 게 뭐냐 하면 5.18 가지고 동서가 갈리고, 거기를 또 비판한 적이 있었잖아요. 5.18도 민주주의 문제고, 그게 좌우 이념에 따라서 색깔 달리하고 판단할 사안이 아니잖아요. 노근리도 명확히 그렇습니다. 이거는 미군에서 이루어진 전쟁 범죄 행위예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배경 중에 여러 가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4박 5일 동안 이 일이 벌어졌어요. 전쟁 중에 적군과 아군 사이에 끼어서 민간인이 거기에서 희생된 것은 전쟁의 속성이니까 문제가 안 돼요, 이건 그게 아니고 5일 동안 벌어졌어요. 그게 어떻게 학살이 아니겠어요. 왜 전쟁 범죄가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걸 학자된 입장에서 제가 아무리 경영학을 했다 치더라도 피해 당사자가 안 나서면 그거는 비굴한 거죠.
이야포 문제는 저도 똑같다고 봅니다. 한 생명이 1천억보다 더 귀하다고 그러는데 거기(이야포)도 수백 명이 사실은 돌아가셨죠. 그래도 이렇게 돌아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거 대단한 거예요. 저는 피해 당사자가 하고 있는데 거기는 피해 당사자가 아닌 어떻게 보면 타지방 사람들이 거기 와서 돌아가신 분들을 이렇게 끔찍이 위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수준 높은 일이라고 제가 지난번 얘기를 했어요.
비록 힘들더라도 이왕 시작한 거 끝을 한번 보시게요. 우리 아이들을, 다음 세대를 위해서 준비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또 많은 분이 거기에 관광 오면, 다크투어리즘이라고 하는데 안도에 그분들이 오시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돼요. 저는 늘 이 안에 있지만. 지역 경제, 민생도 중요하거든요. 이 공원(노근리평화공원) 운영이 잘 되니까 영동군에서 8만 평을 더 사서 평화치유의 숲으로 추진한다고 올해 시작을 했습니다.
안도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지만 피해 본 섬이 몇 개 있어요?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다크투어리즘이라고 하는데 저는 여기다 아마 수목원 하면 수십만 명이 다녀가서 이 지역 경제에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다 그거 보고 해요. 저는 원래 경영학자였습니다. 이왕 하는데 인권도 알리고 지역 경제도 좋아지고 얼마나 좋습니까. 요새 지방은 소멸 도시라고 난리가 났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지역을 살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겠지요."
한편,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1950년 8월 3일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미군 전투기가 피난민을 태운 배를 북한군 선박으로 오인해 폭격한 사건이다. 이후 제1기 진화위가 나서서 희생자를 확인했지만 150명 피해자 중 5명의 희생자만 확인했다. 당시 폭격을 지시한 주체와 그 이유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그 진실을 알고자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위령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심명남)와 피해자 유족은 지난 8월 18일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달라며 '진실규명신청서'를 여수시를 거쳐 진화위에 접수했다. 이날 여수시 김지선 행정지원국장과 이야포 추진위 심명남 위원장, 박성미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특별위원장은 이야포 진실규명과 조사를 위해 적극적인 협조체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와 네이버 '맛돌이의 오지고 푸진 맛'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