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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기사님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거리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손엔 선물세트가 쥐어져 있다. 바야흐로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다.

이번 추석은 10월 2일 임시공휴일에 주말까지 끼고 있어서 길기도 얼마나 긴지. 며느리들에게는 명절 증후군을 안겨주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비혼 여성들에게는 "결혼은 언제 할래?"라는 무례한 질문을, 취준생들에겐 "취업 언제 할래?"라는 타박을 던지는 그 날이 도래하고 만 것이다.

긴 연휴 동안 그동안 피곤했던 몸을 푹 쉬게 해볼까, 아니면 며칠 여행을 가볼까 이런저런 구상을 하고 있긴 하다. 그래도 가장 많이 고민하는 건 다른 부분이다. 친척, 지인들이 "신랑은 왜 안 왔어?"라고 물어보면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까.

결혼에서 '탈출'한 나, 지긋지긋한 질문을 마주하다

그래, 나는 흔히 말하는 '이혼녀'. 다른 말로 하면 결혼제도에 한 번 편입되었다가 탈출한 '탈결혼제도 여성'이다.
 그래, 나는 흔히 말하는 '이혼녀'. 다른 말로 하면 결혼제도에 한 번 편입되었다가 탈출한 '탈결혼제도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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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흔히 말하는 '이혼녀'. 다른 말로 하면 결혼제도에 한 번 편입되었다가 탈출한 '탈결혼제도 여성'이다. 7년 전 결혼이라는 걸 했었고, 5년 전에는 또 이혼이라는 걸 했다. 물론 사는 동안 혼인신고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 친척, 지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잘살아 보겠노라고 선언했고, 축하도 받았으니 이혼은 이혼인 것.

당시 이혼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내 인생 전반에 대해 돌아볼 정도로 조금은 힘든 시기를 통과하긴 했다. 그래도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진 않는다. 지금은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이혼한 사실에 대해 어렵지 않게 말한다. 또 다른 여성들과 결혼 생활을 하며 느꼈던 바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눈다.

지금은 이혼을 그저 내 인생에서 지나온 많은 일들 중 하나로 의미 부여하고 있다. 일상에서 이혼한 것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거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기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느끼는 시기가 있으니, 바로 '명절'.

친척들과 부모님이 사시는 곳의 지인분들은 아직도 내가 결혼한 상태라고 기억하고 있다. 혼자 부모님 집에 떡하니 있는 나에게 그들은 한결같이 물어왔다.

"신랑은 왜 같이 안 왔어?"

이혼한 첫해에는 부모님댁에 가며 예상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까 한참 고민했다. 그땐 "아, 신랑이 일이 많아서 저만 왔어요. 명절 지나고 같이 와야죠"라고 말했다. 그다음 해에는 "신랑이 중국으로 파견 갔어요"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다고 질문이 끝나는 건 아니다.

"아이는?" 그 질문 다음에는 서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마냥 "얼른 더 나이 들기 전에 아이를 가져. 부모님이 얼마나 손주를 기다리겠어"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당황스러웠지만 엄마, 아빠 두 분이 지금 어떤 기분이실지 그게 더 신경 쓰였다.

그러기를 몇 해. 명절이면 다른 사람 모르게 도둑처럼 조용히 부모님 댁을 다녀갔고, 때로 지인들이 찾아오면 다른 방에 가서 나오지 않고 있기도 했더랬다. 그렇게 서로가 불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엄마, 아빠랑 같이 저녁을 먹고 있는데 친척 분에게 전화가 왔다. 서로 정답게 추석 인사를 주고받던 엄마.

"응. OO는 아직 안 왔어?" 라고 묻는 친척분의 질문에 "네, OO는 아직 시댁에서 안 왔죠"라고 태연히 답하시는 거다. 나는 눈 시퍼렇게 뜨고 옆에 있는데.

그 전화를 끊은 엄마에게 "아니. 있는 사람을 왜 없다고 그래"라며 타박을 하곤 "그냥 '내 딸 이혼했소'라고 말해버려"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거짓말하며 전전긍긍하시냐고, 요새 이혼한 사람들이 넘치고 넘쳐서 그거 무슨 약점도 아니라며.

그날 엄마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래도 아직은 안 그래, 뒤에서 얼마나 수군대는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결혼 적령기(결혼에 적당한 나이를 정해놓는다는 게 얼마나 우습냐만은)의 여성이 결혼하지 않으면 뭔가 성격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혼해서도 아이가 없으면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게 먼저 찾고, 혹은 몸매 망가질까봐 아이를 안 가지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이혼한 여성에게 붙는 수많은 말들은 또 얼마나 많으랴. 엄마는 나보다 그걸 더 잘 알았던게지. 경험치로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명절을 지나오며 매번 부모님이 거짓말을 하시거나, 지인들의 말에 그냥 모른 척하시는 걸 보며 죄송한 마음이 점점 더 깊어졌다.

"이혼한 내 딸, 더 잘 삽디다" 이 말,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명절이면 다른 사람 모르게 도둑처럼 조용히 부모님 댁을 다녀갔고, 때로 지인들이 찾아오면 다른 방에 가서 나오지 않고 있기도 했더랬다.
 명절이면 다른 사람 모르게 도둑처럼 조용히 부모님 댁을 다녀갔고, 때로 지인들이 찾아오면 다른 방에 가서 나오지 않고 있기도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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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선택할 때는 그저 이건 내 삶의 문제이고 내가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님도 내가 행복한 길을 응원해주실 거라고 확신했고. 물론 나의 부모님은 내가 그 선택을 했을 때 다른 질문을 크게 하지 않으셨고 온전히 나를 믿고 지지해주셨다. 그게 이후 살아가는 내내 가장 큰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부모님이 마주할 불편함에 대해선 난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 결혼하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듯, 이혼 또한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그 '이혼'이라는 꼬리표가 부모님 세대에겐 더 크고 무겁다는 걸.

그 뒤로 몇 해의 명절을 보내며 나는 진지하지 않은 척, 장난스럽게 이야길 드리곤 한다. 그냥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마음 편하게 사시라고. 나는 너무도 괜찮다고.

그런데 두 분은 아직도 준비가 안 되신 듯하다. 오히려 당사자인 나는 괜찮은데 부모님이 괜찮지 않은 아이러니한 상황. 어쩌겠는가. 두 분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셨다는데.

그리고 그걸 강요하는 것도 어찌 보면 내 마음 편해지자는 욕심 같아서 그냥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두 분의 마음이 편안해질 때를. 아무렇지 않게 "내 딸 이혼했소, 근데 그 전보다 더 잘 삽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그때를.

덧, 이런 고민을 아는 언니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명절 때마다 부모님에게 죄짓는 마음이 든다고. 그랬더니 그녀 왈,

"그냥, 남자친구 있으면 남자친구 데리고 가버려. 어른들은 네 신랑 얼굴 기억 못 한다. 아마 그 남자가 네 신랑인 줄 알 거야. 사람들은 사실 다른 사람에게 그리 관심 없어."

이 대답을 듣곤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왠지 조금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실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 엄마한테 언니가 해준 말을 전했다가 뒤통수 크게 맞을 뻔했다는 후문이 있긴 하지만.(^^)


태그:#명절, #추석,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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